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에게 시의 기호는 꿈꾸는 존재들, 낯선 감각의 전달자들이다. 그녀는 익숙하고 편리한 일상으로 회귀하려는 시적 관습을 거부한다. 그녀의 시에는 대상과의 서정적 동일성을 거부하는 의식이 나타나는데 주목되는 건 시인의 육체 속에 숨죽인 무의식의 목소리들이 은유의 방식으로 함께 병렬된다는 점이다.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낯선 이미지들이 다채롭게 몸을 바꾸면서 충돌하여 하나의 몸으로 결합한다. 그녀에게 은유는 자아의 분열 양상이라기보다 타성에 젖은 육체의 모든 감각들의 분화, 사회적 통념과 관습으로부터의 배반을 의미한다. 즉 은유는 고착된 의미와 낡은 세계를 청산하기 위한 시인의 필연적 선택이며 획일화된 정답의 세계로부터 이탈하가 위한 비유장치인 셈이다. 세상은 붉은 모래와 물로 이루어진 은유 공간이고, 우리는 모두 사랑과 슬픔을 노래하는 갈대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아직 은빛 갈대들의 안 들리는 노래가 절반이나 남아 있기에 세상은 영원한 은유의 시로 남고, 장엄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 줌 모래라는 인식을 낳는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진은영의 시는 낯선 감각들의 모음집, 은유적 이미지 집적물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철학적 사유다. 그녀의 시는 시의 문으로 들어가 철학의 문으로 나오기도 하고 철학의 계단을 올라가 시의 계단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횔덜린 시와 하이데거 철학의 결합처럼 감성과 이성의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만큼 그녀의 시에서 시적 비유와 철학적 사유는 매우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이는 그녀의 시가 고통의 상흔이자 사색의 고백임을 암시한다. 이런 사유 때문에 외관상 단정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시는 중층적 의미를 발산한다. 투명한 이미지와 사색적 아포리즘이 섞여 묘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카프카 방식의 유머와 알레고리, 괴테나 릴케 같은 외국 시인들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그러나 그녀 특유의 치열한 자의식, 인식의 전환을 낳는 시어 선택을 통해 불안한 현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낸다. 소외되고 억눌린 현실의 어두운 풍경들을 차분히 사색하고 성찰한다. 이때 시인은 메시지 전달에 급급하지 않고 최소의 어휘와 간명한 표현으로 시적 사유를 증폭시킨다.
달팽이 대장 - 진은영(1970~ )
나는 달팽이의 대장
비 오는 날엔 목을 길게 빼고
쏟아지는 빗물 받아 마셨다
축축한 담장 밑에 모여
우리들은 벽을 오르고 싶다
벽은 멀어도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비는 내릴 거야
중간쯤 올랐을 때
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몽글몽글 햇빛에 구워진 빵처럼
말라갔다
더러는 조금 위에서
더러는 조금 밑에서
거대한 벽의 사막에서
점점이 수직으로 붙어서
바다를 증명하려는 조개의 화석처럼
그 애들이 굳어가는 걸
보았다 나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단단히
굳어가면서
오래전 시인이 동사무소에서 일하던 시절, 시를 쓰고 싶어 하던 시인은 한 언니에게서 시인은 철학을 잘해야 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후 시인은 철학과에 진학하여 니체, 들뢰즈, 칸트의 철학에 빠져들고 마르크스의 노동과 자본론도 공부하며 그녀만의 세계를 형성해간다. 철학할 때처럼 그녀가 시와 관계하는 중요방식 중 하나가 메타적 질문이다. 철학이 세계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녀에게 시는 언어로 하는 철학이자 미학 행위일 수 있다. 타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함께 사색하면서 이 둘 사이의 연계성,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반성적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비판의 시선과 질문 때문에 진은영의 시는 현실세계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내장한다. 이 문제의식을 통해 그녀 특유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정치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새로운 감각의 시세계가 펼쳐진다. 문학적 글쓰기와 현실 정치의 간극 속에서 그녀는 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혁명과 철학의 세계로 시야를 넓혀나간다. 삶의 실험이 문학적 실험과 동행되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그녀는 통제와 억압의 모순투성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리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질병과 악취가 풍기는 우리 시대의 가슴 한복판, 광장으로 나아간다. 힘없는 수많은 달팽이들과 연대하여 달팽이 대장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은 벽의 세계를 오르고 오른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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