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호박범벅

2021.01.14 13:20:03

무심천 벚나무의 단풍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가고, 이미 바람에 날린 낙엽들은 대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모여있다. 시간의 아쉬움을 아는지, 그 곱던 단풍이 낙엽 되어 떨어지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바람뒤로 숨어버린 낙엽을 쓸면서 마음은 이미 겨울채비를 한다. 향기없는 마른 낙엽이지만, 그래도 정겹고 가을운치는 있다.

한편으로 허전하고 썰렁한 마음에 나는 어머니 앞에서 낙엽을 핑계로 "이제 금년도 다 갔다"라며 낙엽에게 부질없는 세월 탓을 한다.

어머니는 현관 앞 계단의 가을 햇살아래서 늙은 호박을 다듬는다. 아주 오랜만에 호박범벅을 해보신단다.

옛날 어린시절 집주변 담장에 호박을 심어 가을이 되면, 계절별미로 호박범벅을 자주 해 먹었다.

짙 노랗게 잘 익은 예쁜 호박은 일부러 조각을 한 듯 일정하게 패인 줄무늬가 또렷하게 돋보이는 것이, 아주 잘 빚은 도자기 같다.

옛날에는 호박 껍질을 숟가락으로 힘들게 긁었는데, 그래도 요즈음은 감자칼로 쉽게 벗긴다.

호박의 속살은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며, 그 불꽃속에 숨은 하얀 호박씨는 가을햇살에 살짝 빛난다. 도툼하게 살이 오른 호박씨는 손가락사이에서 나를 간질이듯, 미끌거리는 촉감이 아주 좋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호박의 붉은 속살로 호박국을 만들었다. 입안에서 녹는 듯 부드럽고 달짝지근하여, 어린 입맛에 밥보다도 호박국을 더 많이 먹었다.

그리고 호박씨는 양지바른 장독대 위에 동생들과 각자 자기 몫을 나누어 말렸다. 먹을 게 없었던 그 시절, 잘 말린 호박씨를 정성들여 까먹는 재미는 또 다른 즐거운 놀이이기도 했으며, 고소한 맛은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에서 오래 맴돈다.

오늘 호박범벅을 만드시는 어머니의 손놀림이 왠지 예전 같지가 않고 많이 굼뜨고 어설프다. 20여년 만에 해보신다니, 그도 그럴 만은 하다. 지켜보는 내가 안쓰럽고 조금은 안타깝지만, 미수(米壽)의 세월 맛은 호박범벅을 휘젓는 긴 주걱의 손 떨림으로 전달된다. 이제 보니 정말 어머님도 많이 늙으셨다.

그래선지 오늘 어머니의 호박범벅 맛은, 옛날의 그 맛에 뭔가가 조금은 넘쳐나는 듯하다. 어머니의 세월 손맛에 여전히 변함없는 자식사랑의 맛이 더해진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에는, 세월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한결같이 깊고 강하다. 그게 바로 우리 어머니가 살아가는 삶의 힘이다.

어머니는 혼잣말로 "그래 내가 언제 또 너희들에게 이 호박범벅을 해줄 수가 있겠느냐"며 주걱에 묻은 호박범벅까지도 손가락으로 알뜰하게 잡수신다. 옛날 젊은 시절의 어머니 바로 그 모습이다.

아마 어머니 자신도 세월속에 묻힌 당신의 손놀림과 솜씨가 예전 같지 않음을 이미 아시는 듯하다. 어머니의 호박범벅 솜씨는 옛날 할머니께서도 인정을 하셔서 할머니는 다섯 며느리중 유독 어머니께 가끔 호박범벅을 해달라고 하셨단다.

어머니는 오늘 호박범벅을 잡수시면서 많이 흘리신다. 기력이 쇠해져가고 마음도 약해지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내 숟가락의 호박범벅이 무겁다.

그래도 지금 같은 어머니의 건강이라면, 우리자식들에게는 큰 복이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오랜만에 어머니가 해준 호박범벅은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계절맛과 어머니의 사랑 맛이 어우러진 달고 맛있는 호박범벅 이였다.

이제 내년 가을에는 우리 4남매가 어머니께 호박범벅을 해드려야겠다. 옛날 우리가 어려서 먹었던 어머니의 그 맛을 살려, 어머니의 젊은 날의 추억을 어머니께 되찾아드려야겠다.

류근홍 프로필

·충북대학교 행정대학원. 법무대학원 수료

·청주대학교 대학원 졸업(법학박사)

·현. 청주교통(주) 대표이사. 충청북도교통연수원 이사

·효동문학상 수상. 푸른솔문학 수필 등단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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