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새로운 다짐

2024.01.25 14:06:37

카페에 홀로 앉아있다.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오랜만에 여유를 가져본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고 이름 모를 선인장이 갓 꽃망울을 터트리며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앙증함에 펜으로 윤곽을 잡아 보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그리던 종이를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말았다. 버려진 종이처럼 나도 쓸모없다 생각하며 지낸 적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며 생활하던 첫 직장에서의 갑작스러운 해고는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했다.

첫아들을 낳은 아내의 얼굴을 처음 대면한 순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다. 몇 시간의 산고의 고통에서 쏟아 낸 땀과 눈물로 얼룩진 모습은 지난 30년의 세월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이었다. 한 생명을 탄생시켜 사랑으로 성장시키려는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오롯이 집중한 그 시간은 성스럽기만 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며 예고 없이 찾아 온 아픔을 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지나온 시간들을 반성하고 또 새로운 다짐을 하며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 됐다.

어떤 단체든 그 구성원은 각 개인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스스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감춰져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나름의 책임과 의무로 그 역할을 성공시키려 온갖 노력을 쏟는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하며 40대 중반까지 하루하루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불운은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소리 없이 다가왔다.

첫 직장에서 20년 만에 강제로 떠밀려 난 그날은 평생의 쓰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동안 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혹시 예전의 직장동료나 지인들을 만날까 봐 낮에는 집에서 머물고, 밤에만 잠깐씩 외출하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 위축되고 초라해져 남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수한 별들이 무심하게 세상을 밝히고 있고, 그 많은 별 중에 어느 별 하나도 나의 마음을 몰라 주는 듯해,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때의 아린 마음이 지금도 가슴에 밀려 온다.

지인의 소개로 파주의 새로운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월요일 새벽이면 파주로, 금요일 저녁이면 청주로 그렇게 6년을 주말부부로 지냈다. 그런 시절에 만났던 사람 중에 K라는 친구가 있었다. 파주에 다니던 회사의 계열사 직원으로 근무하며 가끔 얼굴을 익혔고, 어느 순간 계열사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내가 다니던 곳으로 이직해 왔다.

나름 능력있고 예의 있는 후배로 생각하며 지내었는데, 일순 또 나갈 처지가 돼 어느 날 축 처진 어깨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 나의 쓰라린 기억이 떠올라, 동병상련의 마음이 일어났다. 수소문 끝에 다른 직장을 소개해 줬다.

나도 이제 60을 문턱에 두고 있다. 첫 직장을 떠난 이후 몇 번의 이직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낯선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어느새 정년을 바라보는 지금, 세월의 무심함과 무상함에 이제는 예전의 마음이 많이 치유됐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 그때의 기억들은 인생에서 하나의 교훈으로 남도록 마음을 굳게 다잡는다.

매년 1월에는 여러 결심을 해왔다. 30~40대에는 외국어 배우는 것을 우선으로 뒀고, 50대는 자격증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려 했으나, 매년 12월이 돼 그 해를 뒤돌아보면 막상 이뤄 놓은 게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계획과 실패의 반복이었다.

1월에는 뭔가 해 보겠다는 굳은 결의로 계획을 세우며 뿌듯해하고, 12월에는 나약한 의지와 게으른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면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 왔던 것이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다. 지금까지는 사회생활의 방편으로 필요에 의해 억지로 했다면, 갑진년 새해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제대로 실행해 보련다. 기타 배우기, 붓글씨 쓰기, 수필 쓰기 등…. 그중에서 중도에 포기한 것도 있지만 최근 새로운 시작과 도전을 해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몇 년 후 나의 추억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낸 한 권의 수필집, 서예와 수묵화를 실은 도록집을 내는 것이다.

이제는 지난날의 어둠을 밀어내고 새벽의 일출을 두 팔 벌려 맞아야겠다. 한때의 아픈 기억은 성장의 디딤돌로 나를 키운 자양분이라 생각한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지금,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그 시간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련다.

홍순길

-성균관대학교 졸업

-전)LG 화학근무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강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충북대 수필문학상 수상

-공저: '노을빛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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