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여름 향기 - 금비(金雨)

2024.08.26 16:54:46

반가운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발코니 창문 틈으로 내리는 비를 한참을 바라보다 아내를 깨우러 방에 들어서니, 오랜 가뭄에 텃밭에 물을 주며 애를 태운 탓인가 단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다.

몇 해 전부터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비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빗소리는 참으로 듣기도 좋다. 고춧잎과 옥수수잎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오케스트라다. 오랜 기다림의 끝에 맞이하는 반가움의 울림으로 들려오고, 속삭임으로 다가온다. 가뭄 속에서 피어난 참깨의 연분홍 꽃에 맺힌 물방울은 순진함에서 배어 나오는 고고함이 신비스럽고 나의 마음에 평온과 위안을 준다.

타들어 가던 논과 밭을 애타게 보듬던 농부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단비를 아내와 나는 '금비'라 부른다. 시들어 가는 채소나 나뭇잎은 지하수나 수돗물을 주어도 줄 때 뿐인데 가뭄 끝 단비는 보약과 같아서 금세 활기를 찾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그러기에 농부에겐 한없이 고맙고 값진 것이다. 비가 오면 아내와 나는 빗물을 받느라 또 한 번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내는 가뭄이 계속되는 날이면 어릴적 텃밭에 물을 주던 생각이 난다고 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 됐지만, 동네에 마르지 않는 공동 우물이 있어 물을 길어다 상추며 고추며 오이, 참외에 주고 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던 것을 보며 신기하고, 즐거워 했던 추억이 떠오른단다. 부모님 생각이 불현듯 나는지 눈시울을 붉힌다. 나 역시 가뭄이 계속되면, 고향 집에서 저수지까지 38배미의 논이 있는데 맨 아래의 논에 물을 채우느라 새벽 5시에 일어나 형과 함께 두레박으로 저수지 물을 퍼 올리고 등교했던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어린 마음에 하기 싫어 엄살 부리다 아버지께 혼이 났던 추억과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빌었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떠오르는 햇살에 비치는 저수지 물의 윤슬이 유난히 아름답던 금바위 쪽부리는 비가 내리면 운무에 휩싸여 한 폭의 수묵화가 되고, 비옷도 없이 농립(農笠) 하나 쓰시고 논의 물고를 살피시느라 분주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밭에서 들깨 모를 심느라 온몸에 비를 흠뻑 맞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 나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비는 생명수이며 만물의 근원이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꼭 필요로 하고 없어서는 결코 안 되는 물에서 우리는 삶의 이치를 배운다. 물은 대지를 촉촉이 적셔 세상에 존재하는 채소는 물론 나무들까지 살찌워 인간은 물론 세상 만물을 풍요롭게 한다. 물이 얼거나 수증기가 구름이 되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상의 방법은 물처럼 사는 것으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물은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유익하게 해 주면서 그 자신은 어떤 상대와도 자기 이익을 위한 다툼이 없고 더러운 것조차 치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준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상처를 주고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는지, 금비를 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져본다. 우리 삶의 여정도 몸을 낮추어 겸손하며 이웃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며 이로움을 주는 삶을 사노라면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고 향기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가세현

-푸른솔문학 신인상

-카페문학상 수상. 자랑스런 문인상

-저서: '어머니의 섬'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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