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식(辛卿植) 전의원은 1938년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 125-9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주고(1957년)와 고려대(1963년)를 졸업했고, 1963년 대한일보에 입사해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1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주일특파원, 주월남특파원, 정치부기자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73년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의 수석비서관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두 번 낙선한 끝에 청주 청원에서 13대(1988~1992·민정당), 14대(1992~1996·민자당), 15대(1996~2000·신한국당), 16대(2000~2004·한나라당) 의원에 내리 당선되는 등 4선 의원을 지냈다. 그는 4선의 의정생활 동안 문공위원장(1994)과 정부의 정무장관(1996), 그리고 한나라당 사무총장(1998)을 역임하는 등 국회, 당,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뿐만 아니라 정일권 국회의장, 김영삼 대통령, 이회창 대통령 후보 등 최고 정치지도자의 비서실장을 무려 다섯 번이나 맡는 등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1993년 3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의 초대 총재비서실장에 임명됐다. 그러자 당시 경향신문은 이런 인물평을 썼다. 짧은 글이지만 그의 정치
속리산 법주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은 팔상전(국보 제 55호)과 미륵대불이다. 팔상전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목탑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의 요청으로 1624년(인조 2)에 재건됐다. 조선은 유교가 국시였기 때문에 불교를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란기의 승려들은 호국사상으로 무장, 전국 곳곳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 따라서 임진 직후의 조선 조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불교계의 요청을 일시적으로 수용,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불사(佛事)가 많이 일어났다. 법주사 팔상전도 그런 배경하에 건립됐다. 이에 비해 법주사의 또다른 상징물인 미륵대불은 시간적으로 전통과 현대에 걸쳐 있는 묘한 조형물이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동불(銅佛)로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을 건립과는 과정에서 일주문 밖으로 반출, 당백전을 주조하는데 사용됐다. 법주사 미륵대불이 동불이자 실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17세기 선비 정시한(丁時翰·1625-1707)이 지은 '산중일기'에 잘 드러난다. "말을 달려올라 가보니, 법주사가 수정봉 아래에 있었다. 지대가 평평하였다. 제3문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7,8
법주사 사하촌은 분지 지형을 띄나 경작지는 넓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가난을 조금이라도 떨치기 위해 부업을 해야 했다. 대표적인 부업이 복조리였다. 사하촌 주민들은 9월이 되면 복조리의 주재료가 되는 산죽을 채취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채취된 산죽은 △하루쯤 말리기 △껍질 벗기기 △네 가닥으로 쪼갠 후 물에 담그기 등의 과정을 거쳐 복조리 재료로 사용됐다. 이때 여자와 아이는 바닥조리, 성인 남자는 '우기'와 '매끼틀기'를 주로 맡았다. '우기'는 바닥조리를 오므려서 묶는 것을, 매끼틀기는 복조리의 허리 부분으로 단단히 묶는 작업을 일컫는다. 복조리의 세는 단위는 '지리'로, 50개를 하나로 묶은 것을 말한다. 사하촌 주민들은 이 복조리를 '지리' 단위로 묶어 보은은 물론 청주, 상주장까지 내다팔았다. 속리산 사하촌 주민들이 두 번째로 많이 한 부업은 도리깨의 '노리'(아들) 만들기였다. 도리깨는 크게 손잡이 막대, 노리, 꼭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노리'는 보은지방 사투리로 표준어는 '휘추리'다. 복조리 제작이 끝나면 영농철 전까지 사하촌 주민들에게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찾아왔다. 주민들은 이때 봄부업으로 도리깨를 많이 만들었
미호천은 음성, 진천, 청원을 통과하면서 그 유역을 충북 최대의 곡창지대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수계 주변에 구릉지대가 발달, 가뭄이 자주 찾아왔다. 미호천 유역을 수리안전답으로 바꾸기 위한 역대 정부의 시도는 △초평저수지 건설공사(일명 청미수리조합 사업) △미호천Ⅰ지구 서업 △미호천Ⅱ지구 사업 등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청미수리조합, 초평저수지를 초축하다 초평저수지는 미호천 중류인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초평저수지의 축조공사는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됐다. 그러나 미군정기에 재착공을 하는 등 시국의 변화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58년 완공됐다. 당시 언론이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청미수리조합에서는 총공비 3억2천만원의 거액을 들여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에 남한에서 제일 큰 저수지를 착수하였는데 우선 연락도로 수로간선공사 기공식을 지난 26일 오후 1시 현장에서 공사담당자와 관계 군민이 다수 참석한 아래 성대하게 거행하였는데 준공은 명월이라 하며 이 공사가 끝나면 몽리(蒙利)면적이 1천7백 정보이고 혜택을 입을 농민수는 3천호라 하며 이로 말미암아 1년에 정곡(精穀)으로 45만석이 증수될 것이라고 한다.'- 초평저수지 축조는 1940-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는 충북 불교의 종가로 속리산의 상당한 면적을 소유하고 있다. 법주사로는 종교시설로, 경제적 영리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주사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데는 역사적인 계기가 있다. 1464년 조선 제 7대 임금인 세조는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방문했고, 이때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대규모 토지를 복천암에 하사했다. '임금이 속리사와 복천암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에 쌀 3백석, 종 30명, 논밭 2백결을, 속리사에 쌀과 콩을 아울러 30석 하사하고 신시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인용문 중에 '2백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결'(結)은 우리나라 전통시대 토지단위의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이 '결'(結)은 엄밀히 말하면 면적이 아닌 수확량을 기준으로 한 토지단위다. 세조의 아버지 세종은 토질의 비옥도에 따라서는 6등급, 그해 풍흉에 따라서는 9등급으로 분류하는 이른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을 처음 도입·실시했다. 이때 전분6등법상의 1결 면적은 1등전과 6등전이 대략 3분의 2대 1 정도가 됐다. 즉 비옥도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하등전으로 갈수록 1결의 면적이 넒어지게 된다. 비
속리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은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舍乃里)다. 지명 사내리에 대해서는 △'절 안'의 뜻이 한자화됐다 △원래 '사내골' 뒤쪽에 '사내사'라는 절이 있었다 △집이 쭉 이어졌기 때문에 '집 舍'(사), '이에 乃'(내) 자를 써서 '사내리'라고 했다 등의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법주사 사하촌인 사내리 지명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1759년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사내리를 '사내동리'(舍乃洞里)로 표기했다. 그리고 '관아에서 동쪽으로 30리이다. 호적에 편성된 민호는 28호이다. 남자가 45이며, 여자는 49명이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충청도읍지(1840년대)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30리, 호수는 31호, 남자는 69명, 여자는 52명이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18세기 중반부터 자연마을이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사내리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는 '동래 정'(鄭) 씨로 현재 7~8대 정도가 내려오고 있다. 법주사 사하촌 6.25 때 급격한 인구 변화를 겪었다. 조선후기가 되자 빈부의 차이가 너무 벌어지면서 이땅의 민초들은 지팡이 하나 꽂을 땅을 갖지 못했다. 그
왜 이른 시기 백제 사람들은 검은색 겉표면에 광택이 나는 이른바 '백제흑색마연토기'(일명 백제 간토기)라는 것을 만들었을까.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남상원 씨의 석사논문 '백제 흑색마연토기 연구'(지도교수 성정용)가 이같은 궁금증에 나름의 견해를 제시, 지역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백제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는 청주, 진천 지역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지역적인 관심을 끌었던 초기철기시대를 전후로 한 토기이다. 남씨의 논문에 따르면 백제흑색마연토기는 △편평한 표면 △흑색내지 암회색의 광택 △표면과 다른 회백색의 토기 내부 △일부 음각 선문양 등의 외관을 지니면서 다른 지역 마연토기와 분명히 구분되고 있다. 백제흑색마연토기는 이같은 특징으로 인해 백제의 성립시기, 각종 유구·유물 편년, 백제의 중앙집권화, 마한의 강역 등 초기 백제사를 연구하는데 핵심적인 유물이 돼 왔다. 그러나 이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토기 표현이 어떻게 해서 검은색을 나타내게 됐는지 △또 표면을 왜 갈았는지(마연)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논문은 전자에 대해 "토기 표면에 탄소가 주된 성분인 그을음을 입히는 방법으로 검은색을 냈다"며 "여기에는 생솔가지를 태워 그을음을 얻는일명 꺼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의 내용이 본보가 지난해 기사로 지적한 내용을 상당부분 수용, 1년만에 크게 수정됐다. 2010년 11월에 총 3억원의 사업비로 건립된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은 청주시 상당공원내 60여㎡ 터에 건립돼 있다. 본보는 지난해 '4.19 혁명과 관련된 충북 최초의 시위는 청주지역 학생들이 아닌, 충주고 학생들에 의해 충주지역에서 처음 일어났다'(4월 18일자 1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따라서 기념탑 명칭을 '충북 4.19학생혁명 기념탑' 대신 '청주 4.19학생혁명 기념탑'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충주고 학생들의 시위 내용도 명문화해야 한다고 기사화한 바 있다. 이에 충북도는 충북 4.19기념사업회(회장 김현수)와 당시 충주고 학생 간부 등과 협의 과정을 거쳐 기념탑 건립 취지문의 내용을 대폭 수정, 얼마전 오석 교체 공사를 완료했다. 충북 4.19기념사업회는 지난 2010년 충북도, 충청북도교육청, 청주시로부터 각 1억원씩 총 3억원을 지원받아 지금의 기념탑을 건립한 바 있다. 문제가 됐던 수정 전의 기념탑 건립 취지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청주에서도 4월 18일과 19일 양일에 청주대학교를 비롯한 청주공고·청주
1920년대 충북도지사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법주사 여승 성폭행 사건과 관련, 당시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로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1925년 3월 31일이다. 박주중양과 동아일보 사이에 당연히 악연이 싹트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국가의 공복이자 지방장관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판단했는지 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칼럼난은 박중양의 법주사 여승 성폭행이 속리산 법주사에서 일어난 것을 빗대 아예 그를 속세의 아전이라는 뜻인 '속리(俗吏), 그리고 '군'이라고 불렀다. '충북지사 박중양은 도처에서 속리(俗吏)의 본색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 속리 박중양 군이여. 관찰사의 권위도 장하고 명승지 유람도 좋은 일이지만 다수한 농민을 실사아사(失時餓死)케 하고 또한 범형치사(犯刑 致死)케 하는 것이 군의 당행할 직무인가. 그리하고도 일선융화만 창도하고 총독부 당국의 환심만 사면 만사가 태평이란 말이지.'- 인용문 중 '명승지 유람'은 화양동 등 괴산지역을 1주일 유람하고 돌아온 것을 지칭한다. 그리고 '농민을 실사아사하고 범형치사케'는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하기 위해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보
▲장준식(충청대학교 박물관장)씨 빙부상·김경인(충북문화재단 이사)씨 부친상= 발인 18일(금) 오전 8시 충주의료원 장례식장 특 1호실. ☏(043) 871-0444.
일본식 이름이 호추시게요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일제강점 기간인 1920년대 충북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산수유람 편의를 위해 속리산 말티고개를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확장을 지시한 것은 1923년 6월 중순이었다. 말티고개는 그로부터 1개월후 오솔길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박중양이 1년 후인 1924년 11월 초순 속리산 법주사를 다시 찾았다. 그는 그 이전에 화양동 등 괴산지역 명승지를 1주일간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올 정도로 유람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이 장기 유람을 관행으로 여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박중양은 개인의 만족을 위해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박중양의 이날 법주사 방문에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일부 공무원, 그리고 신문기자 등이 동행했다. 사이토 마사토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1927년 동안 제 3대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통치 스타일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꿨고, 이때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변절했다. 일행은 젊고 예쁜 비구니(여승)를 불러앉힌 후 밤늦도록 주연을 가졌다. '일행 열여섯 명이 보은읍을 지나 오후 다섯시 삼십분
'다시, 사람이 하늘이다.…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지역에서는 흔치 않는 4주 연속의 동학농민혁명 특별기념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충북학아카데미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이번 특별 강좌는 금년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지 2갑(120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미 지난 10일에는 한양대 김용휘 교수가 등단, '동학과 현대적 의미'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김 교수는 이 자리에서 "창시자 최제우가 '개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동학을 중심으로 문명의 대전환을 열고자 했기 때문"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학문이자 종교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동학은 내면에서 신성(하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문명적 원리로 삼고자 했다"며 "동학이 21세기 대안종교의 하나로 더욱 우뚝 서려면 사회 참여적 역량을 보다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오는 23일에는 충북대 신영우(사학과) 교수가 등단, '한국근대사와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적 성찰' 제목의 특강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특히 신 교수는 이날 일본을 집적 방문해 찍은 현장 사진을 대거 공개할 예정으로, 동학에 대한 지적 갈등을 푸는데 그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말티고개는 보은에서 약7㎞ 지점에 있는 속리산 입구의 첫 고개로 높이는 430m다. 현존하는 흑백사진을 보면 말티고개는 일제 강점기까지 오솔길 정도의 모습으로 그 폭이 좁았다. 고개 굽이가 워낙 많고 험하다 보니 선형 개선은 물론 노폭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대형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인물은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이다. 이것에서 보듯 그는 친일행각이 뚜렷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념적 친일파라는 사학자들의 평가가 따라 다니고 있다. 박중양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직과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그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1923년 2월 24일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말티고개를 확장하는 토목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것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는 유람을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부임 2달 후인 192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는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온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속리산 복천암에서 온양으로 가려면 말티고개 외에 차의현(車衣峴, 혹은 차의치), 묵현(墨峴), 누치(漏峙) 등을 경유해야 한다. 차의현의 지금 지명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수리티재'다. 해발 3백여m의 수리티재는 보은 수한면 차정리와 회인면 건천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국도 25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차의현은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과의 경계이다"라는 적어놨다. 이밖에 해동지도는 '차의치(車衣峙)', 여지도서와 대동여지도는 '차의현', 일제 강점기 지리지인 '조선지지자료는 '차령(車嶺)'으로 기록했다. 이상에서 보듯 전통시대 지명에는 '차의'(車衣) 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왜 그런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수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차의(車衣)'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묵현'이 지금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지도는 '묵령'(墨嶺)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황상 문의 마장이에서 회인 중앙리 저자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먹티'가 확실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회인현 산천조에서 '목감산 고을 서쪽 5리에 있
세조는 1464년 속리사와 복천암을 둘러본 후 온양행궁을 가기 위해 다시 북향을 시작했다. 조선시대 '공로'(公路)를 기준으로 했을 때 보은에서 온양을 가는 코스는 2가지가 존재했다. 조선시대 공로는 현(縣)과 현을 연결시켜 주던 도로로, △국가 문서 전달 △조세수납 △관찰사 순력 때 주로 이용됐다. 이에 비해 사로(私路)는 장돌뱅이들이 지름길로 가기위해 주로 개척했다. 먼저 보은에서 온양에 이르는 방법은 보은-회인-청주-천안-온양의 루트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루트는 보은-회인-문의-연기-전의-온양 이다. 세조의 어가는 이중 후자를 택했다. 왔던 길을 피하기 위한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보은 속리산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가 하루 뒤 문의현에 도착했다. 세조실록은 이에 대해 '어가가 문의현(文義縣)에 머물렀다'(10년 2월 29일자)라고 짥막하게 적었다. 세조의 어가는 계속 북서진을 해 다음날 전의현에 도착했다. '어가가 전의현에 이르니, 예조판서 박원형(朴元亨)이 사신 원접사로서 와서 하직하였다.'- 인용문 중 다소 생소한 용어인 '원접사'는 중국의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던 임시 벼슬을 말한다. 세조가 순행 중에도 국사를 처리했음을
조선 전기의 우리고장 영동 출신의 김훈이라는 인물은 아내 여흥이씨와 사이에 김수성(金守省), 김수경(金守經), 김수온(金守溫), 김수화(金守和) 그리고 딸 1명 등 4남 1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김수성이 출가해 속리산 복천암 주지를 지낸 신미(信眉) 대사이고, 김수온은 식우집(拭·集)을 남기는 등 조선전기의 대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신미대사의 첫째 동생인 수경도 벼슬이 낮지 않았다. 먼저 우리고장 보은현감을 역임했다. '신미가, 임금이 부처를 받들어 믿는 것을 의지하여 자주 짧은 편지로써 임금에게 통해 아뢰어, 아우·조카가 벼슬에 제수되어 뜻과 같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김수경이 보은현감으로서 벼슬에 초배(超拜)되니, 인망(人望)에 맞지 아니하여 물의가 자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충청도 수부읍의 하나인 청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가 영농철에 접어들었는지 성종은 김수경에게 민폐끼치는 행정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청주목사 김수경·영해 부사 김효급·예안현감 김귀지가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이제 바야흐로 농사가 시작되어 백성이 노고할 것이니, 폐해가 되는 일을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김수
단순한 고리 모양으로 하찮게 보이는 등자(金+登子·발걸이)가 세계 전쟁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고구려가 그 과정에서 등자문화가 유럽으로 전파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설도 함께 제기됐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만든, 안장에 달린 고리 모양의 철제 발 받침대를 말한다. 충북대 박물관(관장 성정용교수·고고미술사학과)이 주최한 제 20기 박물관대학의 올 3번째 강좌가 얼마전 열렸다. 이날 강좌에는 경희대학교 강인옥 교수가 '동토 위에 피어난 문명: 시베리아의 고대문화, 그리고 한국'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강교수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철제 등자를 가장 일찍 만들었고 잘 다룬 민족은 흉노족이다. 이런 등자는 단순해 보이지만 발을 말에 단단히 고정시키면서 기사가 말잔등 위에서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를 수 있는 등 제 2, 3의 연계 동작이 가능하도록 해준다. 기병(騎兵)이 궁수와 검술사를 겸하는 것이 이때부터 가능해 지면서, 고대의 전쟁하는 모습을 획기적으로 바뀌어 놓았다. 고구려가 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흉노의 등자제조 기술을 이른 시기에 수입할 수 있었
세조의 1464년 충청도 순행은 신미(信眉·1403-1479) 대사가 주지로 있는 속리산 복천암이 'U턴', 즉 반환점이 됐다. 그러나 당시 실록은 충청도 순행의 본래 목적이 온양행궁 거둥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임금이 온양(溫陽)에 행행(行幸)하고자 하여, 봉원부원군 정창손·예조 판서 박원형 (…) 공조 참판 강희맹을 수상(守相)으로 삼고…'- 그러나 세조는 곧바로 온양행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 속리산 복천암을 방문했다. 그렇다면 세조의 어가는 한양도성을 나서기 직전, 거둥 코스를 긴급히 바꿨거나 아니면 경호문제 등으로 인해 '연막'을 피운 것이 된다. 세조가 원래의 목적지를 한참 벗어나 복천암 신미대사를 만난 것은 둘 사이의 인간적인 친밀함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불교와 승려를 탄압했다, 심지어 도첩제라는 것을 실시, 승려의 도성 출입도 금지했다. 이런 환경에서 왕과 승려가 '서로 꼭 봐야 할 사이'가 됐다면 그 전에 뭔가 특수한 인연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 특수한 인연의 중간매체로 훈민정음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골수 중화주의자인 대신들의 반대가 뻔
청주향교는 5성과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우서(虞書·요순시대 지칭)의 12목(牧) 제도를 본받아 지방관들을 설치하였노니, 주나라의 국운이 8백년간 계속 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운이 장구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청주, 충주 등 전국 12목에 향교도 함께 설치되면서 중앙에서 경학박사가 파견됐다고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은 초정약수에 행차를 할 때 청주향교에 여러 권의 서적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 청주향교에 하사된 책은 통감절요, 통감훈의, 집성소학, 근사록, 통감강목, 성리군서, 사륜집 등 9권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5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청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때
포유류는 다람쥐, 파충류는 유혈목이, 양서류는 북방산개구리가 로드킬을 가장 많이 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도내 월악산과 속리산을 지나는 도로도 로드킬 발생빈도가 높은 등급에 속하나 저감시설을 한 후 빈도가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공원연구원이 얼마전 이같은 내용을 담은 '국립공원 야생동물 로드킬 저감대책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야생동물이 먹이 획득, 번식 등을 위해 서식지가 단절된 공간인 도로 위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로드킬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연구원은 이와 관련, 로드킬 저감대책을 세우기 위해 2006~2012 7년 동안 전국 16개 국립공원애 41개 도로노선을 모니터링했다. 그 결과, 이 기간 동안 포유류 2천74개체, 파충류 7백82개체, 양서류 2천2백30개체, 조류 3백51개체 등 총 5천5백37개체의 로드킬이 발생했다. 계절별로는 4월 1천1백37개체, 9월 6백67개체, 5월 7백17개체 등이 관찰돼 번식 전후와 월동 준비가 시작될 무렵에 로드킬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류별로 살펴보면 파충류는 다람쥐 59.8%, 청설모 9.4%, 너구리 7.2%, 족제비 4.0%, 멧토끼 3.8% 등으로, 다람
세조 어가는 1464년 2월 26일 청주를 출발하여 피반령(皮盤嶺·360m)을 넘어 회인에서 1박했다.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와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를 남북으로 잇는 피반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역사성이 오래 됐다. 세조 어가는 27일 보은 동평을 지나 병풍송에서 1박했다. 이때 복천암 주지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가 영접나와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떡을 대접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 어가는 그 다음날(28일) 충청도 순행의 맨 남쪽 꼭지점인 속리산 중턱의 복천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속리사(俗離寺)를 경유하기도 했다. '임금이 속리사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 30구, 전지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1'결'은 대략 3천평 정도로, 이날 복천암이 세조로부터 받은 전토는 60만평이나 됐다. 위 인용문은 눈여겨 볼
도내 일부 지방자치 단체장들의 치적 홍보가 도를 넘는 '자기 우상화' 수준이어서 빈축을 사고 있다. 19일 괴산군 등에 따르면 화암서원이 괴산읍 검승리로 이건(移建)한 이후 김문배 전 군수의 공덕비를 세워졌다. 당시 괴산지역 유림은 지난 2003~2006년 기간 동안 5억여원의 사업비를 들여 칠성면 송두리에 있던 화암서원을 괴강 건너편의 검승리 야산으로 이건했다. 이와 관련, 화암서원 이건은 혈세인 군비에 의한 것임에도 마치 김 전군수 개인의 지원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공덕비에 기록돼 있다. 화강암 오석 재질의 공덕비는 '김문배 괴산군수는 화암서원 이전신축과 향교서원 등 유교진흥에 업적을 많이 남긴 분이다'라고 시작한다.(편의상 한글로 표기) 그러나 비문 여러 곳에서 서원 이건사업과 전혀 무관한 개인을 우상화하는 표현이 다수 등장, 외지 방문객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 비문 중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문배 군수는 도량과 능력이 훌륭하며 괴산 명덕학교와 괴산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또 공덕비 중에는 '(도청) 사회복지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괴산군민의 여망에 의하여 제 38대 제 39대 괴산군수로 당선되어…'라는 내용도 보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3일 청주에 도착해 이틀간 머물렀다. 이때 세조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실록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유생, 창기의 노래 환영이 있었고, 104살의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시를 바친 것으로 나타난다. 세조는 그 노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노인에게 주육을 하사하였다.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나이 1백 4세이나 기력이 오히려 건장하므로 임금이 그 노인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포와 술 및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당시 세조의 어가를 호종, 경호군사를 총괄 지휘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이었다. 그는 경호군사들의 군기와 관련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청주도착 이틀째 되는 날 갑자기 인원 점검을 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순행과 관련해 가장 풍기문란적인 내용이 적발됐다. '이어 종친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발하게 하였더니, 의정부 사인 성윤문이 민가에 투숙하였고, 사대장 김처의가 군을 버리고 마을에 들어갔으며, 예조좌랑 이수남·이길보는 기녀를 데리고 민가에 투숙하였고, 또 충찬위 이세정은 술에 취하여 길가에 누워 있었다.'- 경호원들의 행동을 유형별로 요약하면 △민가 투숙 △기녀와 동침
경기도 고양시에 '가와지 볍씨 박물관'이 들러서면서 3개 지자체의 볍씨 전쟁이 한층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17일 고양시는 구 농경문화전시관을 새롭게 확대·단장한 '고양 가와지 볍씨 박물관'을 오는 19일 오후 2시 현장에서 개관한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개관은 이융조(전 충북대 교수)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이 지난 1990년대 가와지 지구에서 발굴한 볍씨를 토대로 건립되는 것이어서, 지역학계의 관심도 끌고 있다. 이와 관련 이 이사장은 미리 보낸 인삿말에서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에 따른 학술조사에서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학생들과 함께 선사시대 볍씨를 찾았다"며 "박태식 박사 등 식물학자의 분석 결과, 5천년전 재배 볍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가와지 볍씨는 한강문화권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문화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나아가 우리나라 벼종사가 청동기시대에 시작됐다는 종래 이론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고 밝혔다. 발굴 당시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관련 내용을 '5000년전 볍씨출토 한국' 제목의 7단 박스 크기로 보도, 자국의 벼농사 전파 경로와 연관시켜 커다란 관심을 나타낸 바 있다. 앞서 이 이사장은 지난해 고양시에서 열린 관련 학술회
속보= 청원군의 청석굴 관광 명소화 사업이 논란(본보 3월 17일자 1면)을 빚고 있는 가운데 옥화대 수계는 시조의 한 장르인 '육가'(六歌)의 발생지이고 또 '낙우당구곡'(樂愚堂九曲)도 설정되는 등 인문학의 보고인 것으로 알려졌다. 17일 국어학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문학사는 신라의 향가, 고려의 장가,조선의 시조 순으로 발전해 왔다. 이중 고려시대에 싹이 튼 시조는 조선시대 들어 작품이 2천여개에 달하는 질과 양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시조 중에는 '육가'(六歌)라는 장르가 존재했다. 이는 평시조 6개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형태로,16~17세기에 발달했다. 바로 이 육가가 탄생한 곳이 미원 경주이씨가 4대에 걸쳐 거주했던 청원군 미원면 일대의 옥화구곡 수계이다.(그림 참조) 성균관대 임형택(한문교육과) 명예교수의 논문 '17세기 전후 육가형식의 발전과 시조문학'과 괴산 중원대 이상주 씨의 '이득윤과 서계육가ㆍ옥화육가의 창작시대' 논문에 따르면 16~17세기 옥화대 일대에는 이별(李鼈), 이정(李淨), 이득윤(李得胤), 이홍유(李弘有) 등 경주이씨 4대가 연이어 살았다. 그리고 이들 4대는 시대순으로 '장육당육가'(이별), '풍계육가'(이정),'서
[충북일보] 충주 사과 과수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15일 충주시에 따르면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전체 매몰 작업에 착수했다. 과수화상병 예찰을 진행하던 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5일 해당 과수원에서 잎맥이 타들어 가는 증상을 발견했다. 농촌진흥청의 정밀검사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이 나온 14일 시는 3천900㎡ 과수원 전체를 매몰하기로 하고 나무뽑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난 사과나무는 전체 327그루 중 홍로와 양광 등 36그루다. 관련 매뉴얼은 과수화상병 발생 주율이 10%를 넘으면 전체 매몰을, 5% 미만이면 발생 가지만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과수원은 과거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선례가 없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이 과수원에서 1.2㎞ 떨어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바 있다. 충주 사과 발생농가 해당 반경 안엔 사과·배 농가 304곳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수화상병 발생 과수원에는 현재 외부인 출입이 차단됐다. 올해 첫 과수화상병이 발생함에 따라 농촌진흥청은 위기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관심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30대 여성이 새내기 경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청주청원경찰서 율량지구대 이의성(31) 순경. 15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5시 40분께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한 호텔에서 '공황장애가 있는 여성이 귀가를 못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와 공동대응 요청을 받아 출동한 이 순경과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 A씨의 귀가를 돕던 중 갑자기 A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여성은 과호흡을 하다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고 호흡을 멈추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 순경은 A씨의 기도를 확보하고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이 순경은 동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119 구조 요청을 했고 그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쓰러진 A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후 A씨는 구급대에 인계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경은 "실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본건 처음이었다"며 "혹시나 잘못될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과거 적십자에서 CPR 교육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응급 처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보은·옥천·영동·괴산 국민의힘 박덕흠 "우리 동남 4군 군민의 응원과 지지 덕분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 같습니다. 박덕흠을 4선 중진으로 키워준 보은·옥천·영동·괴산군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슴 깊이 담아 앞으로 지역 발전과 좋은 의정활동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4선 중진 의원의 역할과 책무를 고민하며 지역 발전의 세세한 방안을 구상 중인 국민의힘 박덕흠(70)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 운동 기간 약속했던 공약 이행을 통해 지역구인 보은·옥천·영동·괴산군의 발전을 앞당기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선거 운동 전 여론조사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한 후보와 지지율이 1%P로 좁혀지면서 초접전 양상을 띠었고, 갈수록 고소 고발도 난무했다.박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달라"며 진심의 정치를 내세웠다. 이 결과 박 당선인은 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정계 인사들은 동남 4군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개혁보다 지역 발전을 우선시하고 힘 있는 4선 국회의원을 선택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