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봄의 향연 - 노을빛 아리랑

2023.04.06 17:46:42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10월 어느 날 정북동 토성에서 노을빛 아리랑이라는 공연이 열렸다.

소나무 몇 그루가 서있는 토성 언덕을 무대 삼아 휘황찬란한 조명은 배제하고 석양의 실경에서 펼쳐지는 실루엣 뮤지컬이다. 서산을 넘어가는 태양이 눈높이에서 마주치니 역광이 되어 사물이 검게 실루엣으로 보여 진다. 그러면 배우들의 몸동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윤곽으로 보여 분명하고도 세밀하게 내 안으로 다가온다.

공연의 내용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 그리고 그 속에서 피여 나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전쟁으로 구성됐다. 결혼을 하자마자 국토를 침략하는 적군을 맞아 장렬히 산화하는 영원한 이별을 다룬 숭고한 이야기를 절절히 표현한다. 가상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나의 아버지와 선조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잔잔히 보여준다. 안타깝고 애절하고 가슴을 후벼 파듯 아프다.

해가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길게 아쉬움의 그림자를 늘이고 노을이 붉음을 토해낸다. 하늘과 토성은 물론 주위의 벌판과 하천, 배우와 관객 모두가 황금빛으로 물이 든다. 아침빛이 희망이라면 노을빛은 그리움이 바탕이 된 감성의 빛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따스한 어머니의 품속 같다. 어느 조명이 이처럼 부드럽고 웅장하고 멋질 수 있을까. 어느 누가 배우뿐 아니라 관객과 주위 모두를 아름다운 조명으로 비추면서 황홀한 공연을 만들 수 있으랴.

언젠가 토성의 공연처럼 자연환경에서 펼쳐진 멋진 가무극을 본적이 있다. 중국 리장에서 인상여강(印象麗江)이라는 공연이었는데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작품이라고 했다. 5천500여 미터의 높은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거대한 노천 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관람석에서 바라보니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파란하늘과 산 정상에 만년설의 하얀 눈, 암갈색 산허리와 진초록의 벌판 그리고 좁다랗고 먼 길을 재현한 붉은 무대가 조화를 이룬다. 배우는 500여명으로 현지 주민이며 그들의 전통의식과 차마고도에 대한 애환과 삶을 보여준다. 직업배우들이 아닌데도 연기가 일품이다. 공연 줄거리는 남자들이 운송과 장사를 하는 마방을 조직하여 차마고도를 왕래하며 차를 팔고 말을 사왔던 모습들이다. 그 과정에서 가파르고 험준한 산길과 시시각각 변하는 고산지대의 매서운 날씨와 위험하고도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가슴 찡한 이야기다.

윈난성의 인상여강이나 정북동토성의 노을빛 아리랑은 줄거리가 삶의 대서사시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척박하고 가혹한 환경을 이겨내며 내 가정과 이웃을 위하여 삶을 내던지는 휴먼 드라마다. 어떤 지역,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며 누구라도 이해되고 공감하는 우리들의 인생살이 이야기가 아니던가. 무대를 통해 바라본 그들의 삶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숭고하다. 자연의 경이로움 속에 살아가는 진솔한 인생사를 조명을 멀리하고 실경에서 예술로 바라보니 그 의미가 마음에 진하게 파고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삶을 원한다. 하지만 특별한 삶과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던 위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또 하나하나를 보면 같지는 않은 삶을 이어간다. 인생이 꼭 특별하거나 남보다 돋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다른 것 없이 살더라도 나름의 철학으로 내 삶을 사랑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인생이라면 어떻게 바라볼까. 수없이 봐왔던 토성의 노을빛을 오늘도 바라보면서 문득 내 인생의 노을빛 아리랑을 생각해 본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시나리오에 따라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게 연극이라면 조명이 없고 시나리오가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어쩌면 연극이지 아닐까. 그러면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써서 보여줘야 할까. 오늘도 어제 같은 노을이 삶의 여정처럼 붉게 물들며 아리랑 고개를 쉬엄쉬엄 넘어가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 아리랑 고개를.

김학명

푸른솔문학등단. 푸른솔문인협회회원
운초문학상
공저:<은빛여울> 외 다수
충북도도의회 의사담당관. 충북도자치연수원 교수
청남대관리소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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