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차

2012.05.30 13:24:36

권영이

증평군청 행정과

햇살이 이른 아침부터 마님네 마당에서 뒹굴 거린다. 주변이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한 마당이 환하다. 나무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마님도, 하품을 하고 있는 흰둥이도 마당 풍경이 된다.

삼돌씨는 잔디 깎기에 기름을 치고 닦느라 바쁘다. 키가 들쑥날쑥한 잔디가 겁을 먹고 몸을 뒤채느라 아우성이다. 한순간에 마당의 평화가 깨지고 마님이 입까지 비죽이며 화를 낸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달아나려고 해. 나쁜 자식."

그런 마님을 바라보던 삼돌씨가 자기한테 하는 말인가 하고 고개를 번쩍 든다. 흰둥이도 고개를 갸웃댄다.

"누구? 나?"

삼돌씨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마님에게 다가와 허리에 손을 얹고 따지듯 묻는다. 마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그러냐는 듯이 삼돌씨를 올려다본다.

"방금 나한테 욕 했잖어?"

마님은 벙벙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인다.

"방금, 마님이 말한 '그 자식'이 나 아니여?"

마님이 큭큭 거리며 웃는다.

"그 나쁜 자식이 누구냐고? 오월이야. 바로 얼마 전에 벚꽃을 밀어내고 나타나기에 오래 머물 줄 알았는데 벌써 간다고 설치니까 너무 밉잖아."

삼돌씨는 주먹을 동그랗게 말고 마님 이마에 들이대는 시늉을 한다.

"매년 때가되면 왔다가 가는 게 계절인데, 난데없는 투정은 왜 부려?"

삼돌씨 말에 마님은 한숨을 길게 쉬며 중얼댄다.

"그러게. 늘 같은 시기에 왔다가 가는 게 계절이건만 왜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지?"

평소 장난기 가득한 마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쓸쓸해 보이는 아줌마가 삼돌씨를 보며 묻는다. 삼돌씨가 마님 어께에 손을 얹고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게 우리네 인생 속도라서 그런 겨."

삼돌씨가 말없이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물을 담은 커다란 사발과 찻잔 두 개를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마당 한 가운데에 사발을 놓는다. 애꿎은 햇살만 영문도 모르는 체 물 사발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댄다. 다리를 쭉 뻗고 누워있던 흰둥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벌떡 일어나 마당 한가운데 놓인 사발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삼돌씨는 조금 후에 사발에 담은 물을 찻잔에 가득 따라서 마님에게 건넨다.

"마님, 삼돌이표 햇차입니다요."

"햇차?"

"햇살을 가득 담은 차라 마시면 마음이 금방 환해지는 차입지요."

조금 전까지 온갖 근심 다 짊어진 사람처럼 어두워보이던 마님 얼굴이 오월 햇살보다 더 환해진다. 이때다 싶었는지 숨어있던 마님 목주름도 기지개를 켠다.

마님은 오월은 명징해서 참 좋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삼돌씨와 흰둥이도 고개를 끄떡인다.

무한 리필 되는 햇차를 드립니다. 단, 찻잔은 각자 가지고 오세요.

- 천방지축 마님생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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