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기억은 결핍된 타자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육체 깊숙이 가라앉은 상처의 앙금들을 건져 올리는 행위다. 아픈 기억을 시각적 영상으로 되살려내면서 시인은 고통과 환희, 냉기와 온기,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체험한다. 그래서 사랑이 펼쳐질수록 시적 자아는 대상들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진다. 기억을 통한 시인의 사랑의 발현 행위가 종종 자기 부재와 환멸을 낳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의 몸은 지나온 사랑의 기억들이 아프게 채록된 아픈 책, 숨 쉬는 시집과 같다. 그의 시가 따듯하고 재밌으면서도 비극의 메타포로 읽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영민의 시는 환멸의 서정과 향수의 서정을 동시에 지닌다. 첫 시집 『악어』(2005)에서 그는 주로 도시의 환멸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도시는 생존을 위한 악어들의 먹이 전쟁터로 그려지고 이런 삭막함의 이면에 유년에 대한 짙은 향수가 짙게 깔린다. 이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사는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유년에 대한 기억이 펼쳐질 때 고영민의 경우 대체로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사물에 대한 열린 감수성이다. 즉 그의 시는 환멸과 향수 사이, 도시와 시골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 개인과 가족 사이, 인공성과 감수성 사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발생한다.
중요한 점은 이 향수의식이 죽음과 연계되어 생의 유한성 혹은 죽음의 향(香)을 발산한다는 점이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사물과 인간의 등치(等値)다. 새, 갈대, 나무 등 자연세계의 사물들이 등장하여 시인의 생각과 속마음을 담아낸다. 사물과 시인의 동일화는 독자를 시인의 사유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둘째는 이질적인 사물간의 결합 또는 콜라주다. 어떤 물리적 관계나 상관성이 없는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물질과 관념 등이 결합하여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낯선 인식을 낳는다. 이런 유쾌한 층격을 통해 시인은 생에 숨겨진 또 다른 비의들을 벗겨낸다.
이 두 가지 방법이 결합된 시가 「출산」이다. 이 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화장 장면을 다루고 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 뼈만 남은 어머니가 화구에서 나오는 장면, 분쇄사의 손을 거쳐 가루가 된 어머니가 유골함에 담기는 장면, 그것이 시인의 품에 전달되는 순간의 정적과 온기, 유골함을 받아 안는 시인의 슬픔이 내면화되는 모습이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장황한 수사나 설명 없이 행을 줄여 감정을 줄였고 행간을 넓혀 울림을 넓혔다. 인상적인 점은 죽음에 대한 통찰과 역설적 인식이다. 화구를 빠져나온 어머니는 자궁에서 산도(産道)를 빠져나온 아기로 치환되고, 아기는 시인의 품에 안겨 응애 하고 생의 첫 울음을 터트린다. 이 역치된 상상과 동일화가 뼈아픈 감동을 낳는다. 한 생명의 죽음이 새로운 생의 시작이라는 역설적 해석이 가능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일원론적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시인에게 생사는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윤회(輪廻)의 고리,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원형의 세계다.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