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뚱딴지꽃

2020.12.17 17:34:13

[충북일보] 쑥부쟁이꽃 뚱딴지꽃 오이풀꽃 국화꽃, 다섯 살배기 외손녀가 유치원에서 가을에 피는 꽃을 배웠다며 열거를 하더니 할미도 가을꽃을 아느냐고 묻는다. 글쎄! 뚱딴지 꽃은 뭘까·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내가 알고 있는 돼지감자 꽃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모양이 겹삼잎국화 같다. 꽃잎 색깔이 해바라기꽃과 유사해 보이지만 꽃송이가 크지 않고 예쁘장한 것이 이름과는 상반돼 보이기도 한다.

손주들에게 꽃도 보여주고 이름도 가르쳐 주기 위해 들녘으로 나섰다. 단풍 물결 사이로 계절은 어느새 마른 풀꽃 향기가 스며드는 듯하다. 아이들 손을 잡고 동심을 그리며 풍요로 물든 가을 길을 걷자니 저만치 낮은 언덕에 노랗게 무리 지어 피어있는 뚱딴지 꽃이 보인다. 그리고 하늘거리며 청초하게 핀 보랏빛 쑥부쟁이 꽃이 눈에 들어왔다. 뚱딴지, 쑥부쟁이, 촌스럽기도 하고 세련미 없는 이름이지만 민초들의 애환을 닮은 것 같아 친근하고 더욱 정감이 간다.

가을날 언젠가 논두렁을 거닐며 나에게 처음으로 돼지감자 꽃이란 이름을 가르쳐 주던 남편의 뒷모습이 불현듯 생각이 나고, 고단한 삶의 자락에 구절초를 꺾어다 한갓 한갓 엮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꽃 속에 배어있는 듯하다. 시린 그리움이 들꽃에 머물다 사라진다.

외국에 사는 작은딸이 외손자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영어보다 모국어를 먼저 배우는 게 옳다며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매일 쓰는 말의 가치와 소중함을 잊고 살건만 캐나다에서 이민 생활을 하던 딸은 2세에게 반드시 한국인의 정체성과 말과 글의 본질을 제대로 가르쳐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 말과 글 사이에 동사 형용사 의성어 의태어까지 영어로 대변할 수 없는 말과 글을 사용하는 딸의 말씨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배우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고급언어를 써야 아이가 커서 작문도 잘하고 훌륭한 문장가가 된다며 고상한 말씨로 표준말을 쓰는 게 좋다고 한다. 딸들의 당부에 가능한 한 표준말을 골라 쓰지만 어쩌다 몸에 밴 나의 충청도 사투리는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투리가 우리의 따듯한 고유언어라고 역설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사라져가는 유산 같아 아쉽다. 누군가 사투리를 "산과 들 그리고 강이 키운 말의 표정이며 눈짓이고 고갯짓"이라 하지 않던가? 때로 끝의 모음을 길게 빼다 보면 소통의 몸짓이 되는 우리네 충청도 사투리가 나는 좋다.

간간이 부는 가을바람에 벼 이삭들이 서걱서걱 흔들거린다. 어디쯤일까, 휘이훠이 새떼를 쫓으시던 어머니의 초상이 어딘가에 보일 것만 같다. 문득 들판에 대고 "엄마! 나 왔어유, 동지간 모두 잘 있어유, 누야가 엄마 젖을 다 먹어서 지는 약골 이라구 엄살 부리던 동상도 어느새 환갑이 지났어유, 세월은 왜 이리 빨른 겨"라고 외쳐 본다. "고상혀 그런겨, 숭악햐" 어머니가 쓰시던 사투리로 말 잇기를 하자니 구수하고 익살스럽고 흙내같이 소박한 게 좋다. 아마도 이전 세대에 어깨너머로 터득한 한글 발음이 사투리가 된 건 아닐까? 아무런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던 어머니의 고갯짓이 새삼 그리워진다.

달빛이 내려와 입을 맞추어 코스모스 색깔이 분홍빛이라고 노래하며 걷던 손주 셋이서 논배미 한가운데 서 있는 하얀 허수아비를 발견한 모양이다. 저마다 반갑다고 소리치며 환호하더니 "할미, 허수아비는 바람이 친구가 되고 구름이랑 뚱딴지 꽃이 친구가 되어 지켜주는 거지요…." 동심의 언어들이 넓은 들의 하늘가로 흘러간다.

오늘따라 뚱딴지같은 사투리가 그리워진다.

박영희

효동문학상 작품공모 대상

푸른솔문학 신인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에덴약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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