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를 하고 집 가까이에 있는 도시공원인 장구봉에 올랐다. 하지가 얼마 남지 않은 때라 날씨도 후덥지근하다. 저녁 식사 후 봉우리에 올라도 해가 서쪽에 많이 남아있다. 낮이 길면 하루가 더 긴 것 같이 느껴진다.
장구봉은 가경중학교 정문 앞에 있는데, 산은 주택지로 개발되어 지금은 봉우리만 남아있다. 봉우리 바로 밑에 서너 동으로 된 빌라가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 중에 부도가 나서 공사를 중단하였다. 푸른 산 밑이라 삐져나온 녹슨 철근이 흉물스럽다. 공원 입구에 있는 샘물은 물맛이 좋아 주민들이 많이 찾았으나 지금은 맛이 변했는지 찾는 사람이 뜸하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이 산책과 운동을 한다. 가끔 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는 사람도 있다. 가로등이 있어 밤에도 찾는 분이 있다. 도심의 숲 공원은 시외로 나들이가 어려운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좋은 휴식처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빛을 보면서 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무가 풍기는 피톤치드로 생활 속에서 싸인 스트레스와 심리적 피로를 떨쳐버릴 수 있다.
봉우리에 어떤 분이 소나무에 줄로 화이트보드를 매달아 놓고 매일 새로운 사자성어를 적어 둔다. 잊혀가는 기억을 매달아 놓고 싶은 것일까. 옛 성인의 말씀을 다시 새기며 마음을 수양하고 싶은 것일까. 공원을 찾는 분들에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일까· 전직이 학교 선생님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는 사자성어를 적어 두었다. 새벽에 생겼다가 햇볕이 나며 바로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에 사라지는 풀잎에 맺힌 이슬이 사람의 한 생애와 같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138억 년 전 빅뱅이 있었고, 46억 년 전에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람의 수명을 100년도 잡아도 한 생애를 지구의 역사에 비교하면 이슬과도 같다.
이 사자성어를 쓰신 분은 인생을 예쁘게도 이슬과 같다고 했다. 티 하나 없는 이슬이라 했으니 그분의 삶은 맑고 깨끗했을 것 같다. 그 당시 삶의 터전도 맑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슬로(露)를 보면 길(路) 위의 비(雨)로 표현했다. 요즘은 길 위에 비가 오면 미세먼지가 섞인 흙물이다. 도시의 포장도로에서는 이슬을 찾아보기 어렵다.
살아가는 모습도 흙탕물 같다. 미성년자를 협박해서 성 착취를 한 텔레그램을 통한 n번방 뉴스, 아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아홉 살 아이를 여행용 가방에 가두어 죽게 한 뉴스, 집무실에서 여직원을 강제 추행한 어느 단체장의 뉴스뿐만 아니라 상처가 아물지 않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돈과 권력을 쥐려다 동티가 나기도 한 뉴스도 있다. 깨끗하고 고귀한 삶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도심의 도로에서 이슬을 찾는 것 같다.
어릴 때 아침 일찍 시오리를 걸어 학교에 가면 논두렁 밭두렁의 풀에 맺힌 이슬에 신발이 다 젖었다. 신발에 이슬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어도 소용없었다. 이슬에 젖은 신발은 길바닥의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양발을 하나 더 준비해 가서 학교에서 갈아 신어야 했다.
사막에 사는 전갈은 햇볕이 강한 낮에는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기온차이로 생긴 이슬로 수분을 섭취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주말 농사를 지어보니 이슬이 새삼 고맙다. 여름철 덥고 가물 때는 농작물이 타 죽을 것 같은데, 그럴수록 아침에 이슬은 더 많이 생긴다. 농작물은 잎에 맺혀 떨어지는 이슬로 생명을 유지한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빛난다. 영롱하여 영혼에 울림을 준다.
장구봉을 돌면서 찰나 같은 인생이 흙탕물 같지 않고 이슬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짧지만 이 세상의 일을 다 마치고 갈 때는 이슬같이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고 싶다. 가물 때 누군가에게 양분이 된다면, 덧없는 인생이라 했지만 분에 넘치는 한 생애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