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약수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전국적인 명소였다. 당시 오오꾸마쇼지(大熊春峰)라는 일본인이 '청주 연혁지'(1923년)를 저술했고, 이 책은 지금도 일제 강점기 기간의 청주지역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초정약수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매년 여름철에는 이 영천을 개방하는 관습으로 가까운 고을이나 가까운 곳에서 찾아 들렸으며 50리, 1백리, 멀리는 수 백리를 가리지 않고 이 지역으로 모여들어 몇 만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처럼 수만명의 인파가 일시에 초정약수로 몰려들 수 있었던 것은 충북선이 개통된 직후였기에 가능했고, 그 관문 역할을 한 공간은 내수역이었다. '淸州 椒井 露泉開湯' 제목의 동아일보 7월 29일자는 '기차삯 할인도 있다'고 밝혔다. '충북의 특산이고 전조선에서 유명한 청주 초정 물탕은 오는 8월 3일부터(20일간) 개방하게 되었다 하는데 음수객의 편의를 위하야 충북선 각역에서 내수역까지 기차 할인과 자동차 할인이 있다는데 위장병에 더욱 효과가 있다 한다.' 초정약수의 명성이 워낙 높다보니 일부 신문사는 '탐음단'을 모객하기도 했다. 중외일보 1927년 8월 7일자에는 '초정영천 탐음단
제철 먹거리를 먹어야 우리 몸에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것은 음양오행론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대전보건대학교 김상보(전통요리과) 교수가 얼마전 이에 답을 주는 저서인 '약선으로 본 우리 전통음식의 영양과 조리'를 출판사 수학사 이름으로 펴냈다. 3백쪽 분량의 이 책은 음양오행사상(제 1장), 음양오행사상과 양생(제 2장), 동의보감을 통해서 본 약선(제 3장), 식료찬요를 통해서 본 찬품요리(제 4장), 식단의 실제(제 5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교수에 따르면 음식과 음양오행론의 결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종교는 도교(道敎)였고, 노자의 도가사상에 음양오행론을 접목시킨 사람은 장자(莊子)였다. 이후 노장사상은 유가,묵가, 법가의 좋은 점을 흡수하면서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했고, 여기서 무병장수를 꿈꾸는 '양생'(養生)의 개념이 싹텄다. 김교수에 따르면 양생, 즉 우리몸에 도움이 되는 식사를 하려면 무엇보다 제철 먹거리를 식재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는 "제철에 산출되는 식재료는 천도(天道)에 순응한 결과물로 봐야 한다"며 "그것을 먹었을 때 우리몸도 천도, 음양의 변화에 순응하는 모습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여름철의 꿩고기, 그리고 겨울철에
속보= 증평 '이성산성'과 '杻城山'(추성산)은 서로 다른 지형물로, 동일한 곳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증평군이 국가사적 지정을 앞두고 '이성산성'을 '추성산성'으로 개명한 것은 논리적인 근거를 잃게 된다. 본보가 '杻城山城을 추성산성으로 읽는 것이 옳은가'라는 물음을 제기한 것과 맞물려, 이성산성이 도안면 노암리 추성산에 위치한다고 본 것은 오류라는 지적이 나왔다. 24일 강민식(청주 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박사는 △이성산성은 추성산이 아닌 이성산에 위치하고 △이성산성이 토성(土城)으로 확인된 것도 조선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라고 밝혔다. 그는 그 근거로 청안군읍지(1899년), 조선환여승람(1937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1942년) 등 3개 고지도와 문헌을 제시했다.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청안군읍지에는 두타산 부근의 추성산과 이성산이 각각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이성산성이 개명의 근거와 달리 추성산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사진 참조) 문헌사료인 조선환여승람에도 두타산, 뉴성산, 이성산이 서로 다르게 기술돼 있다. '두타산, 군 서쪽 20리에 있다. 추성산, 군 서쪽 20리에 있다. 이성산,
'杻城山城'을 '추성산성'(종전 이성산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가. 21일 증평군 도안면 추성산성이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예고됐다. 이에따라 증평군은 특별한 이의 제기가 없는 한 지난 2003년 군으로 탄생한 후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杻城山城'을 '추성산성'으로는 읽는 것에서 여러 이견이 나올 수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증평군은 '이성산성'을 '추성산성'으로 바꾼 것은 △대동여지도(사진) 등 조선시대 여러 고지도에 '杻城山'이 보이고 △그곳에 위치한 '추성산성'이 마치 수갑 모양을 하기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 '杻'에 수갑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은 맞으나, '뉴'나 '축'으로도 읽을 수 있어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민중서관의 한한대사전(1990년 초판 25쇄)은 '杻'의 훈과 음을 각각 '감탄나무 뉴','수갑 축', '싸리 축' 등으로 적어놨다. 반면 법제연구원이 지난 2천년에 편찬한 조선시대 대전회통(1865년) 번역집은 '杻' 자에 대해 '유(杻)는 죄수의 손에 채우는 수갑으로 마른 나무로 만든다'라고 설명, '추'가 아닌 두음법칙상의 '유'로 읽었다. 이밖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
세종대왕은 초정약수를 발견한 '어떤 사람'에게 목면(무명) 10필을 하사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하는데(…)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 어떻게 초정약수를 발견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초정약수의 발견과 관련된 전설이 이육(李陸·1438-1498)이 지은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실려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떤 늙은 농사꾼이 언덕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귓가에 은은히 군마의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사또에게 고했으며 이리하여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이었다.' 그는 앞 문장을 '서원에 초수라는 물이 있다. 내가 안찰사가 되어 이를 살펴보니, 물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아주 차고 맛이 쓰다. 뱀이나 개구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곧 죽는다'라고 적었다. 1444년 봄. 내섬시윤 김흔지에 의해 초정약수 행궁이 세워졌으나 당시 모습을 확인해 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온양 행궁과 관련 그림이 현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온천행궁의 규모·배치를
1919년 3.1운동 당시 충북에서 피살된 사람은 전체 28명이었다는 명부가 공개됐다. 또 일제 강점기에 일본열도로 강제 징용당한 충북 사람은 2만6천124명이라는 명부도 함께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원장 박경국)은 19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 '일정(日政)시 피징용자 명부' 등 3가지 명부 67권과 그에 대한 분석 내용을 공개했다. 이들 명부는 지난 6월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승만 정부가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원은 밝혔다. 명부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충북에서 피살된 사람은 28명으로, 강원도 11명보다 훨씬 많았다. 전국적으로는 경기 169명, 경북 39명, 경남 230명, 충남 72명, 전남 81명 등 총 630명이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충북과 충남의 경우 전체 피살자 100명중 31명만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바 있다. 따라서 이번에 명부에 기록된 69명도 추후 조사를 통해 독립유공자로 서훈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동 대지진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반차도'(斑次圖)에는 적어도 수천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중 상당수는 호위 군사들이지만, 남녀노소의 일반 백성 모습도 많이 그려져 있다. '국왕의 행차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궁금증 때문에 나온 백성들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한양도성을 나서 우리고장 초정약수로 향할 때도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격쟁하는 노인도 있었다. 격쟁은 임금이 행차할 때 징을 치며 그 앞으로 나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동을 말한다. '연세가 85세쯤 되는 늙은이가 임금이 탄 수레 앞에서 원통함을 아뢰니, 병조에 내려 이유를 가리게 하고, 인하여 술과 음식을 먹이고 면포 1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그해 봄 1차 초수리 거둥을 마치고 한양도성으로 되돌아갈 때는 그런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충청감사 이선(李宣)이 "종량(種糧)이 부족한 인민들이 거가 앞에서 하소연할까 염려되니 현재에 있는 잡곡으로 고루 주게 하고 그 떠들썩하게 하소연하는 자를 금하게 하라"(5월 5일자)고 명령했다. 그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은 이선의 행동을 핵실(조사)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했다. 세종은 초정약수에 머물 때도 위민(爲民)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묵재 이문건(李文楗·1494 ~ 1567)이 부인을 생각하는 애뜻한 마음에 묘지명을 두번이나 구운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제작된 묘지명(墓誌銘)은 남편이 부인을 위해 만든 묘지명으로는 조선시대 최초인 것으로 밝혀졌다. 괴산 중원대학교 이상주(사진) 교수가 얼마전 '묵재 이문건의 문학과 예술세계'를 도서출판 '다운샘' 이름으로 출간했다. 340여쪽 분량의 이 책은 △1부 이문건의 친·외·처가의 인적구성 △2부 이문건의 문학세계 △3부 이문건의 금석문과 서예미학 △4부 이문건의 회화적 식견 △5부 묵재일기와 설공찬전 등으로 구성돼 있다. 3부중 묘지명에 관한 내용은 지난해 충북대에 기탁한 부인 안동김씨(본명 김돈이) 묘지명에 대한 처음이자 본격적인 분석이어서 국어학계는 물론 지역 사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주이씨 묵재공파 후손은 지난해 상반기 경북 고령군 운수면의 이문건 묘를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6점의 부인 안동김씨 묘지명을 발굴한 바 있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묘지명 146점을 전수 조사한 결과 남편이 아내를 위해 제작한 묘지명으로는 안동김씨 묘지명이 가장 이른 시기(1567년)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다만 고려
진천 이월면 평산신씨 가문에서 조선중기~일제 강점기 기간의 고문서 6백여점과 희귀 사진 등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특히 발견된 고문서 등은 분량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일기부터 재산을 나누는 분재기까지 매우 다양, "근래 최고의 고문서 발견"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14일 충북대 사학과 신영우 교수가 이끄는 조사팀은 "최근 진천군 이월면 노산리 평산신씨 세거지에서 신잡의 4백여년 전 일기와 고한글 간찰 등 6백여점의 고문서와 1910년대 사진 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들 고문서는 일명 '논실 신씨'로 불리는 평산신씨 가문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를 신교수에게 내용 확인을 요청하면서 그 존재가 확인됐다. 6백여점의 고문서는 △4백여년 전의 신잡(申石+集·1541∼1609) 개인일기 2권(1책) △신잡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교지(敎旨) 95건 △호적단자류 51건 △노비관련 문서 10건 △분재문서(화회문서) 4건 등이다. 호적단자, 노비, 분재문서는 16~17세기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정려를 받는 과정을 기록한 통문, 친척들 간에 주고 받은 고한글 간찰(편지·사진), 혼인문서, 전답문서, 상례문서, 제례문서, 열녀기 등도 포함돼 있다. 신잡
전국 여론조사에서 과반이 넘는 찬성 의견을 획득, 명분을 확보한 세종대왕은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는 등 토지세법 개정에 박차를 가했다. 세종은 진양대군을 도제조, 하연, 박종우, 정인지 등을 제조로 임명했다. 이중 정인지가 공법 실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법을 시행하려면 새로운 양전(토지조사)과 등급을 매겨야 했으므로 많은 실험이 필요했다. 그 실험지가 된 것이 바로 초정약수 고개 너머의 청안현이었다. "지난번에 초수에서 김종서와 이숙치 및 정인지로 하여금 함께 청안의 밭을 심사하여, 깊이 밭의 등수를 나누는 예를 안 연후에, 다섯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등수를 정하니, 밭의 품등이 거의 바르게 되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그해 가을에 초정을 다시 찾기 위해 한양도성을 나선 것은 윤7월 15일이었으나 언제 초수리에 도착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1차 거둥의 예로 봤을 때 한양서 초수리까지는 매번 닷새가 소요됐다. 따라서 세종은 윤7월 20일에 초수리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의 작성 시점은 '1444년 7월 13일'이다. 그렇다면 인용문의 '지난번에 초수'는 1444년 봄으로, 이때 이미 청안현이 공법의 실험지로
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일대에서 조선시대 객사(客舍) 담장과 관련된 유구가 보존이 양호한 상태로 대규모 발굴됐다. 또 그 하층에서는 고려시대 토목기술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석축 배수로가 역시 양호한 상태로 발굴됐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지난 9월부터 최근까지 CGV 영화관 근처인 상당구 서문동 25-1번지 일대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청주목 객사담장 4기, 적심, 기단, 복합문 기와 등을 발굴했다. 담장은 남북방향의 'I'자형 2기와 남북과 동서 방향이 조합된 'ㄱ'자형 2기 등으로 전체 길이는 22.3m, 폭은 0.8~1m 규모이다. 이밖에 4개 담장은 기초를 다지기 위해 비교적 작은 할석을 깔을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관계자는 "발굴된 객사담장은 청주읍성의 북서쪽에 해당한다"며 "이를 감안할 때 과거 발견된 인근 객사터의 연장선에 있는 유구로 , 청주목 객사를 입체 복원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밖에 객사 담장 유구가 발견된 하층에서는 석축 배수로, 적심, 초석, 어골문 기편 등 고려시대 유구 등이 역시 양호한 상태로 다량 발굴됐다. 석축 배수로는 길이 7m, 폭 60㎝ 규모로 고려시대 토
세종대왕은 공법(貢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지 10년만에 결단을 내렸다. 세종은 관료는 물론 '여염의 세민(細民)', 즉 평민에까지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국민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는 이런 배경하에 실시됐다. 조선 전기는 당연히 모든 권력이 국왕 1인에게 집중돼 있고 또 신분의 차별이 뚜렷한 봉건시대였다. 그럼에도 세종이 '세민'의 여론까지 들어보려 한 것은 이미 그때 민주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인 만큼 여론수렴 결과는 다섯 달 후인 그해 8월 초순에 나왔다. 결과는 공법시행 찬성 의견이 대략 57%, 반대가 42%로 찬성자가 많았다. '호조에서 중외의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49명입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수는 총 1
올 단재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자는 적었지만 예년에 비해 알찬 내용들이 많이 쏟아졌다. 2013 한·중 단재 학술심포지엄이 11일 오후 충북대 학연산공동기술연구원에서 열렸다. 단재문화예술제천추진위원회와 충북대중원문화연구소가 공동 주관한 이날 학술회의에는 중국 북경대외무역대학 최옥산 교수와 충북대 박걸순 교수가 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먼저 최교수는 '단재 신채호의 북경 지역 독립운동과 유적지 현황' 주제발표에서 사찰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언급, 참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 단재는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가통(家統)의 영향을 받아 유교적 성향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먼저 최교수는 석등암(石燈庵), 현량사(賢良寺), 홍라사(紅螺寺), 관음사(觀飮寺) 등의 북경지역 사찰에도 단재의 생전 체취가 남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경시 서성구에 위치하고 있는 석등암 유적에 대해 "단재가 1918년 저술활동에만 몰두하려 사색을 위해 찾은 공간이었다"며 "지금은 사찰이 없어지고 석정호동(石火+丁胡同) 지명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북경시 동성구에 위치하고 있는 현량사에 대해서는 "단재의 시 '賢良寺 佛像을 보고'의 소재가 됐던 사찰"이라며 "현재 절은 완전히 사라지
민영은(閔泳殷·1870~1944·사진) 후손이 청주시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반환 항소송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소송의 대상이 된 토지에 대해 "민영은이 친일의 댓가로 취득한 것"이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민영은은 최근 뉴스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정도와 일부에서 말하는 교육가로서의 활동은 그 실상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사후 70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지역사회는 민영은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민영은의 친일 행각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는 먼저 1937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이 됐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역시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김성수, 방응모 등이 중심이 된 '국민정신동원조선연맹'은 징병, 징용, 창씨개명, 공출, 일본어 사용 등에 대한 독려 활동을 펼쳤다. 1941년에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은 자발적인 황민화와 공출강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이었다. 그는 거액의 비행기 성금도 헌납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39년 8월 18일자는 '애국기 충북호, 충북서 헌납결의, 민영은씨의 1만원을 필두로 성금벌써
전통시대 동양의 조세개념은 조용조(租庸調)였다. 중국의 수나라 때부터 등장한 제도로 조(租)는 토지에 부과하여 곡물, 용(庸)은 사람에게 부과하여 노동력, 조(調)는 호(戶)에 부과하여 특산품을 각각 징수·징발했다. 조선도 이같은 원칙을 준용, 농지를 가진 농민들에게는 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듯이 조선의 토지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공법(貢法)-영정법(永定法)-비총법(比總法) 순으로 변했다. 답험손실법은 글자 그대로 '담헙'과 '손실'이 합쳐진 표현이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조정은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집적 조사하는 것을 '답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등급을 메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어느 지역의 농토는 가뭄 때문에 작황에 안 좋아 C정도의 수확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조사를 나간 관리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A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였다. 세종은 즉위한지 얼마 안 된 때부터 토지세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토질의 전분6등법,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진 '공법'(貢法)이다. 세종 즉위 3년(142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세종대왕이 청주목 초수리(초정약 지칭)에까지 와서 훈민정음 창제 문제에 대한 고민을 했을까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미리 말하면 그런 의구심은 시간 낭비가 된다. 세종대왕은 1444년 초정약수에까지 와서도 훈민정음 문제를 매우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 증거는 아이러리컬하게도 훈민정음 창제의 열렬한 반대자였던, 당시 집현전 부제학(정3품)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 안에 들어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양이 매우 많아 단독이 아닌, 집현전 학자들의 집단상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최만리는 자신이름의 상소문에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상말(훈민정음 지칭)만 알면 한자로 써있는 공문서는 어떻게 읽을 것이냐 등 세세한 내용까지 상소했다. 그리고 그런 최만리는 이 상소문에는 "어찌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汲汲)하게 하시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언문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인용문 중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작업, '행재'는 초정약수 행궁, '성
3천년 전의 중국 시경(詩經)에 '김치 菹'(저) 자가 등장한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도 菹자가 다수 관찰된다. 그렇다면 김치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일까. 충북대 제 19기 박물관대학의 2학기 7번째 특별강연이 지난달말 학내 박물관(관장 성정용 교수·고고미술사학과)에서 열렸다. 이날 특강에는 박채린(세계김치연구소 선임연구원) 박사가 등단, '조선시대 김치문화'를 주제로 박물관 대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에 답을 했다. 그의 이날 특강은 '한국 김치의 기원은 중국의 菹인가'에 모아졌다. 중국 후한 때 유희(劉熙)가 지는 석명(釋明)은 菹에 대해 '菹는 막는 것이다. 발효시켜 차지도 덮지도 않는 곳에 두어 물러지지 않게 한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菹음식이 문헌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지금부터 3천년전쯤 지어진, 중국 오경의 하나인 시경(詩經)이다. 문제는 이런 菹가 조선시대 여러 고문헌에도 수없이 등장하면서 한국의 김치가 중국에서 전래됐는가, 아니면 자생적인가의 논란이 있어 왔다. 중국 6세기 무렵의 고문헌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저채류(菹菜類) 음식을 소개하는 내용이 총 37건 등장한다. 박 박사가 이를 분석한 결과, 초산발효에 의한 菹제조 내용이 대부분을 차
세종대왕 대의 과학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장영실과 이천이 주로 거론된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김조(金金+兆·?∼1455)라는 인물도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물시계인 자격루 발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김조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수리(초장약수)에 거둥할 때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바로 김조이다. 그의 보고를 통해 당시 충청도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현상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혹은 기근으로 나물만 먹는 자도 있고, 혹은 먹지 못해서 부황이 난 자도 있으며, 쌓아 둔 곡식도 많아야 1, 2두(斗)에 불과하고, 적은 자는 1, 2되 밖에 없는데, 혹 떨어진 자 중에는 경작하던 토지에 파종도 하지 못한 자가 3분의 1분은 된다 하니….'- 식량이 남아 있다는 사람도 기껏해야 1~2말, 적은 사람은 1~2되라고 세종께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초수리에 거둥하던 때의 가뭄은 전년도부터 계속 된 것이라는데 더 심각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
가뭄과 기근은 혼용되는 면이 있으나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가뭄은 기상적인 현상이고, 기근은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굶주리는 현상을 말한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은 1444년 가뭄으로 인해 충청도 일대에 대규모 기근(飢饉) 현상이 나타났다. 세종실록은 그 실상을 '사람들이 나물만 먹은 빛을 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병조 판서 정연이 아뢰기를, "신이 청안(淸安) 지방에 가니, 남녀 30여 인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으므로, 신이 종자(從者)를 시켜서 살펴보니 모두 나물만 먹은 빛이 있었습니다."'- 기근현상이 좀더 심한 지역에서는 아사자도 속출,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신을 길가에 방치하기도 했다. 당시 예조는 세종에게 이런 보고를 한다. "이제 파종한 것이 싹이 섰고 밀·보리가 팰 때를 당하였는데, 여러 날 비가 오지 않으니 (…) 원통한 옥사를 살펴보고 빈곤한 자를 진휼하며, 시체와 해골들을 묻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종은 자신이 초수리에 머물고 있는 기간에 심한 기근이 찾아온 것에 대해 이른바 "내탓이오" 의식을 보였다. 또 배곪는 충청도 백성을 신속히 구제하기 위해 이른바 '보고 라인'을 先시행- 後보고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한국기와학회와 한국성곽학회가 공동 주최한 2013년도 국제학술회의가 '성곽과 기와'를 주제로 지난 25~26일 충청대학교 문예관 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는 한국기와학회 장준식 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유창종 명예회장의 축사, 중국 사회과학원 유경주 박사의 격려사, 그리고 차용걸 충북대 교수의 기조강연이 이어졌다. 이밖에 주제 발표자로는 백종오 한국교통대 교수,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 카메다 슈이치 일본 오카야마대학 교수, 김호준 중원문화재연구원 등이 참여했다. 차교수는 '한국 성곽출토 명문와' 주제의 강연에서 삼국, 고려, 조선시대 기와 문화를 시대 흐름별로 설명, 한국 역사의 일부를 기와를 통해 설명했다. 이중 조선시대 기와문화가 충북과도 관련있는 부분이 많아 학술회의장의 또 다른 주목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조선초기는 기와의 수요가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그는 그 원인으로 △한양 도성 건설 △경복궁 신축 △각급 관청공사 △민가의 기와잇기 문화 등을 꼽았다. 태조 이성계는 기와 수요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조정에 동요직(東窯直)과 서요직(西窯直) 각 1명을 뒀다. 태종 때는 한양도성 내부의 민가까지 모두 기와는 얻는 일명 와즙(瓦
1444년, 세종대왕의 거둥에 발맞춰 초수리 뒷산에서 옥(玉)이 발견되자 나라 전체가 경사스런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영의정 황희는 이를 "태평성대의 징표"라는 식으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은 옥 발견지 일대를 특별 경비하도록 했다. "초수리(椒水里)에서 산출되는 옥(玉)은 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보배이니 사사로 채굴하지 못하게 하고 그 낭비와 금지를 엄하게 해야 하겠다"- 이어지는 문장은 "금지와 방비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반드시 틈을 타서 몰래 채굴할 것이니, 마땅히 그 주위를 가시나무들로 둘러서 울타리를 만들고, 문에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친히 글짜를 써서 봉해 놓고는…"(〃)라고 쓰여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옥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일부 애호가들이 악세서리용으로 사용하나 그 값은 금·은에 훨씬 못미친다. 그럼에도 당시 세종대왕과 대신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의외로 음악과 관련이 있다. 세종대왕은 중국 것이 아닌, 조선 고유의 악기로 종묘의례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준음을 지닌 악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때 경기도 남양에서 옥의 일종인 경석(磬石)이 발견됐다. 경석은 가공이 쉽기 때
완벽(完璧)은 보통명사처럼 보이나 실은 중국 고사성어에서 유래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명신이자 책략가인 인상여(藺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이에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으나 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그러자 인상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의 심리전은 먹혀들었고 구슬은 무사히 조나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조선말기의 동학이 당시 지배층으로부터 강한 탄압을 받은 이유는 반정부 성향 이전에 '서학(가톨릭)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동학농민혁명 제 119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지난 17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충대 중원문화연구소(소장 박걸순 교수)가 주관한 이날 학술대뢰는 '1893년, 동학농민혁명 전야를 밝히다'를 제목으로 다양한 연구문이 발표했다. 또 같은 대학 신영우 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된 토론회에는 김양식 충북학연구소장 등이 참여, 열띤 논쟁을 주고 받았다. 이중 김선경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이 발표한 '삼례취회시기…' 연구문이 일반에게는 다소 새롭게 보이는 내용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발표문에 따르면 창시자 최제우는 1861년부터 동학 포교를 시작했으나 기득권층의 "동학은 서학과 같다"는 비판을 받으며 줄곧 탄압에 시달렸다. 김 연구원은 그 근거의 하나로 1863년 상주 우산서원에서 작성한 동학배척 통문 사료를 제시했다. '무릇 西를 東이라 하고 洋을 鮮이라고 하고 學을 天主라고 부르니 남만 북적 황건의 道呪(도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동학은 천주학의 부스러기를 주워모은 것이다
보은 삼년산성 주변의 대야리고분군에서 각종 토기, 철기류, 금동제 귀고리 등 6세기 초기로 추정되는 신라계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특히 경주가 아닌 곳에서 금동제 귀고리(사진)가 출토된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삼년산성 경영을 직·간접으로 맡았던 권력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원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11년 보은 삼년산성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활동을 벌여 대야리, 어암리, 평각리, 풍취리 등에서 직경 15~20m의 대형고분 160여기 등 총 1천6백여기의 삼국시대 고분 존재를 확인했다. 충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호수)은 이같은 지표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올 7월부터 여러 고분군 중 대야리 중형고분(충청북도 기념물 제156호) 1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봉분 직경 약 12.5m, 높이 3.7m 제원의 사다리꼴 '앞트기식 돌방무덤'(일명 횡구식석실분)에서 각종 토기류, 철기류, 금동제 귀고리 등 총 45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수량이 가장 많은 토기류는 목긴항아리(장경호), 받침달린 목긴항아리(대부장경호), 2단 굽다리접시(고배), 목짧은 항아리(단경호) 등으로, 따로 마련된 부장공간에서 발굴됐다. 이밖에 용도가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각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까지 데리고 온 막내아들 이염(李琰·영흥대군) 왕자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영흥대군(후에 영응대군)은 초수리 약수에 왔던 그해에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했지만 5년 뒤 그녀와 이혼했다. 그러나 실록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 이혼은 합의가 아닌, 송씨가 궁궐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실록은 이 부분을 간단하지만 뭔가를 알 수 있게 적었다. '이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병으로 인하여 내쫓기고, 다시 배우자를 고르기 때문에 말한 것이었다.'- 원문은 '時永膺大君夫人宋氏以疾見黜, 更爲擇配故云'이라고 돼 있다. 한문에서 '見'은 피동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見黜'(견출)은 쫓겨남을 당한 것이 된다. 사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시아버지 세종이 며느리의 행동거지에 불만이 많았고, 그래서 병을 핑계로 막내아들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궁궐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송씨가 쫓겨날 당시에 병을 앓았다는 핑계는 얼마안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세종대왕은 곧바로 해주정씨 규수를 간택, 영흥대군과 그녀를 재혼시켰다. 여기부터 이른바 '조선시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송
[충북일보] 충주 사과 과수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15일 충주시에 따르면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전체 매몰 작업에 착수했다. 과수화상병 예찰을 진행하던 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5일 해당 과수원에서 잎맥이 타들어 가는 증상을 발견했다. 농촌진흥청의 정밀검사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이 나온 14일 시는 3천900㎡ 과수원 전체를 매몰하기로 하고 나무뽑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난 사과나무는 전체 327그루 중 홍로와 양광 등 36그루다. 관련 매뉴얼은 과수화상병 발생 주율이 10%를 넘으면 전체 매몰을, 5% 미만이면 발생 가지만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과수원은 과거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선례가 없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이 과수원에서 1.2㎞ 떨어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바 있다. 충주 사과 발생농가 해당 반경 안엔 사과·배 농가 304곳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수화상병 발생 과수원에는 현재 외부인 출입이 차단됐다. 올해 첫 과수화상병이 발생함에 따라 농촌진흥청은 위기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관심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30대 여성이 새내기 경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청주청원경찰서 율량지구대 이의성(31) 순경. 15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5시 40분께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한 호텔에서 '공황장애가 있는 여성이 귀가를 못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와 공동대응 요청을 받아 출동한 이 순경과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 A씨의 귀가를 돕던 중 갑자기 A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여성은 과호흡을 하다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고 호흡을 멈추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 순경은 A씨의 기도를 확보하고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이 순경은 동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119 구조 요청을 했고 그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쓰러진 A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후 A씨는 구급대에 인계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경은 "실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본건 처음이었다"며 "혹시나 잘못될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과거 적십자에서 CPR 교육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응급 처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보은·옥천·영동·괴산 국민의힘 박덕흠 "우리 동남 4군 군민의 응원과 지지 덕분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 같습니다. 박덕흠을 4선 중진으로 키워준 보은·옥천·영동·괴산군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슴 깊이 담아 앞으로 지역 발전과 좋은 의정활동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4선 중진 의원의 역할과 책무를 고민하며 지역 발전의 세세한 방안을 구상 중인 국민의힘 박덕흠(70)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 운동 기간 약속했던 공약 이행을 통해 지역구인 보은·옥천·영동·괴산군의 발전을 앞당기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선거 운동 전 여론조사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한 후보와 지지율이 1%P로 좁혀지면서 초접전 양상을 띠었고, 갈수록 고소 고발도 난무했다.박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달라"며 진심의 정치를 내세웠다. 이 결과 박 당선인은 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정계 인사들은 동남 4군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개혁보다 지역 발전을 우선시하고 힘 있는 4선 국회의원을 선택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