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추억 - 바위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15

2016.08.11 18:24:06

유치환은 인생의 허무와 비극, 인간의 실존 문제를 끈질기게 탐구한 생명파 시인이다. 생명파는 1930년대 중반 기교적 언어조탁에 치우친 시문학파와 문명비판 중심의 주지파에 반발하여 생겨난 문학 유파다. 유치환,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이 주요 멤버였다. 유치환 시 속의 자연은 자연 자체를 노래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청록파의 자연과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그의 시에서 삶의 의미는 사랑, 생명, 사회라는 삼각구도를 통해 순환되는데, 이 순환과정에서 시인이 주로 천착했던 테마들은 존재, 죽음, 실존, 비애, 신(神) 같은 형이상학적 차원의 것들이다.
'바위'는 삶의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농도 짙게 표출된 작품이다.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겠다고 시인은 다짐한다. 바위는 시인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 시에서 바위는 자연을 대리하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바위가 아니다. 또한 시간의 연대기를 간직한 지질학적 사물로서의 바위도 아니다. 바위는 인간의 강하고 끈질긴 생명을 표상하는 객관적 상관물, 삶을 향한 시인 자신의 초극의지가 투영된 형상물이다. 인간을 슬픔과 연민의 존재, 인생을 끝없는 감정적 파탄의 연속으로 보면서 시인은 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 초월욕망이 상징적으로 압축된 대상이 바로 바위다. 그러니까 바위는 시인의 형이상학적 지향 욕구, 감정적 고통을 초극하려는 의지가 투영된 삶의 최종적 추상물이다.

시인은 무수한 시간 동안 비바람을 견디어온 바위가 되고 싶어 한다. 안으로 점점 깊어지도록 자신을 채찍질하고 성찰하여 마침내 생명조차도 의식하지 않는 고요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한다. 하늘로 구름이 흐르고 멀리서 천둥소리 울려도 흔들리지 않은 채 침묵의 세계에 닿으려 한다. 마음속으로 꿈꾸는 이상적 세계나 유토피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어떤 절망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는 초월적 바위가 되려 한다. 시인은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가 되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드러내는데, 이는 삶이 시인에게 지속적으로 각인시킨 슬픔과 분노, 절망과 허무를 감추려는 역설적 표현일 수 있다.

이처럼 유치환의 시에는 인생에 대한 허무와 애수의 정서가 짙게 나타난다. 유한과 무한에 대한 사유,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식이 나타난다. 그의 시에 허무의 정서가 자주 나타나는 것은 죽음의식 때문이다. 그의 죽음의식은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 속에서 싹튼 환경적 조건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실존적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본질적 자각이 삶에의 연민과 애수를 낳는 것이다. 즉 그에게 인생은 근본적으로 절망을 가져다주는 시간이며, 인간은 유한하고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서 삶에 내재한 실존적 허무와 슬픔을 초극하려는 강인한 정신적 의지를 드러낸다. 이 생명 의지의 표출이 유치환 시의 핵심을 이룬다.

바위 /유치환(柳致環 1908~1967)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길을 종교적 귀의를 통해 찾지 않고 휴머니즘에서 찾은 시인이다. 그가 실재론자의 시각에서 신(神)을 부정하고 우주를 영원한 무(無)로 본 것은 생명과 인생에 대한 무한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존재가 무에 이르는 과정이 곧 신에게 이르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에 귀착하지 않고 일상으로부터 끝없이 탈출하여 인간이 처한 절대 고독과 허무를 시의 언어로 승화하려 했다. 단순히 말해 그에게 우주의 삼라만상은 종교적 절대자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난 자율적 세계고, 그 우주적 세계를 움직여가는 근본동력은 바로 생명에의 의지다. 이런 생명 철학과 사상을 토대로 그는 언어적 기교나 자연 찬양에 매몰되지 않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존재의 탐색을 통해 초월의 세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유치환을 생명파라 부르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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