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유월의 아침은 상쾌하다. 싱그러운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젖어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국방부에서 국가유공자를 찾아 전해주지 못한 훈장을 찾아 드리는 중이란다. 순간, 아버지가 떠올라 울컥하며 전율이 일어났다.
훈장 상자를 받아 바로 열지 못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며 한참을 안고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투구모양을 중심으로 빛이 뻗어나가는 형상에 눈이 부셨다. 반짝이는 훈장 속에 목숨을 걸고 싸우신 젊은 날의 아버지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경건한 마음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훈장을 한동안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순간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진한 감동으로 아버지가 그리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지만, 유월이 오면 TV로 방영되는 6·25 전쟁의 처참했던 화면을 보며 간혹 울먹해지곤 한다. 영상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나는 그 전쟁 속에 있던 젊은 날의 아버지를 만난다. 가슴 졸이며 내가 전쟁에 참여 하고 있는 것처럼 초조하고 두려움에 두 손에 땀을 쥐게 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급박한 전쟁으로 국군이 후퇴하게 되면서 입대하셨단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겨우 총 쏘는 법만 배워 포화 속으로 투입된 젊은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를 어릴 때는 신기하게 듣곤 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신혼의 아내를 남겨두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헤매었을 아버지의 심정을 상상하게 된다.
살을 에는 듯 눈보라가 몰아치던 함경도 이름 모를 산 능선에서, 꽹과리를 치며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을 향해 기관총을 사격하고 있었단다. 아무리 쏘아대도 중공군은 떼로 몰려들어 아버지 기관총 다리를 붙잡을 정도로 접근해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단다. 그때 붙들렸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었다고, 잠시 호흡을 고르고 회상하시곤 하셨다.
낮과 밤으로 험악한 고지를 두고 아군과 적군의 진지로 수시로 바뀌어 싸우다 전우가 포탄에 직접 맞아, 신체의 일부만 남고 몽땅 사라진 처참한 모습은 가끔 꿈속에까지 나타나 힘들게 한다고 하셨다. 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의 공포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며 말끝을 흐리셨다. 아버지도 허벅지에 포탄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후송됐다고 하셨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보다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안도감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어머니는 늘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신혼의 어머니는 소식도 없는 아버지를 눈물로 기다리셨단다.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이었다. 다리가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병원에서 보았다라든가, 국군이 전멸해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흉한 소문에 가슴 졸이며 밤을 새우셨기에, 아침에는 가슴이 아파 울 수도 없었다고 하셨다.
비극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북한에 고향을 두고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사는 이산가족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월이면 더욱 가로막힌 삼팔선이 원망스럽고, 민족의 슬픔으로 평화를 애타게 기다리며 살아가는 마음들의 안타까움에 서글퍼지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오직 조국을 지키기 위해 수없는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은 젊은이들. 그리고 내 아버지. 70여 년 만에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훈장을 받으니, 잊지 않고 보답을 보내온 국가에 믿음과 고마움에 감사함이다.
6·25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민족정신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닌가. 그때 우리 국력이 강했더라면 이렇게 남북으로 갈려 동족 간의 전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간 아픔의 역사를 거울삼아 앞으로 이런 비극을 격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 국가관을 더욱 키워야 하겠다.
6월이 오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 훈장이 아버지 생존에 돌아왔더라면, 훈장을 가슴에 부여안고 우셨을 것만 같다.
아버지는 이미 먼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이 감격스런 순간 나도 모르게 아버지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후회가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