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콩나물 아주머니가 여기는 웬일이세요?" 어머니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말이다.
여고 때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합숙을 하며 예절교육을 받았다. 토요일엔 어머니를 모셔다 다과상을 대접해 드리며 배운 것을 실습으로 보여드리는 날이었다.
그날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어머니가 하신 말이었다. 콩나물이나 팔고 시장에서 열무나 파는 아주머니가 어쩐 일이냐고 의아해서 물었을 게다.
재래시장하면 제일 먼저 수많은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셨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지금은 시장 거리만 남아있는 남주동 시장, 그곳에서 좌판도 없이 열무 몇 단을 길거리에 펼쳐놓고 파셨던 어머니.
집에서는 옹기 시루에 콩나물을 직접 길러서 파셨고, 새벽에는 밤새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오래전 어느 해 빚잔치를 하고 청주로 이사를 나온 후 일곱 식구의 생계를 꾸리신 것은 어머니였다. 열 명이 넘는 학생들 하숙을 치르면서도 밤을 새워 힘들게 두부를 만들고 콩나물을 길러 팔았다.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들어간 노랗고 통통한 콩나물과 야들야들한 두부는 아는 사람만 사서 먹는 안전하고 맛있는 먹을거리라 금방 팔려나갔다.
그것만으로는 하숙생을 위한 반찬값도 부족한 터라 봄부터 가을까지는 앞마당에서 열무를 길러 틈틈이 시장으로 들고 나가셨다.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만 했던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열무를 판다는 것은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학교에 가면서 필요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자식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냈고 창피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쉽게 빨리 팔고 돌아오려고 열무 단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크게 만들라치면 아버지는 손해 본다고 화를 내셨단다. 아버지는 열무를 팔기는커녕 시장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분이셨다.
할 수 없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게 열무 단을 만들어 이고 나가신 곳이 남주동 시장 채소전이었다. 얼른 팔고 돌아와야, 학생들과 가족을 위해 저녁을 할텐데 때론 늦게까지 팔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엔 늘 저녁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으로 해서 왔다. 어머니가 그때까지 시장 어귀에 열무 몇 단을 놓고 계실 것 같아서였다.
낮이 점점 길어지는 어느 봄날 흙 묻은 고무 다라를 머리에 이고 걸음을 재촉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왜소한 체구에 흰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하얀 교복에 갈래 머리를 땋은 나는 쫓아가서 어머니 머리 위에 얹힌 다라를 번쩍 들어 이고 책가방을 한 손에 들고 앞서 갔다. 어머니는 어서 내려놓으라고 뒤따라오며 만류하셨다.
추래한 옷과 울퉁불퉁한 손마디에 흙 묻은 어머니가 부끄럽지 않았다. 교복이 더러워진다고 내려놓으라고 핑계를 대며 쫓아오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아직도 맴돌아 가슴이 찡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착한 학생으로만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길에서 만나면 모른척하라고 당부를 하셨다. 행여 딸이 친구들에게 창피 당할까봐 어머니가 먼저 모른척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 옛날 남주동 시장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변함없이 그대로 있으나 옛날 시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 열무 단을 늘어놓고 부끄럽게 앉아계신 내 어머니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얼굴만 차례차례 파노라마 되어 허공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곤궁했던 삶은 보이지 않고 그저 하얀 추억일 뿐이었다.
"골라 골라 두 장에 만 원 두 장에 만 원" 귀에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드니 육거리시장이었다. 언제나 삶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시장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할머니들이 자리를 편 난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콩나물도 한 줌 사고 향이 진한 냉이도 샀다. 애써 캐온 냉이를 덤으로 더 주신단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선뜻 받아오질 못했다.
어머니가 시장에 계셨던 탓에 지금까지 시장에서 한 번도 깎아 달라고 조금만 더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다. 늘 주는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샀다. 고생하시던 내 어머니 생각에 서러워서다. 재래시장 거리에 앉아계시던 그때의 내 어머니가 눈물겹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