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막에 심어놓은 박이 어느새 자랐는지 소박한 모습으로 꽃이 피어나고 있다.
유년 시절에는 달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박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첫사랑 설렘처럼 다가와 눈물을 그렁거릴 때가 있었다. 행랑채 지붕위에는 엄마를 닮은 청순미와 동생의 가련 미를 닮은 희디흰 빛깔의 박꽃이 앉아 있었다. 박꽃은 안으로 다스려온 그리움으로 영글어 노을 진 지붕 위를 하얀 꽃등으로 수를 놓았다. 모두가 잠든 밤 하얗게 피어나는 꽃은 텃밭에서 돌담위로 뻗어나가 번성하기도 했다. 깊어가는 가을이 되면 지붕위에서 오형제 박들은 몸통을 불리고 마당가운데 멍석에는 붉은 고추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익어가는 둥근 박과 지붕곡선이 어우러져 한 폭 풍경화처럼 보였다.
단풍이 물든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릴 때쯤 지붕위에서 박을 따 내려 마당가에 갖다 놓았다. 부모님은 멍석위에 마주 앉아 박을 정성스럽게 중앙을 톱질하셨다. 박 속을 파내고 커다란 가마솥에 차곡차곡 담아 삶아내셨다. 다 익은 후에 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말리면 짱짱한 박 바가지가 되었다. 바가지는 물을 뜨기도 하고 곡식을 퍼내기도 하면서 생활용구로 쓰셨다. 항아리에서 약술이 뽀글뽀글 익어가는 소리를 내면 조롱박을 넣어 맑은 술을 떠 할아버지께 드렸다. 옥수수나 감자를 익혀 새 바가지에 들고 다니면서 뜨겁지 않게 먹을 수도 있었다. 언니가 결혼할 때 현관 앞에 바가지를 엎어 놓으면 함진아비가 들어오며 발로 밟아 단번에 박살내고는 들어왔다. 부부로 살면서 풍파를 겪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이었다. 개구쟁이들은 바가지에 조각을 하여 탈을 만들어 쓰고 생활에 흥치뿐 아니라 콩서리, 닭서리, 참외서리를 할 때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신석기 때는 조개탈로 그 후로는 나무나 바가지로 탈을 만들어 썼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바가지의 용도는 다양했다. 어머니는 바가지를 여러 개 걸어두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였다. 찬장에 유기로 된 놋그릇이 진열되어 있어도 들에 나갈 때는 바가지를 가지고 가셨다. 가볍기도 했지만 바가지의 하얀 속안에 밥을 담아 비벼먹는 새참은 꿀맛이었다. 새참을 먹은 후 바가지를 씻을 때에는 밀가루를 풀어 천연수세미로 닦으면 고추장 물까지 씻겨 속을 비운 듯 개운했다.
우리 집은 부농이었다. 동네 분들이 장리쌀을 가져가고 가을에 추수하여 갚곤 했다. 수확이 적었던 해에는 새해가 되기 전에 쌀이 떨어지는 집이 많았다. 어머니는 바가지에 쌀을 담아 광목보자기를 덮어 어른들이 계시는 집에 할머니 몰래 전해 드렸었다. 어머니 심부름을 가다가 할머니와 마주칠 때면 놀라서 쌀이 담긴 바가지를 떨어뜨려 박살이 났었다. 쌀이 흩어져 길 위에 자갈 속으로 들어갔다. 헐떡거리며 어머니 품안에 안기는 나를 보고 "할머니를 만났구나, 놀라지 않았니·" 하시면서 꼭 안아주셨다. 바가지와 빗자루를 들고 흩어진 쌀이 있는 길에 도착하니 누군가가 쓸어가고 없었다. 그런 날에 할머니는 어머니 저녁밥을 굶게 하셨다. 박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난날이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아련히 떠오른다.
농막에는 박 덩굴과 호박덩굴이 경쟁을 하고 있다. 호박덩굴은 땅으로 기고 박은 소나무를 타고 오른다. 백송나무에 다섯 덩이가 달리더니 가지가 휜다. 호박 줄기보다는 박 줄기가 더 우세인 것 같다. 추석에는 박을 따서 탕국을 끓이고 조청에 박고지를 함께 졸여 박정과를 만들고 나머지는 등으로 만들어 가라앉은 마음을 박꽃처럼 환하게 밝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