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바위

2013.06.26 18:14:23

권영이

증평군청 행정과

마님은 늦잠을 자려고 새벽빛이 창틈으로 들어오거나 말거나 모른 체한다. 그런데 이른 새벽부터 마님 동서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마님을 찾는다. "형님! 저 왔어요."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보지 못한 동서다. 마님은 벌떡 일어나서 달려 나가 맞이한다.

마님 동서는 소탈하고 넉넉한 마음을 지녔다. 그래서 마님은 동서를 좋아한다. 마님과 동서는 자주 만나 어울리지 못해도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

마님에게 동서는 무더운 여름에 가끔씩 찾아오는 장대비 같은 존재다. 길고 무더운 여름에 장대비라도 내리지 않으면 얼마나 푹푹 찌겠는가? 그런 동서가 온다는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아이고, 울 형님 눈에 달린 눈곱이 반근은 되겠네. 하하하." "연락도 없이 꼭두새벽에 뭔 일이여?"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주문진 가는 중인데, 가다가 형님 생각나서 다시 돌아왔어요." 마님과 삼돌씨는 얼결에 동생네 부부에게 납치당해 끌려간다. 네 사람이 주문진 갯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 이층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마님 일행이 들어올 때부터 파도가 검고 투박하게 생긴 바위를 연신 때리고 있더니 지금도 딱 그만큼의 몸짓으로 때리고 있다. 마님이 넋을 놓고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던 동서가 한 마디 한다.

"형님, 저 바위는 바보처럼 저렇게 맞고만 있대요?" "응? 그러게. 근데 이제 보니 동서 시인 같다." 마님 동서는 시인 같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소주잔을 기울인다.

"형님, 오늘 기분 엄청 좋은데 저거 보고 시 하나 지어서 낭송 좀 해봐요." "시가 그렇게 금방 나오면 다 시인되게?" "에이, 형님은 할 수 있다니까요. 얼른 해 보세요." 마님 동서가 마님 허리를 붙잡고 자꾸 조른다. 마님도 흥에 취에 젓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주절주절 읊조린다. 옆에서 동서가 장단을 맞춘다고 후렴까지 넣는다.

갯 바 위 풍덩, 푸른 바다에 빠진 해 그림자 / 젖은 옷 말리려다 미끄러져 / 그만, 물미역이 되었다지? 반짝, 제 빛에 눈 먼 별똥별 / 돌부리에 걸려 붉은 상처 안고 / 그만, 멍게가 되었다지? 깜깜, 밤하늘 문고리에 낀 새벽 / 시퍼렇게 멍든 손가락 바다에 씻다 / 그만, 해삼이 되었다지? 철썩, 긴 세월 파도에 맞은 상처 / 깊게 패인 주름 속에 감추느라 / 그만, 갯바위가 되었다지? 마님 시 낭송이 끝나자 동서 내외는 식탁을 다다닥 두드리며 박수를 친다. 마님은 우쭐해서 소주잔에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와! 우리 형님, 대단하다. 즉석에서 어떻게 이런 시를 생각해낼까?" 마님은 불그레한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부끄러워한다.

"헤, 실력이 아니고 순전히 술빨이야." "에이, 그렇다면 한 잔 더 해요. 그래야 쐬주빨 받아서 한 수 더 읊지." 마님은 동서가 들이대는 소주를 사양 않고 넙죽 받는다. 삼돌씨가 옆에서 걱정스런 눈빛을 보낸다.

"제수씨, 이 사람 사고 쳐도 나 몰라요. 제수씨가 다 책임져요." "하하, 걱정 마세요. 오늘은 제가 울 형님 책임질게요." 마님은 요즘 여러 번의 허리 수술을 하신 시어머니 걱정에 답답했던 마음을 동서 덕분에 한 여름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시원하게 풀어낸다.

누군가에게 나도 길고 지루한 여름에 쏟아지는 소낙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 천방지축 마님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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