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멈칫하더니 사락사락 보슬비가 온다. 그틈새로 어디선가 여치 풀무치 방아깨비의 가냘픈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기나긴 장마를 원망하듯 빗속에서 우는 풀벌레의 절규가 더욱 요란스럽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면 그나마 빗소리에 묻혀 가느다란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간다.
나는 비오는날 촉촉히 젖은 땅에서 풍기는 흙냄새를 좋아한다. 게다가 비의 향기는 메마른 마음을 순하게 녹여 주기도하고 누군가 말벗을 삼아 차분히 담소를 나누고 싶기도하다. 마침 문우한테서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인가 보다.
잘박잘박 내리는 빗속을 달려간다. 대청호 가는 길목에 비에 젖은 망초들이 하얀 웃음을 건넨다. 문득 어릴 적 비오는 날의 날궂이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하고 우산도 없이 동네를 쏴다니던 추억이 빙긋 웃는다.
찻집에 들러 차를 나누고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 묵은 수필집 있나 보러갈까?" 뜻밖의 친구말에 향교로 향했다. 왠일일까.
대문이 열려있고 어머니의 텃밭이 거기에도 있었다. 서리를 하듯 친구랑 토마를 따고 상추를 따고 당귀를 뜯고보니 영낙없는 날궂이 모습이다.
다시 명륜당 대청마루에 앉아 비오는 날의 고적한 향교 풍경을 마음의 렌즈에 담는다. 고즈넉하니 고향집에 와 있는듯 푸근했다.
야트막한 돌담너머로 멀리 호반의 풍광들이 아담하고 우아해보인다. 기와를 타고 내려와 처마끝에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소리는 그옛날 유생들의 글읽는 음율이 아닐까, 기품있고 고매한 선비들의 향취에젖어 잠시 풍류아닌 풍류를 즐겨본다. 이윽고 문우의 낭낭한 목소리가 명륜당 안채에 퍼져간다.
문우가 읊는 함박꽃은 애닯은 연가처럼 마음을 울렸다.
유서깊은 향교에서 예전에 누려보지 못한 낭만? 그리고 삶의 넉넉함이라니, 우리것, 우리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이라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스러져가는 옛것들에 대한 역사와 전통의 의미를 세워갈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젠가 신문의 사설 중에 '문명은 문명으로 망하고 문화는 문화로 망한다', '미국문화가 너무나 빠르게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걱정어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후로 나는 우리 민족의 뿌리와 후손들의 미래가 걱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초같은 삶을 살아온 나에게 문화유산의 치적들을 알길은 난해하나 비내리는 명륜당에서의 사색은 나의 향방을 돌아 보게하는 시간이 되었다.
비오는 날이면 으레 담벼락에 늘어진 애호박을 따다가 빈대떡을 부쳐주시던 우리네 어머니, 우리는 기억의 저편에 풍기던 고소한 냄새를 간직한채 그리움의 발길을 옮겼다.
초록 여름이 여물어간다.
이 비가 그치고나면 손주들의 손을 이끌고 향교 뜨락에 서서 한 구절 동시라도 들려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