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벌레

2012.07.11 16:21:15

권영이

증평군청 행정과

한낮에 데워진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희붐하게 날이 밝는다. 마님은 밤새 덥다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새벽이 돼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동상! 난 디, 우리 배추밭에서 배추 뽑아서 김치 담궈 먹어. 내가 뽑아주고 싶은디 동상이 바빠서 김치 못 담그믄 시들잖여.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뽑아 먹어. 알았지?"

근상이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깬 마님은 하품 끝에 매달린 잠을 털며 얼른 현관문을 연다.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만날 신세를 져서 어쩌지요?"

"별소릴 다하는구먼. 신세는 무신. 있으니까 나눠먹는 거지."

마님은 날마다 야근을 하네, 모임이 있네 하고 핑계를 대며 아주머니가 다녀가신지 며칠이 지난 오늘 밤에야 손전등을 들고 배추밭으로 간다.

마님은 속이 꽉 찬 배추가 생각보다 잘 안 뽑히는지 배추를 잡고 끙끙댄다. 간신히 한포기 뽑고 다른 포기를 뽑으려는데 마을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며 소리를 지른다.

"어이, 거기 누구여?"

마님이 배추를 뽑다말고 화들짝 놀라 뒤로 벌렁 나자빠진다.

 "도둑이구먼. 뭔 핼짓이 읎어 농사꾼 배추를 훔치는 겨?"

 "저, 저... 도둑 아닌데요."
 
"그럼 시방 뭐하는 겨?"

 마님은 할아버지가 들이대는 손전등 불빛을 손으로 가리고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얼버무린다.

 "도둑은 아니고... 그냥 배추벌레인데요."
 마님은 얼떨결에 엉뚱한 대답을 해 놓고 자기도 어이가 없는지 할아버지를 올려다보고 헤 하고 웃는다.
 "뭐여? 배추벌레?"
 할아버지가 손전등을 마님 얼굴에 바짝 들이댄다.

 "잉? 외딴집 김씨 아낙이구먼. 근디, 근상이네 배추는 야심한 밤에 왜 뽑는 겨?"

 "아주머니가 시간 날 때 뽑아 먹으라고 하셨는데 제가 매일 늦게 퇴근하는 바람에..."

 마님 말을 들은 할아버지도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하며 내려가고 마님은 간신히 뽑은 배추 한포기를 안고 돌아온다. 여름밤 배추벌레가 된 마님을 보고 풀벌레들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린다.

 삼돌씨는 입술을 비죽대며 들어오는 마님을 보고 묻는다.

 "나갈 때는 신나게 나가더니 왜 그런 똥 씹은 얼굴로 돌아 와?"

 "나 오늘 졸지에 배추벌레가 되었단 말이야. 할아버지가 동네방네 소문 다 내실 텐데 어쩌지? 큰일 났네."

 마님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던 삼돌씨가 창피해 죽겠다고 속상해하는 마님을 달래준다.

 "까짓것 소문내라고 해. 세상에 이렇게 통통하고 귀여운 배추벌레가 어디 있다고? 흐흐흐."

 조금 전까지 창피하다고 툴툴대던 마님은 삼돌씨가 편을 들어주자마자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잠이 든다.

 나이 먹을수록 순수해지려고 애쓰는 마님을 응원하는 귀뚜라미 합창소리가 여름밤을 요란하게 흔든다.
 
 가벼운 유머가 때로는 커다란 위기를 이겨내는 힘이 될 수 있다.

 - 천방지축 마님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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