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수확이 끝난 비탈밭 산길을 오른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오르는 산길에 하얀 적삼 고름 바람에 여미며 달큰한 젖내에 젖어 있는 꽃, '어서 오너라', 찔레꽃이 산 마중을 나왔다. 길섶에 비켜서서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부시다. 어머니를 뵌 듯 웃음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종다래끼에 보리 이삭을 주워 담으며 해찰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다독이듯 채근하듯 말씀하셨다. "이삭을 많이 주워야 참외를 많이 살 수 있는데…." 그럴 때면 시무룩한 느림보 대신 산등성이 너머 뻐꾸기가 뻐꾹 뻐꾹 울었고, 가랑잎을 스쳐 온 산들바람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 주었다.
밭고랑을 벗어나면 숲 가 어디쯤 산딸기가 익었을 것 같고, 또 어디쯤에는 붉은 보석처럼 산 앵두가 익어 나뭇잎 속에 숨어 있을 텐데… 자꾸만 눈길은 밭고랑을 지나 찔레꽃 핀 밭둑을 넘어갔다. 눈치를 채신 어머니는 "그래, 좀 쉬었다가 하거라…. 뱀 조심하고…."
찔레꽃 필 무렵이면 무논에 모내기도 시작되었다. 무논에 철퍽철퍽 흙물 튀기는 써레질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사선으로 달아났다. 농부들의 거친 손끝에서 한 배미 한 배미마다 연초록 색감이 더하여질 때 어머니는 똬리 위에 광주리를 이고 잰걸음으로 걸었고 나는 앞장서 가며 길가에 핀 풀꽃을 보거나 막걸리 주전자 뚜껑을 열어 쿰쿰한 냄새를 맡아 보곤 하였다.
모내기 철은 농부들에게 가장 바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배추흰나비같이 희고 흰 작은 나비 떼가 모여 앉아 있는 듯이 찔레꽃이 핀다. 어머니가 산나물을 뜯으러 가는 길 물가에도 피고, 약초를 찾아나선 아버지가 오르는 뒷산 언덕배기에도 찔레꽃이 피었다.
풋풋한 찔레 새순을 사근사근 씹으면 봄바람과 봄볕의 맛이 났다. 그런 찔레 순을 꺾으려면 적잖은 조심성과 주의가 필요했다. 조금만 눈길을 달리하거나 쉬이 보면 영락없이 긁히거나 찔리고 만다. 그럴 때면 가시 찔린 손가락을 바라보며 호아호아 더운 입김을 불어주거나 무명천을 찢어 싸매어 주던 어머니가 나타나실 것만 같았다.
찔레꽃은 은은한 향기가 자극적이지 않아 좋고 꽃잎 색이 수수하여 야단스럽지 않아 좋다. 아침에 보아도 좋고 저녁에 보아도 친근하다. 이웃집 누님처럼 소리 없이 미소 지어 좋고, 인심스러운 마을 아주머니들의 웃음 같아 좋고, 어머니의 향취가 나는 듯하여 좋다.
찔레는 가시가 자꾸만 찔러 '찔레'라는 이름이 생겼다는데, 원나라 시기 몽고에 공녀로 간 찔레가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와 동생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어, 또 한 번 아리게 마음을 찌른다. 찔레가 고향에 돌아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움의 눈물을 떨구며 가족들을 찾아 헤맨 자리마다 하얗게 꽃이 피어나니 사람들이 일러 '찔레꽃'이라고 하였단다.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꽃, 찔레꽃의 꽃말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해마다 오월이면, 장미꽃이 화단과 울담에서 짙은 향기로 손짓을 하면, 아, 나는 찔레꽃을 연상한다. 유년의 고향 산천에, 어머니 잠들어 계신 좌구산 기슭,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양지 녘 산길에 피어 있을 찔레꽃을 떠올리게 되고 보고 싶은 마음이 연등처럼 줄을 잇는다.
마음이 달아 산길에 접어들면 '어서 오너라', 마중하는 꽃, 올해도 변함없이 반겨줄 것이다. 어머니께는 예전처럼 눈이나 한번 마주 보고 웃으면 그뿐, 약주 한잔 사과 하나 앞에 놓고 절이나 하고 나면 그만이다. 한마디 정다운 말은 끝내 속으로 하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다 벙어리가 되고, 냉가슴 알 길 없는 무정한 산바람이 무심하기만 하다. 산길 되짚어 내려오는 길에, 따라나서 배웅하시는 흰 웃음이 희미한 그 길에, 그날은 따끔 따끔 빨갛게 피가 나고 싶은 꽃, 피가 나서 그리움의 알갱이 같은 빨간 열매가 맺혀도 좋은 꽃, 찔레꽃이 회한의 눈물이어도 꿈결처럼 피어나길 기다리는 오월, 사뭇 어머니가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