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고무신

2024.11.13 17:06:24

한 어린이가 검정 고무신을 신고 유치원엘 왔다. 알록달록 꽃무늬로 수를 놓은 데다가 작고 앙증맞은 것이 어쩜 그렇게 귀엽고 깜찍한지, 꽃 하나만 수를 놓아도 요렇게 예쁜데 왜 옛날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먹고살기 힘든 시대라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어서였을까. 예전에 어느 절 앞마당에 어른의 검정 고무신과 아이의 검정 고무신을 나란히 놓고 그 안에 예쁜 채송화를 심어 놓은 것을 봤다. 절이 더 정감 있고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단순히 실용성에만 무게를 두는 신발이 아니다. 예쁘게 신고 때로는 장식용으로도 쓴다. 꽃과 어우러진 검정 고무신에 어릴 적 내 아렸던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 나는 친구들의 신발에서 신세계를 봤다. 알록달록 꽃무늬가 있는 꽃고무신,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운동화, 색 색깔의 구두 등.

강원도 산골에서 검정 고무신만 보고 자라온 나로선 운동화나 구두는 고사하고 옆집 친구가 신는 꽃고무신이라도 한번 신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 내 맘을 뒤로 한 채 부모님은 바로 아래 네 살 터울의 여동생에게만 꽃고무신을 사다가 신기셨다. 눈망울이 큰 여동생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아장거리며 다닐 때라 내가 보아도 이뻤다. 그러니 부모님의 눈엔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학교에 가면 항상 친구들의 신발에만 눈길이 갔다. 그것은 내 자존심을 세우는 유일한 도구인 것만 같아 툭하면 "엄마, 나도 꽃고무신" 타령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야야, 깜장 고무신이 다 떨어져야 사주지" 하셨다. 꼴도 보기 싫은 까만 고무신은 왜 그리 질기던지, 지금 같으면 몰래 가서 찢어놓기라도 할 텐데, 그땐 그런 머리도 굴릴 줄 몰랐다.

긴 겨울이 지나고 자신감이 바닥에 질질 끌려다닐 때쯤, 엄마는 봄기운에 파릇파릇한 채소로 내 꽃고무신을 장바구니에 담아오셨다, 무슨 보물이라도 꺼내는 양, 엄마는 조심스레 하나하나 물건을 들어내시며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셨다. 딸이 얼마만큼 기뻐할지, 의무를 해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는지, 하여간 나는 동생의 앙증맞은 꽃고무신을 상상하며 어서 내 예쁜 꽃고무신이 '짜잔'하고 나타나길 기대했는데….

4년 터울이란 걸 깜빡했나 보다. 나의 꽃고무신은 그냥 꽃무늬만 덜렁 있는 길쭉하고 멋대가리 하나도 없는 고무신이었다. 엄마는 한참 크는 발이라며 어른 손가락으로도 두어 개는 들어가는 꽃고무신을 예쁘다고 꼬드기시며 내 발을 잡아끌어 넣으셨지만, 너무 커서 할딱거리는 꽃고무신이 괜히 원망스럽고 동생처럼 작지 않은 내 발이 미웠다. 그래도 새까만 고무신으로 다신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오래도록 신기를 바라는 엄마와 나의 기대와는 달리 꽃고무신은 친구들과 숨바꼭질이나 고무줄놀이 때마다 미끄러지고 벗겨지더니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내 마음과 함께 찢어져 내렸다.

6학년 운동회다. 운동회의 피날레는 무엇보다 손목에 1등 도장을 받는 것이다. 여태 한 번도 등수 안에 들어본 적이 없던 나는 '졸업생은 장애물 달리기를 한다'는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날씨에 맞게 도구와 신발을 갖추고 뛰는 것인데, 달려가다 '갬' 카드를 주우면 앞에 있는 엄마들의 고무신을 신고 부채를 부치며 뛰고, '비' 카드엔 우산을 쓰고 아빠들의 장화를 신고 달리는 것이다. 내 앞에 먼저 달려가던 친구는 엄마들의 고무신이 너무 커서 내게 쳐졌다. 난 엄마들의 고무신이 발에 맞은 덕분에 1등 도장을 찍고 단번에 의기양양해졌다. 도장이 지워질까, 몇 날 며칠을 땟자국이 꼬질꼬질하도록 조심스레 손목을 씻었던 기억이 난다.

어려선 큰 고무신을 탓하며 자신감의 상실로 힘들고, 조금 커서는 어느 아주머니의 맞는 고무신 덕에 자신감을 회복했다. 지금은 예쁜 신발을 보면, 발이 쑥쑥 클 때 '엄마가 맞는 신발을 사주셨더라면 발이 작고 예쁠 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이내 '그래도 없는 형편에 이만큼 키워낸 것이 어디야' 하고 생각을 바꾼다.

꽃고무신이나 검정 고무신이나 가격은 고만고만했겠지만, 딸의 마음보다 질기고 오래 신는 검정 고무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엄마, 이젠 다 이해하고 그런 엄마가 계셨기에 그래도 열 식구 모두 배곯지 않고 다섯 남매 잘 자랄 수 있었겠지? 이제는 검정 고무신만 선택해야 하는 삶에서 멋진 삶의 고무신 장식을 꿈꿔본다. 오늘도 예쁘게 수를 놓은 꽃무늬 검정 고무신처럼 멋지고 화려하게, 옹골지고 야무지게 살아야지.

전금희

-푸른솔문학 신인상

-공저: 삶의 여백. 가을을 걷다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유치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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