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亡者)의 공간인 무덤을 부르는 명칭은 능(陵)·원(園)·총(塚)·분(墳)·묘(墓) 등 다소 다양하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 원은 세자나 세자비 또는 왕의 종실무덤을 일컫는다.총은 규모가 크고 어떤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지만 매장자, 즉 묘주를 알 수 없는 경우에 붙인다. 가령 금관이 나왔으니까 '금관총'으로 부르는 경우다.분은 옛무덤이지만 특이함이 발견되지 않는 평범한 무덤을 가리킨다. 이때는 지역명을 따서 'OO리 몇호분' 식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것 외의 평범한 무덤은 '묘'(墓라)고 불렀다.증평읍 율리 산 8-1에 백곡 김득신(金得臣·1604-1684)과 그의 아버지 김치(金緻·1577-1625)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묻힌 김득신은 생전에 아버지 묘를 살피기 위해 좌구산 아래 율리(밤티골) 산길을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는 밤티골이 배경이 된 '율협'(栗峽)이라는 칠언절구다.'산기슭 시냇가에 돌로 만든 대(山畔溪頭石作臺) / 올라서 바라보니 석양이 눈앞에 펼쳐지네개(登臨斜日兩眸開) / 시흥이 일어나 자주 붓을 들며(詩因有興頻抽筆) / 근심을 덜기 위해 빈번히 술잔 기울이네(酒爲銷愁每把盃) / 나그네의 혼은 꿈속에서
현도 보성오씨 종중이 문중내 자녀들을 상대로 뿌리알기와 인성 교육을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어, 주변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방학을 맞으면 청소년 상대로 한 인성, 극기, 전통문화 캠프 등이 많이 열리지만, 문중이 직접 나서 이를 실시하는 사례는 지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도 보성오씨 문중이 올 여름방학을 맞아 현도면 달계리 종중 재실에서 '보성오씨 뿌리알기 어린이 여름캠프'를 개최하고 있다. 강사는 오현진(전 청주대 교수), 오노균 씨 등이 번갈아 가며 맡고 있고, 교육 대상은 한자 이해가 가능한 초등 고학년~중학교 3학년으로 하고 있다. 11일 오 전 교수는 "최근 빈발하고 있는 군대내 각종 사고는 인성교육 실패를 증거하고 있다"며 "올바른 인성교육을 가정과 학교에만 맡길 수 없어 문중 차원에서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교육 내용은 오전, 오후 각 2시간씩 4시간에 걸쳐 올바른 인성, 효사상, 미풍양속을 심어주고, 또 혈연적 뿌리를 알리는 것 등으로 구성했다. 오 전 교수는 "나를 중심으로 했을 때 고종사촌 형은 내종형, 동생은 내종제라는 표현이 있지만 지금의 청소년 세대들은 이를 거의 모르고 있다"며 "혈연알기와 함께 친척간 호칭에 관한 내용도 강의하
증평 율리 삼거리에서 좌구산 방향으로 달리면 삼기저수지가 나오고, 여기서 더 진행하면 율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이 마을 뒷산에 백곡 김득신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증평군청 자료는 백곡의 묘에 대해 '김치(김득신 부친)의 상여가 좌구산과 구녀산 사이로 난 분젓치(옛 영남통로)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상여의 만장이 날아가서 이곳에 앉는지라 명당이라고 생각한 후손들이 이 자리에 묘를 썼다'고 구전을 옮겨 놓았다. 김득신 묘의 봉분은 높이 1.6m이고 묘지둘레는 20m로,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석, 동자석이 놓여있다. 김득신 묘 바로 위에는 조선 중기 최고의 주역 연구가이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김치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김씨 부자는 한남금북정맥 최고봉인 좌구산 산록에서 나란히 영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김득신은 17세기 인물치고는 꽤나 장수한 편이었다. 생몰연대가 '1604∼1684년'이니까, 약 80년 동안 생존했다. 이와 관련, 증평군지는 백곡에 대한 설명문 말미를 '저서로 백곡집(栢谷集)·종남총지(終南叢誌)가 있다. 유학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했다.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라고 의외로
괴산읍 농촌리 괴강가에 자리잡고 있는'취묵당'에는 누정 이름을 적은 편액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취묵당 중수기'와 '취묵당' 단어가 들어간 한시가 걸려 있어 이 누정이 취묵당임을 알게 한다. 취묵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칸마루 사방에 난간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4개의 기둥에는 '용호'라는 주련(柱聯) 시가 걸려 있다. 주련은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 마다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기복덕(生氣福德), 덕담(德談) 등의 내용을 붓글씨로 써서 붙이거나 그 내용을 얇게 새겨서 걸기도 한다. 또 오언이나 칠언의 유명한 시나 자작한 작품을 써서 거는 경우도 많다. 한 구절씩을 적어 네 기둥에 걸면 시 한 수가 완성된다. 취묵당에 걸린 백곡의 주련시 '용호'의 내용이다. '고목에는 찬 안개가 감돌고(古木寒煙裏) / 가을 산에 소나기 흩뿌리네(秋山白雨) / 저무는 강물에 풍랑이 일어나니(暮江風浪起) / 어부는 서둘러서 뱃머리를 돌리누나(漁子急回船).- 18세기 인물인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이 시에 대해 '효종이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며 화공을 시켜 이 시를 써주고는 대
충북도내 일부 박물관과 전시관의 홈페이지 관리 부실이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이는 도내를 찾는 손님을 되레 차버리는 격이어서 상급기관이 홈페이지 관리와 관련된 가이드라인을 제시·감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방학을 맞은 학부모들은 전국 박물관이나 전시관 홈페이지를 통해 전시 정보와 함께 교통 이용, 음식점 직영 여부, 연계 유적·관광지 등의 정보를 사전 수집한 후 행선지로 향하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그러나 도내 박물관 중 이같은 정보를 만족시키는 곳은 국립청주박물관과 사립 철박물관 등 극소수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박물관은 '공립' 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보가 홈페이지에 거의 올라와 있지 않고, 대신 톱 자리에 해당하는 홈페이지 좌측 상단에 충주시 행정을 홍보하는 '창'만 계속 작동하고 있다. '창' 내용은 쌀·밭소득보전 직불제, 풍수해 보험, 자동차 검사기일 SMS 신청안내, 낙뢰피해 예방 행동요령, 대한민국 투자 1번지 충주기업도시 등이다. 게다가 지난 2005년에 개관한 지하1층 지상 2층 규모의 동량면 조동리 선사박물관은 아예 박물관 자체 홈페이지를 갖고 있지 않다. 조동리 선사박물관 정보는 충주박
팔영(八詠)은 8곳의 경치를 읊었다는 뜻이다. 김득신이 '괴협취묵당팔영'의 제 1, 2영에서 일대의 서경을 노래했다면 제 3영은 생활의 정감을 노래했다. '우리 집은 강위에 있는데 / 문밖에 상선이 정박했네 / 달 밝은 백사장에 닻을 내리고 / 안개 낀 옛 골짜기에 돛을 내렸네 / 한수(漢水) 입구에서 바람을 타고 가 / 탄금대 곁에서 노를 두르리네 / 내일 고기와 소금을 팔면 / 촌민들 수 없이 모이겠지.'- 김득신의 생활공간이자 창작 장소인 취묵당 앞의 괴강으로 서해안 상선(商船)이 거슬러 올라와 소금과 고기를 팔고 있다. 인용문 중 '한수'(漢水)는 남한강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도 괴산 불정면 목도강변에서는 백중이 되면 매년 황포돛배의 정박 행사가 재현되고 있다. 제 3영은 그것을 문헌적으로 고증하는 시로 봐야 할 것 같다.제 4영은 괴강가에서 밤중에 물고기 잡는 모습이 마치 소설을 쓰듯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십분 발휘된 시로 볼 수 있다. '오래된 나루의 어부들의 횃불 / 초저녁부터 밝게 빛나네 / 여울머리에선 잠든 해오라기 놀라고 / 물 밑에선 물고기 숨고 달아나네 / 반딧불은 백사장 가에서 반짝이고 / 별빛은 선궁(仙
김득신은 괴강가의 취묵당짓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창동(蒼童)을 시켜 작은 소나무를 베어내고 큰 소나무만 남겨두며, 작은 돌은 뽑아내고 큰 돌은 끊으며 썩은 흙은 제거하여 더러온 고을을 청소하니 기이한 형세와 경치가 번갈아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곳엔 마땅히 당우를 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청당태수에게 청해 목수를 얻어 재목으로 쓸 약간을 베어서 두 칸 당을 지었다.'- 인용문 서두의 창동은 청년같은 소년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괴산임에도 불구하고 청당(청안현) 태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다소 이채롭다. 백곡은 이렇게 완성된 취묵당을 통해 멀고 가까운 곳의 경치를 확보했고, 이에 크게 만족해 했다. '성불산이 잇달아 솟아 있는 것, 남녘과 동녘까지 이어진 교외, 이탄 광탄의 급류, 물가에 늘어선 나무, 어촌마을이 벌려 있는 것, 구름이 일어나고 새가 날아가는 것, 고리가 노릴고 사람이 다니는 것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니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기쁘기가 예쁜 선녀가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만 같은 뿐만 아니다.'- 김득신은 처음에는 괴강으로의 낙향 생활에 불안함을 보였으나 얼마안가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으면서 일대 근·원경을 소재로
문법과 발음으로 봤을 때 넓은 의미의 사투리인 '청주 지역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서원대 배영환 교수가 최근 '청주지역어의 문법적 특징' 논문을 국문학논집 제 22집에 발표, 학계는 물론 일반의 주목을 받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지금까지 충청도 사투리는 △느리고 길게 빼는 '~했어유' 체 △대답할 때의 '야!' 정도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배교수의 조사 결과, 공간적 범위가 한층 좁아진 청주지역에도 독립적이고 확연히 구분되는 '청주 지역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청주 지역어의 개념을 '청주 토박이가 오래도록 써오던 말'로 규정했다. 논문에 의하면 청주 지역어의 방언적 특징은 각종 조사와 종결어미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의 예로는 ①목적격 조사 '을/를'을 '얼/럴'로 발음하는 경우, ②보조조사 '은/는'을 '언/넌'으로 발음하는 사례, ③여격조사 '한테'를 '한티', '헌테', '하테' 로 발음하는 경우, ④처격조사 '에/에서'를 '이/이서' 등으로 발음하는 사례 등이 있다. 이밖에 ⑤도구격 조사 '으로'를 '이루', ⑥보조조사 '밖에'를 '배끼', ⑦'부터'를 '부텀', ⑧'마다'를 '마두'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김득신의 문집인 백곡집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만날 수 있다. '괴강에 머문 지 4년이 넘는데, 철에 따라 경물로 시를 지으니 시주머니가 넉넉하네'(槐江泥滯四年强 時物供詩富錦囊). '명성을 다투고 이익을 탐함은 내 일이 아니니, 괴강에 돌아가 모래밭에 앉아 낚시질하리'(爭名貪利非吾事 歸去槐江坐釣沙).그는 취묵당 주변의 괴강가 일대를 철따라 다양하게 시의 소재를 얻을 수 있는 공간, 명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는 곳 등으로 표현했다. 다음 시도 백곡이 괴강가를 봄날의 흥취에 마음껏 젖을 수 있는 곳, 또 뒷산이 되는 개향산을 빼어난 명승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괴협에 봄기운이 돌아 홀로 돌아오니, 시골 흥취가 느긋하여 막을 수 없네'(春生槐峽獨歸來 野興悠悠不可哉). '꿈 속의 넋이 또한 개향산의 빼어남을 알아, 울긋불긋한 벼량을 밤마다 올라가네'(夢魂亦識香山勝 翠壁丹厓夜登). 그러나 김득신이 처음부터 괴강가 일대를 마음의 안주처로 흡족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취묵당과 초당을 지어 은거를 시작한 뒤에도 벼슬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했음이 그의 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출처는 모두 백곡집이다. '이 몸이 어찌
사적 제 317호인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사지 석실(石室)이 창건 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해체·보수된다. 이에따라 미륵리사지의 상징적인 문화재이자 보물 제 96호인 석조여래입상을 당분간 볼 수 없게 됐다. 23일 충주시는 38억원(국비 26억)의 예산을 들여 금년부터 오는 2016년까지 7백20일 동안 미륵리사지 석실을 전면 해체·보수하고 일대를 부분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풍화가 심해 박리현상과 균열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면석들은 세척 후 보존처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충주시는 '석실을 3면에서 구성하고 있는 면석 전체 공간은 119㎥에 달한다'며 '일대가 작업장이 되는 만큼 석조여래입상에 보호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밖에 개개의 면석들은 △암석상태 조사 △세척작업 △풍화억제처리 등의 과정을 거쳐 보존력을 더욱 높이게 된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화강암 특유의 박리현상과 하중으로 압력균열로 인해 미륵리사지 석실 전체가 구조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고,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해 왔다. 미륵리사지 석실을 구성하고 있는 화강암(백악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파껍질처럼 떨어져 나가는 암석 특징을 지니고 있
김득신은 여러 정황상 목천현 백전(栢田·지금의 천안신 병천면 가전리)에서 태어나 20대까지 보냈고, 그 이후는 한양에서 생활한 것으로 여겨진다. '병자피난초작'(丙子避難初作)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난리통에 한 번 서울 집 떠나온 뒤로 / 홀로 깊은 시름 안은 채 삼처럼 어지럽구나 / 깊은 골짜기 쌓인 음기에 봄이 더디니 / 작은 매화가 추위에 움츠려 피지 못하네 /.../ 홀로 하늘가 한 구석에 떠도는 이 내 신세 / 병란에 소식 끊기어 깊은 시름만 안고 있네 / 두 장모와 최모 박모 친구들 잘 있는지 / 서로 만난다면 한스러움 금방 그칠텐데 /.../'- 김득신은 그의 나이 32살 때 병자호란(1636년)을 만나 영남지역으로 피난했다. 이 시는 그때 지은 흔치 않은 장시(長詩)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뒤에 이어진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그해 겨울 영남지방에 눈이 무척 많이 왔음을 알 수 있다. '듬성한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종소리 / 푸른 절벽에 기댄 절간이 있나보다 / 아이놈과 함께 찾아가려 하지만 / 봄눈이 너무 많이 쌓였으니 어이하리 / 멀리 서울서 온 나그네 / 이별의 정한 가누기 어렵구나 / 이 산 어디에서 봄빛을 찾을꼬 / 찬 골짝
하사용 씨는 1930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의 미호천 제방 옆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일대를 애장터 또는 떼집거리 등으로 불렸다. 지명 그대로 일대는 버려진 황무지에 집 없는 사람들이 움막이나 떼집을 짓고 기거하던 빈민촌이었다. 하 씨의 사진에 움막집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움막집은 말이 집이지 방바닥은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깔았고, 흙이 덕지덕지 붙여진 벽틈에로는 빈대들이 낮에도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씨는 부모를 졸라 어렵게 강외보통학교에 들어갔지만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밀린 월사금(수업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학력은 여기서 멈췄다.경찰지서 소사에 넝마주의까지 그런 사용은 10살 되던 해 이웃 아저씨의 배려로 면단위 경찰지서인 주재소의 소사(심부름꾼)로 취직했으나 이것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의 배고픔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족과 자신의 연명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는 이번에는 넝마주이를 했다. 그 시절에는 버리는 것이 많지 않아 주워 모을 것도 별반 없었다. 마을 어귀를 돌고, 조치원 읍내를 돌아다니며 종이, 철사, 유리조각, 헌 고무신, 버려진 기저귀 등 고물을 빈 자루에 주워 모아 고물상
지난 2012년 경북 고령에서 괴산 문광면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묘지(墓誌·혹은 묘지명)와 철릭 등 이문건(李文楗·1494-1567) 부부묘 출토유물이 대거 충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0일 성주이씨 묵재공파 문중에 따르면 충북도는 최근 이들을 포함해 이장하는 과정에서 함께 출토된 백자 항아리, 여모(여성용 모자), 세조대(細條帶) 등 전체 5건 10점의 유물을 도유형문화재 제 360호로 일괄 지정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문건가 족보는 도유형문화재 제 361호 지정했다. 앞서 본보는 지난 2012년 7월 2일자 기사에서 '괴산 성주이씨 문중이 이장 중에 발견된 묘지명과 철릭 등 관련 유물을 보관상 어려움을 느껴 충북대에 기탁했다'고 보도, 관련 유물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바 있다. 이번에 지정된 23x17㎝ 크기의 묘지명 6편은 흔치 않게 남편(묵재 이문건)이 아내(안동김씨·?-1566)를 위해 직접 명문을 쓰고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먼저 간 부인을 생각하는 애뜻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묘지명은 망자의 덕과 공로를 글로 새긴 후 묘지에 넣은 것으로, 전통시대 남편이 아내를 위해 직접 글을 쓴 사례는 고려문신 최루백(崔婁伯·?~1205)이
백곡 김득신은 괴강이 내려다보이는 개향산 언덕에 취묵당을 건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활공간인 초당(草堂)을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풀 草' 자에서 보듯 이때의 집은 사대부가의 격식을 갖춘 것이 아닌, 작고 허름한 초가로 여겨진다. 김득신이 초당과 관련해 남긴 글은 당시 괴산지역 공간과 자연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먼저 그가 남긴 '초당서'에는 광탄, 방간야, 성불산, 한림, 장군 등의 명사가 등장한다. '성황당 서쪽 광탄 북쪽의 方干野(방간야)와 더불어 성불산이 펼쳐진 곳에는 언덕이 쓸쓸하지만 한림의 옛집이 있고, 남은 터가 활량하지만 장군의 옛 자취를 알 수 있는데 사람이 사는 연기는 끊어졌지만 풍월은 여전히 남아 있다. 주인은 천석고황(泉石膏亡+月)과 운림질고(雲林疾痼)가 있어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붉은 먼지를 떠나니 초헌과 면류관에는 관심이 없고 강호에 백발을 비추며 낚시질함이 소원이다.'- 인용문 중 '한림'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부친 김치, '장군'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조부 김시민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성불산은 현재도 유통되는 지명으로 괴산 서쪽의 해발 530m 산을 지칭하고 있다. 근래 현 임각수 괴산군
누정의 본래 기능은 취경(取景), 즉 경치를 모으는데 있다. 때문에 전통 누정은 방이 없는 대신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 듯이 탁 트였다. 누정에는 주인의 의도에 따라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의 이름이 붙으나 그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 누정의 명칭은 자연, 동식물, 사람 호칭, 역사적인 사건 등과 관련된 것이 많다. 우리고장을 위주로 예를 들면,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의 금호루(錦湖樓)는 금강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물과 관련된 누정 명칭으로는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의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민욱(閔昱·1559-1625)은 이곳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뜻에서 '관어대'로 이름지었다.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의 가학루(駕鶴樓)는 누각이 학의 날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전되고 있다. 추풍령 정상에서 승용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언덕 위의 전통건물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학루다. 사람 호칭과 관련된 누정으로는 애한정(愛閑亭)과 백석정(白石亭)이 있다. 괴산읍 검승리에 위치하고 있는 애한정은 조선 현종 때 괴산군수였던 황세구(黃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위치한 어재연(魚在淵·1823∼1871), 어재순(魚在淳·1826∼1871) 형제의 묘가 충북도 기념물로 지정 예고됐다. 도문화재위원회는 현장답사 후 최근 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예고 30일 동안 뚜렷한 결격 사유가 발생하지 않으면 도기념물로 확정된다. 미국은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널셔면호 사건(1866)에 대한 응징과 조선을 개방할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했다. 이른바 신미양요다. 미군은 조선과의 평화협정이 결렬되자 그해 6월 10일(음력 4월 23일) 콜로라도호 등 군함 2척에 승선된 전투대원 6백여명을 앞세우고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역사상 조미간에 발생한 최초의 전쟁이다. 미군은 여세를 몰아 이튿날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령했고,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점령 작전에 나섰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백여명이 배치돼 있었다. 어재연은 광성보 전투가 있기 8일 전인 6월 3일(음력 4월 16일) 진무중군에 임명돼 현지에 부임했다. 미군이 점차 다가오자 광성보에는 초대형 '수자기'(帥字旗)가 내걸렸고, 이것은 결사항전을 의미했다. 당시 집권자 흥선대원군은 개방과
김득신은 현종 3년(1662)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대과 합격생에 걸맞는 직책을 갖지 못하고 성균관 학유(學諭)라는 한직에 임명됐다. 학유는 성균관 소속으로 각종 과거응시의 예비심사일을 처리했고, 태종 때부터는 성균관입학시험에 대한 예비심사도 하였다. 이같은 중요성 때문에 개국 때인 태조 연간에 처음 설치됐다. 학유는 보기에 따라 유생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리였다. 때문에 세종 때에는 문행(文行)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고 대간(臺諫)의 동의를 얻은 뒤 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유는 정치적인 권력이 발휘되는 관직은 아니었다. 김득신이 한직에 임명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정황상 회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현석(李玄錫)이라는 인물이 쓴 김득신의 묘갈명(비석문)을 보면 그는 이 즈음 우리고장 괴산의 괴강가로 낙향, 그 유명한 취묵당(醉默堂)을 짓는다. 현재 괴산읍 능촌리 김시만장군 사당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취묵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통칸마루에 사방 난간에 설치돼 있다. 지난 2007년 도문화재자료 제 61호로 지정됐다. 묘갈명 등을 참고하면 김득신은 괴강가 우거생활 중에 장령에 임명되나 이번
김득신(金得臣·1604∼1684)의 어릴적 이름은 '자공'(子公)이고, 호는 백곡(栢谷)이다. 백곡이라는 지명은 언뜻 김득신의 만년 우거공간이었던 괴산 어느 잣나무(栢) 골짜기(谷) 쯤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같은 이름인 진천 백곡을 떠올릴 수 있으나 두 곳 지명과는 무관하다. 김득신의 호 백곡은 목천현 백전(栢田) 마을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다. 백곡의 고조부 김석은 1519년 기묘사화 때 괴산으로 피신했다. 그후 증조부 김충갑이 서원에 유배되었다가 목천현 백전마을에 살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전장을 물려받아 그곳에 정착했다. 그는 목천에 거주하면서 선영이 있는 우리고장 괴산을 왕래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金緻)도 1901년부터 4년 동안 선영의 일 때문에 괴산 방하현(方下峴)에 머물렀던 것으로 나타난다. '취묵당일기'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선친이 괴산 방하연에 들어와 4년 동안 머물면서 묘지를 돌봤다.'(先君入槐州方下峴 留四年爲丘墓矣) 방하연은 백곡이 나중에 취묵당을 세운 괴산읍 능촌리 일대를 일컫는다. 김득신의 과거시험 준비는 생활터전이 있는 백곡에서 주로 이뤄졌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크게 소과와 대과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에 '돌곳'(石串·혹은 돌꼬지) 마을이 있다. 청주에서 조치원 방향의 우측 야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교통도 편리한 편하다. 그리고 충북선 열차가 동네 앞을 지나가고 있고, 더 서쪽으로 가면 미호천이다.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돌곳'은 지금은 부촌이 됐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의 경우 미호천의 범람으로 수해와 흉작이 계속되면서 50여 농가가 만주 등지로 이주했다. 따라서 주인없는 초가는 흉가로 변했고, 그런 초가지붕 위에 망초가 자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가난과 무지로 낙후된 이런 돌곳 마을에 21년간 객지생활을 하던 하상돈(河相惇·작고) 씨가 귀향했다. 그는 숙고 끝에 잠업(蠶業)을 발판삼아 고향 석화리를 부촌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그는 다섯 가지의 실천 가능한 안을 선정했다. 첫째, 미호천 연안 침수 지역에 상전조성. 둘째, 제대군인을 중심으로 한 청년 상조회 조직. 셋째, 정신개발과 주민 공동의식 제고를 위한 마을회관 전립. 넷째, 야산 개간으로 상전확장. 다섯째, 농가 지붕 개량사업 등 5개 사업계획을 정했다. 하씨는 먼저 마을 뒤에 위치한 선산 5정보를 개간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는
선조~숙종 연간을 산 인물인 김득신(金得臣·1604∼1684)은 조선 최고의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김득신이 말년을 보낸 괴산 괴강가의 취묵당(醉默堂)에는 그의 독서량을 기록한 '독서기'(讀書記) 편액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떤 책의 독서가 끝나면 그 횟수를 대나무에 새겨 기록으로 남겼다. 취묵당 독서기를 보면, 김득신의 사기의 백이전(伯夷傳)을 1억 1만 3천 번으로 가장 많이 읽었다. 반면 노자전(老子傳)·분왕(分王)·벽력금(霹靂琴)·주책(周策)이라는 책은 2만 번을 읽었다고 기록했다. 또 제책(齊策)·귀신장(鬼神章)·목가산기(木假山記)·중용서(中庸書)는 1만 8천 번, 송설존의서(送薛存義序)·송원수재서(送元秀才序)·백리해장(百里奚章)은 1만 5천 번을 읽었다. 이밖에 획린해(獲麟解)·사설(師說)·송고한상인서(送高閑上人序)·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承廳壁記) 등은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썼다. 이상의 글을 모두 합하면 36편이 된다 억이나 만 단위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나, 그가 조선 최고의 독서광이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독서 방법은 다독과 정독이었다. 그는 많이 읽기도 했지만 정독을 병행했다. 이런 김득신의 독서방법을 주위에서
증평읍 화성리 공장신축 예정 부지에서 환두대도, 단야구 등 백제 철제류와 통일신라 석실묘 등 다량의 유물과 유적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특히 백제 철제류는 수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종류가 다양, 고대 무기사와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10일 증평군에 따르면 호서문화연구원(원장 이규근)은 증평군 증평읍 화성리 37-2 공장신축 예정부지에서 지난 6월 중순부터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 이날 문화재청 관계자 등 전문가를 초청해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그 결과, 당시 최고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석곽묘에서 환두대도, 철모(鐵矛), 철제 낫, 철제 도끼(鐵斧), 철촉, 단야구(鍛冶具) 등 다량의 철제 무기류와 대장간 공구 등을 발굴했다. 삼국시대 백제 환두대도는 증평지역에서는 거의 처음 발견된 것으로,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최고 권력자임을 의미하고 있다. 청주지역에서는 삼국 이른 시기의 환두대도가 신동동고분과 오창 주성리에서 발견된 바 있다. 철모는 손에 쥐고 찌른다든가 던진다든가 하여 적을 죽이는데 사용하던 무기로, 청주 신봉동고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철제 낫은 낫 모양을 하고 있어 일단 낫 용도로 사용됐을것으로 추정되고 있
한자 '샘 泉'(천)은 바위에서 물이 자연스레 용출하는 모습을 상형화했다. 이에 비해 '우물 井'(정)은 물 긷는 시설의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인공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물과 관련된 표현으로 '시정'(市井)이 있다. 시정잡배(市井雜輩), 시정지민(市井之民) 등에서 그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시정잡배는 시장과 우물가에 모이는 사람의 무리, 시정지민은 시정을 찾은 백성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학자 이익도 '시정지민'이라는 표현에 호기심이 들었는지, 그 어문적인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시정이란 것은 농상(農商)의 천한 사람을 말한 것이니, 장사꾼은 저자를 주로 삼고, 농사꾼은 우물을 주로 삼는다. 그래서 시정지민(市井之民)이라 이른다."고 생각한다.'- 우물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조 혁거세 거서간(居西干) 5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으며, 여자 아이는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나 시조가 왕비로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위 내용대로라면 신화 속의 신라 왕실에는 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고장 증평에도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성을 지닌 우물이 있다. '말세우물'이
통합 청주시가 오늘(7월 1일) 역사적인 출범을 했다. 그러나 이번 출범은 청주·청원이 미군정의 어설픈 '통역행정'에 의해 분리된지 69년만에 재결합하는 것으로, 청주의 역사적인 정체성은 훨씬 더 올라간다. 통합 청주시의 새로운 출발을 맞아 지명 청주(淸州)의 최초 탄생 시기와 그 의미, 역사 속의 제 1호 청주시장 등을 살펴본다. 이밖에 고려, 조선 등 전통시대 '청주목'의 강역은 지금의 통합 청주시보다 훨씬 넓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알래스카와 같은 월경지(越境地)가 지금의 대전광역시와 세종특별시에도 존재했다. 그 이유와 배경을 살펴본다.◇지명 '청주'(淸州)의 최초 탄생 시기와 그 의미 지명 청주가 역사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074년 전인 고려 태조 23년 때였다. 태조 왕건은 어떤 의도에서 인지 상당현(백제)-서원경(통일신라)으로 이어지던 지명을 '청주'로 개명했다. '청주목(淸州牧)은 원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인데 신라 신문왕 5년에 처음으로 서원 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은 서원경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23년에 청주로 고쳤고…'-. 원문은 '淸州牧 本百濟上黨縣新羅神文王五年 初置西原小京景德王陞西原京 太祖二十三年 改爲淸州'로 돼 있다.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에 위치한 초정약수(椒井藥水)는 랴듐 성분이 다량 함유된 천연탄산수로 하루 용출량이 약 8,500l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화학적으로는 낮은 pH(5.0∼5.8), 높은 이산화탄소 함량 등의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초정약수는 대략 5단계를 거쳐 땅위로 용출하게 된다.흐름을 살펴보면 '마그마 기원 CO₂'→'압력이 낮은 곳으로 이동'→'지하 심층수와 만나면서 용해·탄산수 형성'→'화강암과 반응하면서 각종 광물질 용해'→'지표수와 일정정도 혼합'→'땅위나 관정으로 용출'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초정약수는 보통 지하수와 달리 이같은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높은 이산화탄소 분압,높은 산화조건, 낮은 PH,높은 총용존고체함량(이온함량) 등의 지화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높은 이산화탄소 분압이 입안에서는 '톡 쏘는 느낌', 목욕 중에는 '따끔거리는 느낌'을 갖게 한다. 초정약수는 또 '알싸한 물맛'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의 정체는 철(Fe) 성분이다. 이산화탄소와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탄산수는 다음 단계로 암석층(초정은 화강암)과 반응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암석의 철 성분이 물속으로 녹아들면서 '알싸한 물맛'을 나타내게 된다. 초정약수(椒井藥水
청원군이 2014년 6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가운데 그 전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문의군청이 사진 형태로 처음 발견됐다. 충북대 신영우(사학과) 교수가 이끄는 사료 조사팀은 얼마전 진천 평산신씨 고전적류 등을 살펴보던 중 해당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에는 일제 관료와 내국인 등 총 20여명이 등장하는 가운데 우측 하단에 '文義郡廳'과 함께 촬영 날짜를 의미하는 '44.4.15'의 스탬프 숫자가 찍혀 있다. 건물 기둥에도 '文義郡廳' 현판이 걸려 있다. 따라서 사진은 메이지(明治·1852~1912) 44년, 즉 1911년에 촬영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의군은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었으나, 1914년 이른바 일제의 부군폐합 조치에 따라 청주에 병합된 바 있다. 당시 일제하의 충북도는 △ 보은군과 회인군을 합병하는문제 △ 문의군을 청주군에 합병하고 청주군 내에 청주면을 분할하여 괴산, 청안, 연풍 3군에 합병한 후 신규의 군으로 합하는 문제 △ 음성군 진천군은 이를 합병하지 않고 현재 대로 존치하는 문제 등을 중앙으로 올렸고 이는 그대로 확정,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일제강점 초기의 사진은 그보다 3년 전에 찍은 것이나 촬영장소는 향
[충북일보] 충주 사과 과수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15일 충주시에 따르면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전체 매몰 작업에 착수했다. 과수화상병 예찰을 진행하던 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5일 해당 과수원에서 잎맥이 타들어 가는 증상을 발견했다. 농촌진흥청의 정밀검사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이 나온 14일 시는 3천900㎡ 과수원 전체를 매몰하기로 하고 나무뽑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난 사과나무는 전체 327그루 중 홍로와 양광 등 36그루다. 관련 매뉴얼은 과수화상병 발생 주율이 10%를 넘으면 전체 매몰을, 5% 미만이면 발생 가지만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과수원은 과거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선례가 없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이 과수원에서 1.2㎞ 떨어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바 있다. 충주 사과 발생농가 해당 반경 안엔 사과·배 농가 304곳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수화상병 발생 과수원에는 현재 외부인 출입이 차단됐다. 올해 첫 과수화상병이 발생함에 따라 농촌진흥청은 위기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관심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30대 여성이 새내기 경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청주청원경찰서 율량지구대 이의성(31) 순경. 15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5시 40분께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한 호텔에서 '공황장애가 있는 여성이 귀가를 못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와 공동대응 요청을 받아 출동한 이 순경과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 A씨의 귀가를 돕던 중 갑자기 A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여성은 과호흡을 하다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고 호흡을 멈추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 순경은 A씨의 기도를 확보하고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이 순경은 동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119 구조 요청을 했고 그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쓰러진 A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후 A씨는 구급대에 인계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경은 "실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본건 처음이었다"며 "혹시나 잘못될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과거 적십자에서 CPR 교육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응급 처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보은·옥천·영동·괴산 국민의힘 박덕흠 "우리 동남 4군 군민의 응원과 지지 덕분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 같습니다. 박덕흠을 4선 중진으로 키워준 보은·옥천·영동·괴산군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슴 깊이 담아 앞으로 지역 발전과 좋은 의정활동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4선 중진 의원의 역할과 책무를 고민하며 지역 발전의 세세한 방안을 구상 중인 국민의힘 박덕흠(70)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 운동 기간 약속했던 공약 이행을 통해 지역구인 보은·옥천·영동·괴산군의 발전을 앞당기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선거 운동 전 여론조사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한 후보와 지지율이 1%P로 좁혀지면서 초접전 양상을 띠었고, 갈수록 고소 고발도 난무했다.박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달라"며 진심의 정치를 내세웠다. 이 결과 박 당선인은 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정계 인사들은 동남 4군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개혁보다 지역 발전을 우선시하고 힘 있는 4선 국회의원을 선택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