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에는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까. 비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마음마저 눅눅해진다. 상념이 많아지고 그리움이 깊어진다. 하지만 영원히 내리는 비는 없다. 비는 그치고 또다시 모든 것은 변하고 흐른다. 마음을 가득 채운 소란한 빗소리를 잠재우고 본래 존재하지 않음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지금 어느 길에 있을까.
높지만 위압적이지 않아 골짜기마다 정겨운 마을을 품은 산. 그 산기슭 끝자락에는 소나무군락을 병풍 삼아 아담하게 자리잡은 천년고찰 안심사가 있다. 어느 곳에도 인위적인 멋을 내지 않은 대웅전. 나무를 베어 기둥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있던 자리에 누각이 올라앉은 것처럼 보인다. 지붕을 이고 있는 나무들도 길이가 제각각이다. 꾸미지 않아서 담대해 보이고 꾸미지 않아서 그대로인 소박한 갈색이 구룡산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더욱 장엄하고 화려하다. 자연을 잠시 빌리면서 미안해했을 그 옛날 목공의 선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대웅전 문이 빼꼼이 열려 있다. 문고리 하나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이 문틈 사이로 드나든 것이 어찌 바람과 햇볕뿐이었으랴. 법음(法音)을 듣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마음의 빗장을 열기도 하고 마음의 고삐를 다잡기도 했을 것이다. 아직도 깨달음에서 멀기만 한 중생들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 기도하는 고개를 들어 부처님을 올려다보니 그 위로 천년세월을 버틴 천정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 속에 단청의 빛깔은 퇴색되고 낡았어도 보이는 그 너머를 상상하면 그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이리라.
방 한가운데 놓인 찻잔 앞에서 두 도반(道伴)이 차를 우리고 있다. 다선일여(茶禪一如), 차를 마시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지눌스님도 "불법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다. 차가 갖은 그 무엇이 깨달음과 통한다는 것인가. 수행이란 본래 마음을 바로 보려는 노력인데 차의 은은한 향기에 마음도 맑아진다는 뜻은 아닌지. 물의 인연과 차의 인연이 만나 차 맛을 내듯 스님들의 저 찻잔 속에는 깨달음을 갈망하는 기도의 마음과 정진의 마음이 함께 들어있으리라.
자연 그대로인 주춧돌 위에 고즈넉하게 올라앉은 영산전. 십육나한을 모시고 있다. 나한(羅漢)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제자들이다. 그 옛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전쟁이 나면 백성들의 안녕을 빌었던 곳. 경지에 이른 사람들에게 으레 있을법한 엄숙함이나 진지한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딘가 엉뚱해 보이고, 천진한 아이 같기도 하고, 심술구져 보이기도 하다. 내 마음을 닮은 얼굴이자 내가 닮고 싶은 얼굴들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도 벅찬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의 일상에 지친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 고독한 수행자에게 나한이 묻는다. 힘드냐고. 머지않아 지나갈 거라고. 주저앉고 싶으냐고. 천천히 돌아가면 다른 길도 있을 거라고.
텅 빈 절 마당. 암자가 구름에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되어 내린다. 빗소리는 두런두런 적막한 암자에 세상 이야기를 털어놓고 처마 끝 풍경은 제소리를 멈추고 조용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깨달음의 길은 어디인가. 극락으로 가는 길은 어디인가. 오고 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근원의 세계에 정도의 길이 따로 있으랴. 바람에 구름 가듯 흘러간 세월 앞에는 답이 없지만, 그 무상(無相)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생명들이 어울려 도량을 이루는 곳. 향기로운 다선일여가 꽃을 피우는 곳. 십육나한의 나지막한 웅성거림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게 되는 곳. 오늘만큼은 속세의 번뇌 내려놓고 눈 밝은 스님들과 이곳 안심사에서 마음껏 법담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