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목도리

2023.12.14 17:42:22

오늘은 산악회에서 한탄강의 주상절리를 감상하기 위해 순담계곡의 잔도 길을 걷는 날이다. 한껏 기대를 품고 새벽 일찍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짙은 녹색의 목도리를 목에 둘러주며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한다. 이른 새벽의 찬 공기를 막아주며 따스함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자세히 보니 큰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 손수 떠서 생일선물로 준 것이다.

한탄강에 도착하니 최전방에 강바람이 더하여 모두 몸을 움츠리며 춥다고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추운 줄을 모르겠다. 무척이나 다행이다 싶다.

어릴 적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저녁, 시장에 가신 어머니 마중을 나갔던 생각이 난다. 허름한 옷에 맨손으로 광주리를 이고 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커서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께 두툼한 털목도리와 따스한 장갑을 꼭 사드려야지 하고 마음만 먹고는 실천하지 못했다.

중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와 나는 솔방울을 따서 시장에 팔았었다. 등록금은 1천110원이었는데, 솔방울 한 가마니에 80원에서 100원을 그날그날 시세에 팔았다. 등록금과 교복 등 학비를 마련하고서는 더는 솔방울 따는 것을 하지 않았다. 일하는 김에 몇 가마니 더 해서 고생하신 어머니께 목도리와 장갑을 사드려야 했는데 철이 없어 그 생각을 미처 못한 아쉬움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후가 되니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지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농사일이 끝나고 겨울이 되면 산에서 땔감을 해 시장에 내다 파시곤 하셨다. 한시도 쉬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엄동에도 허름한 작업복에 추위를 잊으신 채 산을 오르내리셨다. 사랑방에 항상 군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 주셨다. 밤이 늦도록 우리 사형제가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시곤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으레 추위도 피곤함도 외로움도 모르는 줄만 알았다.

모처럼 춥지 않은 즐거운 산행을 하고 왔노라고. 아내에게 말을 하니 그러지 않아도 이번 생일선물로 번갈아 두를 목도리를 하나 떴다고 한다. 하얀 털실에 밤색 무늬가 살짝 들어있어 보기에도 좋다. 가늘면서 길게 그리고 세련되고 멋지게 짠 목도리를 나의 목에 감싸준다. 어린아이처럼 좋으면서도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 올을 짜면서 우리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또 한 올을 짜면서 뜻하는 모든 일이 소원성취 하기를, 또 한 올 짜면서 무병장수하기를, 기도하며 온 정성을 들였으리라.

눈이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부모님 생전에 목도리를 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럽다. 자식들을 위해 추위를 견디시며 시장을 다니시느라 고생하시던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목도리를 사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하니 후회와 죄책감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동안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아버지 어머니께 목도리를 해드리지 못한 자식의 죄송함에 딸이 선물한 목도리를, 부모님 생각에 평생을 목에 두르지 않았다. 어머님 나이에 이르러서야 딸이 해준 목도리, 아내가 생일선물로 떠준 목도리를 두르게 됐다.

요즈음 외출할 때면 언제고 흰색과 녹색 목도리를 번갈아 두른다. 나이를 먹으니 말없이 고생하며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헌신하고, 남편이 하고자 하는 일이면 묵묵히 내조를 잘해준 아내가 한없이 고마웠음을 느낀다. 그리고 외손자들을 만나면 네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외할아버지한테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목도리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함박눈이 내려 아름다운 순백의 세상이 되면 부모님께 사드리지 못한 목도리와 장갑을 외손자들에게 사주고 눈사람을 만들며, 부모님에 대한 사랑 이야기와 내 어릴 적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가세현

-푸른솔문학 신인상

-카페문학상 수상. 자랑스런 문인상

-푸른솔 문학회 회원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초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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