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대학 적립금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청주대학교가 김윤배 전 총장 재임기간에고려청자 등 고가의 유물을 13억원 어치나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유물매입 규모가 도내 다른 대학에 비해 과다하고, 또 '순수 교육용으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시각이 뒤따르는 등 여러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본보가 확보한 관련 자료에 따르면 청주대 박물관은 지난 2010년 10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4년 동안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전기 금속활자본 등 13억 4천만원 어치의 유물 10점을 외부로부터 구입했다. 종류별 유물구입 가격은 청자흑백상감국화문병 1억 5천만원, 청자음각모란문주자 1억 4천만원(이상 2010년 10월), 청자음각연화문유개사이호 1억 5천만원, 백자청화모란문병 4천 3백만원, 백자투각파초문필통 5천 7백만원(이상 2011년 10월) 등이다. 이밖에 2012년 10월에는 청자상감베개를 3억 5천만원, 청자화형잔탁 4천만원, 경자자 주자본 강목 1억원을 구입했고, 2013년 10월에는 청자상감모란당초문매병을 2억 5천만원, 청자상감운학문매병 6천만원에 매입했다. 청자상감베개가 3억 5천만원으로 최고가를 기록한 가운데, 1억원이
[충북일보] 곽재기(郭在驥, 1893-1952)는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20년 비밀리에 권총과 폭탄을 국내로 들여와 조선 총독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을 무력적 방법으로 파괴하려는 이른바 '밀양폭파사건'의 주도자로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다곽재기는 1893년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 상봉리(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 75번지에서 아버지 곽신엽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현풍, 자는 경(敬)이며, 이명으로 김광삼(金光三)과 김재만(金在萬)을 사용하였다. 그는 백부인 곽지엽에게 입양되어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의 경신학교 졸업 여부는 명부가 소실되어 확인되지 않으나,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인 이곳에서 김규식, 안창호 등에게 철저한 민족의식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향한 곽재기는 1907년 청주 청남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청남학교는 청주지역 유지인 방홍근, 김태희, 김원배 등이 1904년 광남학교(廣南學校)로 개교하였다가 청남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청주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세를 위해 행사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과 인원, 의식절차와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일컫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어람용, 의정부, 예조, 사고(史庫) 보관용 등 5~9부가 제작됐다. 영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 만든 의궤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명칭은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이다. 이 의궤는 우연찮게 발견됐다. 충북도 문화재계와 청원군청은 지난 1981년 영조 태봉과 관련된 석부재가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채 산 아래 계곡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때 당시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라며 다락에 있던 고전적을 보여줬다. 영조태실 의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봤다. 의궤에 의하면 △가봉에 사용된 석부재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현암에서 채석됐고 △공사는 1729년(영조 5) 9월 12일에 시작해 그해 10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리고 이때 충청도관찰사는 도내 각 군현에 인력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였다. 그리고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후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 태실 장소가 정해지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게 했다. 이렇듯 조선왕실은 왕자의 태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고, 그것은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자 않을 수가 없다. (…)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九經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징되는 것이다." 인용문 중 '구경'은 주역, 시전, 서전,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 등 9가지 경전, '단상'은 얼굴이 시원스럽게 생긴 것을 말한다. 왕실이 왕자의 태를 반드시 명당 자리에 묻으려 한 것은 무병장수 기원 외에 명당을 선점,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 태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충북에는 경종 태실(충주시 엄정면), 영조 태실(청주시 낭성
[충북일보] 충북 증평군과 충남 천안시가 조선중기의 문인이자 독서광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서로 자기 지역에서 출생했다고 주장,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증평군은 증평읍 율리에 좌구산휴양림을 개장하고 또 인근에 김득신 문학공원을 만드는 등 김득신 묘가 있는 율리 일대를 휴양과 역사탐방의 공간으로 집중 조성하고 있다. 나아가 인근 삼기저수지 둘레길에 김득신 소개글과 독서광과 관련된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김득신을 증평이 배출한 최고의 문인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행정력을 투입하고 있다. 증평군은 이와 관련해 '부제학 김치의 아들로 증평(옛 청안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증평읍 율리 밤티마을 좌구산 자락 아래에 그의 묘가 있다'라고 서술, 증평 출생설을 기정 사실화했다. 군은 그 근거로 △아버지 김치(김시민장군 양자)가 청안현에 수년간 머문 적이 있고 △그 시기에 아들 김득신에 태어났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 천안발전연구원 산하의 천안학연구소(소장 심재권 나사렛대 교수)는 백곡집 등 그가 남긴 글을 바탕으로 '김득신=천안 출생설'을 주장하고 있다. 연구소측은 그 근거로 △호가 백곡(栢谷)이고 △김득신 시에 백곡 근처의 복구정(伏龜亭
[충북일보]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였던 이기붕(李起鵬·1896-1960)의 출생지는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가 맞고, 또 그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증조부 이회정(李會正·1818-1883)의 몰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네이버 인명사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대부분의 사전은 이기붕의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에 비해 중원대 이상주 박사 등 괴산지역에서는 구주소로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 299번지'가 출생지라고 주장해 왔다. 이와 관련해 본보가 1960년 4.19혁명 당시의 각종 자료를 검색한 결과, 동아일보가 이기붕의 출생지와 가계를 장문으로 기사화했고 이는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9일자는 '李起鵬씨의 人生航路' 기사에서 '만송 이기붕씨는 4229년 12월 20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그의 할아버지 李錫宇 진사가 몰락된 권속을 이끌고 낙향한 곳이었다. 그는 7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품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고난많은 어린시절을 보냈다'라고 보도했다. 이보다 하루 앞선 4월 28일 새벽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장남 이강석(李康石·이승만의 양자)은 경무대에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 영장(營將)이었던 남연년(南延年·1653~1728)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天卜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인근에는 초록바위, 맹골, 곰 이야기 등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노래기 중말 동쪽에 있는 초록바위는 남연년이 어릴적에 무예를 닦던 곳이다. 또 남연년이 부친을 여의고 맹골 묘에서 아우 남극년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매일 범이 찾아와 벗이 돼 주었다. 이밖에 남연년이 황해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곰(熊)이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해쳤다. 그러자 그가 단기(單騎)로 고향으로 돌아와 곰을 화살로 잡아 그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다는 구전이 존재하고 있다. 남년연에 대한 이같은 구전은 영조대의 현양사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일부는 사료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있고, 그의 문집으로 《미호집》(渼湖集)이 존재한다. 그는 《미호집》 제 20권에서 남연년에 대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났다' △'곰을 퇴치한 일로 군영의 장졸들이 공의 용맹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관덕당'(觀德堂)으로
[충북일보]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가들이 "만약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그가 재위 24년 동안 보여준 개혁과 대통합 그리고 민본(民本) 정치는 분명히 봉건왕조 조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정조의 민본정신은 그가 생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백성을 '만천'(萬川)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 위에서 만천을 비추는 명월(明月)로 생각했다. 이처럼 정조는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지고지순한 왕정을 추구했다. 정조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회만 생기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했다. 1백회 이상을 기록한 그의 행차는 백성들의 민원을 집적 현장에서 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했던 호문(好文) 군주답게 《홍재전서》( 弘齋全書)라는 시문집을 184권 10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고, 제 19~25권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제문이 실려 있다. 이중 제 21권에는 1728년 무신란 때 청주읍성에서 희생된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등을 추모하는 글인 '삼충사 치제문'이 들어 있다. 먼저 이봉상에
[충북일보] 영조는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의 1728년 무신란 희생자 유족에 대해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보상과 위로'에 나섰다. 이는 역적은 가차없는 응징을 하고, 충신은 국가가 보훈한다는 의도였다.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3월 20일은 1728년 무신란이 발발한지 닷새밖에 되지 않고, 또 반란의 수괴 이인좌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영조가 아직 반란의 구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청주읍성 희생자의 아들을 승품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인좌는 3월 24일 경기도 안성 장항령(獐項嶺·사진)·죽산 일대에서 체포됐고, 그로부터 7일후 군기시 앞에서 처형됐다. 영조는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궁궐로 초청해 위로를 하기도 했다. '충신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 효충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
전국 지자체들 사이에 이른바 '미선나무 마케팅'이 붐을 이루고 있다. 자생지를 3곳이나 갖고 있는 괴산군이 지난 3-5일 미선나무 축제를 개최했다. 옥천군은 군서면 재건산에 분포하고 있는 미생나무 자생지에 대해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미선나무는 유명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미선'은 아름다운 부채라는 뜻일까 많은 사람들이 미선나무 할 때의 '미선'을 한자 '美扇', 즉 '아름다운 부채'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이때의 미선은 '꼬리 尾'와 '부채 扇 ' 자를 쓰고 있다. 사극을 보면 궁녀 2명이 임금 좌우에서 커다란 부채를 들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이 '미선'으로, 미선나무는 그 열매가 미선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 잘 자랄까. 국내 산림학자들이 전국 미선나무 자생지 5곳에 대한 지형과 토질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미선나무는 '경사가 다소 심한 돌밭'에서 가장 잘 식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수목원 이병천 박사 등은 얼마전 발표한 논문에서 △미선나무는 돌이 구르는 전석지(轉石地·일명 너덜지대)에서 잘 자라고 △그 경사도는 평균 20-45도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즉 미선나무는
손승억(孫承億, 1893~1934)은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될 만큼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1919년 충주에서 비밀결사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였고, 4월 1일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이다. 또한 출옥하던 당일에 옥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재차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결국 자결로써 불굴의 항일의지를 표출하며 장렬히 순국하였다는 사실 정도이다. 많지 않은 자료이지만, 손승억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온 몸으로 항거한 항일투사라 할 수 있다.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이 손승억은 1893년 10월 21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방추마을에서 아버지 손석우(孫錫祐)와 어머니 안산김씨(安山金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해손씨(平海孫氏) 39세손이다. 그의 가문은 한성판윤(漢城判尹), 병조판서(兵曹判書),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등을 배출한 명문 양반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잘 알 수는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참모 홍림(洪霖) 등이 저항을 거의 못하고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그만큼 이인좌 반란군의 기습작전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곧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소문이 청주목과 경기도 일대에 쫙 퍼져있었다. '윤순이 아뢰기를, "무신년에 신이 감호사로 내려갈 때에 용인·광주·양지·죽산·청주에서는 술을 많이 빚어 놓고 역적들의 군사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지금의 사단장격인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은 이인좌의 참모 목함경(睦涵敬)에게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이배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와 군복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용문의 병사는 이봉상, 신은 목함경 등을 의미하고 있으나 청주읍성 4대문 중 어느 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봉상은 첫닭이 울 때 쯤 목함경에 의해 대문 안에서 살해당한 것은 분명하다. 남연년을
속보= 2일 여성가족부가 일본군 위안부 내용을 다룬 충북일보의 '미즈키 시게루 라바우루 전기'(1면) 기사와 관련해 이날 본보에 해당 출판물을 접하게 된 경위 등을 문의했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이날 "책이 출간된지(1997년)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고, 여성가족부도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해당 책을 접하게 된 경로, 현재 보관처 등을 알 수 있느냐"며 이메일로 문의했다. 충북일보는 이에 대해 △책 겉표기 △책속의 관련 사진 △미즈키 시게루의 목격과 당시 체험이 중점적으로 수록돼 있는 30쪽 67쪽 내용을 스캔, 이메일로 송부했다. / 조혁연 대기자
태평양전쟁 당시 현장을 실제로 경험·목격한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부터 강제로 끌려온 종군위안부들이 야자림 움막에서 1명이 하루에 5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라고 책을 통하여 증언한 것을 본보가 처음 확인했다. 현재는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미즈키 씨의 이같은 증언은 전장에서 목격했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실제 모습을 일본인 스스로 기록으로 남긴 것이어서, 향후 종군위안부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주요 증거가 될 전망이다. 본보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접하고 국내 언론사의 기사화 여부를 확인했으나 아직까지 이를 인용하거나 보도한 사례를 확인하지 못했다. 일본인 미즈키 시게루는 지난 1943년 남태평양 '라바우루'(ラバウル) 전장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기억을 바탕으로 1990년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우루 전기'(水木しげるの ラバウル戰記)를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했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43년 11월 스무살 나이에 징병을 당해 고향 돗토리현을 떠나 라바우루에 배치됐고, 그후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왼쪽팔을 잃은 채 귀국해야만 했다. 라바우루는 태평양 비스마르크 군도의 주도(主島)인 뉴브리튼 섬의 주요 거점으로, 태양양전
[충북일보] 청주시 수동에 충북도기념물 제 17호인 표충사(表忠祠)가 위치하고 있다. 한자 '表'가 동사로 쓰이면 '나타내다', '밝힌다' 등의 뜻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표충'은 '忠을 밝힌다'라는 뜻이고, 따라서 전국에는 사당 표충사가 많이 존재한다. 밀양에는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고, 우리고장 옥천에도 같은 이름의 조헌 표충사가 있다.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이 청주읍성에서 희생됐다. 청주 수동의 표충사는 이들 3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기생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홍림의 애첩이었다. 표충사는 1728년 무신란이 진압된 직후부터 당시 조정 차원의 건립이 검토됐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라 사호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그러나 사당 표충사가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731년(영조 7)이었다.
'간판어는 세상을 변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다.' 충북대학교 오영미 씨가 석사논문 '충주시 간판어 연구'를 통해 충주지역 상업건물에 내걸린 상호명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이를 위해 구시가지인 성서동과, 성내동 그리고 신시가지인 연수동, 칠금동 등 4개 동 1천5백32개(63개 업종) 간판어를 수집했다. 분석 결과, △혼종어 간판어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구시가지에는 한자어 간판어가 많은 반면 신시가지에는 외래어 간판이 많은 점 등이 충주지역 간판어의 주요 특징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 혼종어는 고유어+한자(예: 까치방), 고유어+외래어(예: 얼짱몸짱 피부관리), 한자+외래어(예: 삼일커텐), 고유어+한자+외래어(예: 원두커피 볶는 집)가 결합된 간판어로 전제 49.7%를 차지했다. 혼종어 간판어 중에는 고유어+한자어가 25.7%로 가장 많았다. 후자의 경우 구시가지인 성내동은 한자어 간판이 48.6%를 차지 매우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이는 가구, 술집, 병원, 음식점, 다방 등 중장년층이 이용하는 업종이 많이 분포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반면 구시가지이지만 차 없는 거리, 패션거리 등으로 인해 젊은층 유동인구가 많은 성서동은 외래어 간판 비율이 3
권병덕(權秉悳, 1868~1944)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때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동학 입도와 동학농민운동 참여를 계기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고, 1907년에는 시천교에 가입하였다가 1916년 천도교로 귀의하였다. 이후 손병희를 보좌하며 천도교의 주요 직책을 수행하였고, 3·1운동 이후에도 천도교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영원한 천도교 지킴이였다.◇청주에서 태어나다 권병덕은 1868년 당시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부친 권문영(權文永)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윤좌(潤佐)이며,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을 사용하였다. 그의 선대는 경북에서 살았는데, 문경 호계면에 증조부모와 조모의 묘소가 있고, 조부의 묘소는 상주 화서에 있다. 그가 청주에서 태어난 것은 모친 신문화(申文嬅)가 청주 일원에 세거하던 고령 신씨의 후예로서, 외가에서 출생하던 관례 때문으로 이해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북 상주로 이사하였다. 당시 한 신문이 그를 상주 출생이라고 잘못 보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주에서 그는 종숙으로부터 《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성) 등 4개 목(牧)이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이 4개 목을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활용해 이른바 강등 지명을 만들었다. 가령 우리고장 충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충청도'에서 '충' 짜를 빼고 '공청도'나 '홍청도' 등으로 작명했다. 목사에게는 정3품의 관품이 주어졌다. 충청도관찰사가 종2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낮지 않은 벼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당상관'의 예우가 주어졌다. 당상관은 직역하면 마루 위라는 뜻으로, 임금과 같은 마루 공간에서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밑은 당하관이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목사는 박당(朴金+堂)이라는 인물이었다. 문집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에 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면 《경종실록》을 보면 그가 청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임천군수를 역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 성문을 돌파할 당시 취침 중에 있다가 관노의 고함을 듣고 처자, 인부(印符) 등을 버리고 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꼭 105주기가 되는 날이다. 또한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한 지도 꼭 5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거리 곳곳에 천안함 46용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은 여럿 나부끼건만,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싸고 조성된 험악한 형국은 치킨게임을 방불케 한다.'밸런타인데이'와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지난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날의 의미가 변질되어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인식되고 있다. 이날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논쟁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니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고쳐 부르자는 논쟁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별 감흥이 없는 필자이지만, 구태여 그날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부르자는 것은 국수적 애국심의 억지 발동인 것 같아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밸런타인데이에 연인 사이에 초콜릿을 주고받더라도,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새기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월 14일, 한 TV 프로그램이 '안중근 의사 사망선고일'이라고 대문짝만한 자막을 내보내며 방송하는 것을 보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의 충청도관찰사는 권첨(權詹·1664-1730)이었다. 그는 안동이 본관으로, 조선 관료사회에서 외직의 꽃인 관찰사에 거푸 역임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1724년 전라도관찰사, 1727년 충청도관찰사에 역임됐다. '권첨을 충청감사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 인용문에 권첨과 정사효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신란 당시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 권첨은 전술한대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둘의 우유부단함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박필현이 전주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의 밀약과 달리, 마음이 변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인물이 바로 정사효이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사전에 밀약이 있었던 점은 향후 신문과정에서 엄청난 죄값으로 작용했다. 권첨은 앞서 밝힌대로 1827년 8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 즉시기 아닌, 해를 넘겨 부임했다. 그것도 교구(交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좌 반란군에게 충청감영 관할인 청주읍성을 점령당했다. 교구는 신구 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속리산국립공원내 위치하고 있는 보은 삼가저수지는 민물새우 일종인 '새뱅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주의 모식당은 이곳에서 잡힌 새뱅이를 단골 식재료로 쓰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들어 개체수가 눈에 띠게 줄어들었고, 원인을 살펴보니 뒤에는 외래어종인 '배스'가 위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공원연구원이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양현 박사의 책임아래 속리산국립공원 삼가저수지, 소백산국립공원 금계저수지, 내장산국립공원 내장저수지 등 3개 저수지에 대한 외래어종 서식실태를 조사했다. 조사방법은 저수지내 3개 지점을 선택해 투망, 족대, 보트낚시 등의 방법으로 생물어종을 포획·분석했다. 그 결과, 외래어종인 배스(Bass)가 만수위 기준의 60만㎡의 삼가저수지 안에 대략 3만3천마리 정도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개체수 우점종 기준으로 할 경우 피라미(86%), 밀어(18%), 참몰개(1.6%)에 이어 4번째에 해당하는 분포도로, 배스는 1.5%를 기록했다. 반면 생체량 기준의 우점종에서는 피마리(47%), 배스(42%), 참몰개(2.8%), 메기(2.7%), 가물치(2.1%) 등의 분포도를 나타냈다. 생체량 기준은 개체의
신홍식(申洪植, 호는 東吾, 1872~1939)은 청주 출신 3·1운동 민족대표로서 약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부흥사 출신의 감리교 목회자이기도 한 그는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위로과 희망을 전했으며, 사회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하고 방황하다 신홍식은 1872년 3월 1일 부친 신기우(申驥雨)와 모친 최살랍(崔撒拉, 구약성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한문음역)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 '홍식(弘植)'이라 불렀으나, 장년이 된 이후 '홍식(洪植)'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출생지는 가덕면 인차리로 알려져 있으나, 제적등본에는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 25번지로 되어 있다. 그는 일제의 신문에 답하며 자신의 출생지를 문의군 동면 대일리(垈一里)로 진술한 바 있다. 지역의 유력한 고령 신씨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서얼 출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유년시절을 '칭찬시대'라고 자평할 만큼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대재(大才)'라는 소리를 들었다. 양반가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던 그의 삶은 1886년 7월 20일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급변하였다. 편모슬하에서 가정형편이 어렵게 된 그는 과음을
이인좌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운징(李雲徵)의 아들로 명문사족의 후예였다. 그의 처가 쪽도 명문으로, 그의 아내 윤자정(尹紫貞)은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의 손녀이다. 두 집안 모두 남인 계열인 것을 감안하면 당색에 따라 혼인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인좌는 아내 윤자정과 사이에 중명(中明)·仁明(인명)·문명(文明)·화명(化明) 등 네 아들을 뒀다. 딸도 뒀을 가능성이 있으나 사료에는 아들 이름만 등장한다. 무신란 때 4명의 아들이 어렸던 것으로 봐, 당시 이인좌 나이는 30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내 윤자정도 거의 같거나 20대 후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이인좌는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 청천)의 집을 떠난지 정확히 21일만인 1728년 3월 27일 한양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역죄로 능지처참됐다.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은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4월 9일 송면 집에서 청주옥(그림)으로 끌려나와 대역죄인의 아내로써 신문을 받았다. 당시 청주옥은 지금의 남문로 영프라자 자리 쯤에 위치했다. 이인좌는 분명히 박필현과 함께 1728년 무신란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그러나 아내 윤자정은 "마지못해 거사를 했노라"는 식으로 남편 이인
1728년(영조 4) 무신란을 가리켜 청주지역에서는 '신천영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신천영(申天永·?-1728)의 당시 역할과 비중이 크다는 의미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 이인좌와 신천영이 내통했거나 사전 공모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다만 이인좌는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점령한 후 곧바로 신천영을 가병사(假兵使), 즉 임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에 왔고, 가병사는 신경제의 손자 ·신천영으로 정했습니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인 신천영 가문은 연산군 무렵에 청주 상당산성 동쪽인 낭성면과 가덕면 일대로 낙향, 대과급제 24명·진사 80명을 배출한 명문 사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8년 무신년의 난에 신천영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신은, 숙부 신필회, 동생 신석영, 신익영, 사촌 신필대 등 문중 구성원 대부분이 가담, 영조와 노론세력 타도를 외쳤다. 무신란과 관련해 의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한때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1617- 1680)다. 그는 신천영의 5대 조부인 신식(申湜·1551-1623)의 외손자가 된다. 이는 신천영 문중이 선대로부터 남인의 당색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숙종대 청주지역의 남인세력들은 사사
조선시대 왕실과 선비들의 필독서였던 '통감절요'(通鑑節要)가 한 교수의 5년 노력으로 새롭게 완역·출간됐다. 특히 이번 출간은 소제목과 함께 고어투를 배제하고 있어, 역사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인도 충분히 재미삼아 읽을 수 있으로 보인다. 충북대 사학과 김정화(사진) 교수가 최근 중국 역사서인 통감절요 전4권(1·2·3·4)을 2천5백쪽 방대한 분량으로 충북대 출판부 이름으로 출간했다. 통감절요는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 2백94권을, 분량이 너무 많자 같은 송대의 강지(江贄)라는 인물이 은거를 하며 50권으로 절요한 편년체 역사서이다. '절요'는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만 축약한 것으로, 고려사를 축약한 고려사절요가 같은 경우에 해당하고 있다. 통감절요는 기원전 403년(주나라 위열왕 13)부터 서기 959년(후주 현덕 5)까지 1천3백62년의 중국 역사를 장강의 흐름으로 기록사서로, 조선 지식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온공 왈(曰)'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이때의 '온공'은 통감절요에서 말하는 사마온 즉 사마광을 일컫는 것으로, 이는 조선의 역대 왕들이 통감절요를 매우 가까이 했고 또 인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