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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차곡차곡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을 가지런히 겹쳐 쌓거나 포개는 모양이다. 세간에서 차곡차곡은 차와 곡식을 잘 준비해 놓은 모습이거나 차와 곡차를 더불어 즐기는 정경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가을에 차곡차곡이 차와 곡식이 넉넉한 풍요롭고 여유 있는 정경으로 연상된다.

차 생활이 어느덧 20년을 넘어가면서 보이차는 물론 자사호 관련 서적도 읽어가며 차에 대한 상식이 깊어가는 만큼 방에는 마실 차가 쌓여갔다. 차 가격이 천차만별이요 좋은 차의 값은 천정부지이다. 지갑형편을 고려하여 보관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속내로 중저가의 차를 익어가는 순으로 마시고 차맛을 아는 우리 딸들에게도 농익은 차를 주겠다하니 따라다니며 물건 못 사게 잔소리하는 아내도 막을 핑계가 없다. 집안에 쌓여가는 차만큼 마음도 풍족해갔다. 차라는 것이 환경에 워낙 민감하므로 건창과 습창의 맛이 다를 뿐더러 같은 차일지라도 중국과 한국에서 보관한 차 맛이 확연히 다르다. 이토록 냄새에 민감하다.

그런데 금년 초 있었던 집안의 작은 화재로 연기와 그을음이 가구와 옷가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니 그동안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차도 그을음 폭탄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혹시 랩으로 잘 둘렀던 차는 어떨까 하여 조심스레 시음해 보니 이도 역시 혀를 톡 쏘는 맛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홍수 때문에 시뻘겋게 변해버린 물 천지 속에서 마실 물이 없어 애 타는 사람처럼 사방 물 천지인 바다 한 복판에서 마실 물이 없어 입술 타들어가는 사람처럼 나는 차 덩이 속에서도 마실 차가 없어 목이 마르다. 차가 없으니 마음에도 궁기가 도는지 매일 저녁에 일상처럼 감미롭게 듣던 세상의 모든 음악마저 싱거운 느낌이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에 평균 3번 이상 마시던 차를 못 대하니 허전하고 아쉬워 자꾸 주위를 서성이게 된다. 그런 중에 매년 「추석맞이 세일」하는 카페의 공지가 뜨기를 기다리는데 마치 설빔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아이의 마음이라. 드디어 구매한 차를 예상보다 일찍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고작 병차 몇 편인데도 찻자리 옆에 벌려두고 보니 이리 좋을 수가 없다. 왼쪽에는 마실 차가 있고, 오른 옆에는 먹을 곡식이 있으니 볼 때마다 흐뭇하고 넉넉한 느낌까지 차곡차곡 쌓이는 듯하다. 이렇게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생기고 아끼던 차를 덜어주어 갈증을 풀 수 있게 해 준 분에게 감사를 표할 생각도 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이런 심정일 텐데 주위의 형편을 잘 헤아려 준 사람이 경주 최부자이다. 흉년에는 굶주리는 이웃을 보살폈고, 임정을 위한 독립자금까지 지원한 행적을 보면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과는 전혀 다르다. 최부자 집안 철학인 육연(六然)은 자처초연(自處超然), 대인애연(對人靄然), 무사징연(無事澄然), 유사감연(有事敢然),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태연(失意泰然)이라.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데 12대 300년간이나 만석꾼으로 부를 유지한 노하우가 이 같은 가내 철학 덕분이다. 어디 최부자댁 뿐이겠는가. 다른 부자들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곳간의 외부 문을 열어서 이들이 필요할 때 퍼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모두 차곡차곡의 여유를 가진 때문이라.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 거개가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과정을 무시하고 박기후인(薄己厚人-자기에게 엄하고 남에게 너그러움)의 정반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식 자랑은 하되 이를 지혜로 가꾸지 못하니 차곡차곡의 여유는 물론 철학마저 없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자기를 살피지 않으니 주위를 배려할 줄도 모르고 베풀 줄도 모를 뿐더러 배운 대로 행하지 않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우리의 옛 선비들이 알면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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