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궤적을 그리며 자동차가 어둠에 덮힌 은행나무길로 들어간다. 아직 먼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불빛이 안개와 어울려 조명등을 켜 놓은 것처럼 환상의 분위기를 만든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가니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듯 물안개가 피어나는 모습이 몽환적이다. 안개가 산자락을 감싸고 저수지를 내려와 수면을 덮고 은행나무길을 천천히 덮는다.
희미한 하늘엔 아침 해가 고개를 들어 안개를 비추며 주위를 하나둘 돌아본다. 은은한 아침빛이 저수지에 펴지면 모든 사물들은 온통 나를 봐달라는 소리없는 아우성에 시선을 둘 곳을 몰라 헤멘다.
우선 눈길이 가는 건 길 옆으로 길게 늘어선 노란 은행잎이다.
시선을 압도하는 노란 잎들이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가 되면 이른 봄 연초록의 새싹에서 초록으로 또 검푸른 초록으로 변한 나뭇잎이 황금의 꽃으로 호칭이 바뀌는 시점이다.
안개가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하며 은행잎을 가렸다 보였다를 반복한다. 보일 듯 말듯한 그 모습이 진한 빛을 발하며 더욱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은행나무 길을 걷는다.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와 물 위의 낚시좌대 노란 은행잎이 물속으로 내려와 안개와 조화를 이룬다. 이건 풍경이 아니라 화가가 그린 완전한 그림이다. 수채화 속에 내가 있다. 나 뿐만이 아니다. 은행길을 걷는 사람도 물 가운데 좌대에서 낚시를 하는 낚시꾼도 그림의 한 부분이다. 낚싯대를 드려놓고 물 속을 바라보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은행나무가 고운 빛으로 내려와 보이니 고기도 낚고 계절도 낚으며 풍경 또한 낚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아래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정렬한 듯 줄지어 노랗게 매달린 은행잎들이 정겹고 사랑스럽다.
물위에 떠있는 주황색 낚시좌대와 너무 잘 어울려 멋스러움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서 바라보고 있다.
바람이 분다.
내 얼굴을 스친 바람이 나무 꼭대기를 흔들더니 강한 힘으로 가지를 흔들어 나뭇잎이 하늘로 날아 오른다. 아니 꽃잎이 노랑나비가 되어 하늘을 난다.
아마도 푸른잎으로 살아갈 때는 많은 걱정을 하고 매달려 있었는지 모른다. 내 나무를 키워내야 하는 잎들이 병이 걸리거나 벌레가 먹어 나무가 잘 크지는 않을까. 열매가 잘 영글지는 않을까. 다른 잎들도 잘 자랄까 하는 수 많은 걱정을 하면서 지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시간 속에 황금색으로 익어져 있는 제 모습을 돌아보며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른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걸 내려 놓으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 마음껏 하늘을 날아 오른다.
한참을 나른 황금나비는 물위에도, 길위에도, 길옆 통나무 의자에도 사뿐히 내려앉는다. 물위에 은행잎은 돛단배처럼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궤적을 그리며 세상을 주유하고 길 위에 은행잎은 영변의 약산 진달래처럼 살며시 즈려밟고 가라한다. 통나무 의자 위의 은행잎은 조각같은 예술작품이다. 은행나무가 만든 작품인지 바람의 작품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소녀의 감성을 자극한다.
나무에도 물 위에도 길에도 물 속에도 온통 노란빛이다.
그 많은 은행잎이 아니 황금나비들이 하나하나 숨은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려 하는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걸으려 해도 은행잎이 내게 사색의 시간을 자꾸만 밀어 넣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네 인생의 계절은 어딘지, 무얼 덜어 내려고 하는지 묻는 듯하다.
은행나무 길을 걸으며
이 은행나무 속의 가을을
이 은행나무 속의 가을의 빛을
이 은행나무 속의 가을의 색깔을 그대 손에 꼭 쥐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