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요소가 많이 남아 있는 수계공간에 높이 60m의 초대형 인공폭포가 건립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16일 청원군에 따르면 군은 43억원의 예산으로 이른바 '청석굴 관광명소화 사업'을 미원면 운암리 달천상류 지류에서 진행하고 있다. 사업 내용은 △암벽 정상의 정자 조성 △높이 60m 인공폭포 건립 △인공 돌다리 설치 △건너편 소형광장 조성 등이다. 그러나 공사가 추진되고 있는 청석굴(옥화 1경)은 지난 70년대 구석기 연모가 발견된 바 있고, 또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일종인 구곡이 설정됐던 공간 주변이어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이융조 전 충북대 교수는 지난 1970년대 중반 청석굴 내부에서 찍개, 긁개, 주먹대패, 찌르개 등을 발굴, 관련 내용을 '새로이 발견된 구석기 및 구석기 전통의 몇 예' 제목으로 백산학보 제 20집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관련 내용 28~29쪽) 이는 한반도 구석기인이 동굴유적인 청석굴 안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나, 이후 정밀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구곡연구 전문가인 괴산 중원대 이상주 박사에 따르면 청석굴은 조선중기 인물인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1553~1630)에 의해 설정된 옥화구곡
세종대왕 때 청주목 초수리 행궁을 건립한 사람은 김흔지(金人+完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세종의 어가보다 한달 먼저 초수리에 내려와 행궁 건립을 시작했다. 이때가 1444년(세종 26) 1월 27일이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內贍寺尹)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그의 이름은 같은 해 2차 초정약수 거둥 때(음력 7월 22일)도 등장한다. 이때는 행궁 건립이 아닌 기존 행궁의 수선이었다. '내섬시윤 김흔지를 청주에 보내어 초수 행궁(椒水行宮)을 수선하였다.'- 김흔지는 내섬시윤으로 출발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정2품)에 오를 정도로 행정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단종은 그가 졸하자 손수 관까지 내리기도 했다. '한성부윤 김혼지가 졸하니, 관곽(棺槨)과 부의로 종이 1백 권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수리 행궁은 그로부터 4년후인 1448년 3월 실화로 화염에 휩싸였고 범인은 하옥됐다. 세종은 이런 범인을 "지금 농삿달을 당하여 여러 날 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심히 불가하니'(세종실록 30년 5월 21일자)라며 석방토록 했다. 이후 초수리 행궁은 세종대왕
1464년 2월 22일 초수리(초정약수)를 떠난 세조의 어가는 다음날인 23일 청주에 도착했다. 초정약수~청주는 한나절 거리로 그렇게 먼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걸린 것은 세조가 중도에 사냥놀이를 하고 천변에서 신하들과 작은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면령(免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어서를 세자와 신숙주·홍윤성 등에게 내려서 이르기를, "내가 종훈 ·여러 장수와 더불어 적은 것을 베어서 나누어 마시는 것은…"'- 세조가 청주에 도착하자 사장이 쌀을 바치고, 창기들은 가요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사장'은 조선조 때 사창의 곡식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일컫는다.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사장(社長) 40여 인이 노상에서 향안(香案)을 베풀고 쌀 70말을 바쳤으며, 한 중이 목탁을 어가 앞에서 쳤으나 임금이 모두 다 이를 물리쳤다. 노인·유생(儒生)·창기(娼妓) 등이 가요(歌謠)를 바쳤다.'- 조선전기 청주목을 경유한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 모두 3명이다. 이 부분에서도 세 임금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자신 때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십만양병(十萬養兵)설'을 주장한 것은 그 대상이 왜적이 아니라 여진족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만 양병설= 임진왜란 대비용'으로 굳어진 것은 제자 김장생이 율곡의 행장을 사실과 다르게 서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함께 나왔다. 민덕기(사진) 청주대 교수가 호서사학회(회장 충남대 장인성 교수)에서 발간하는 '역사와 담론' 제 65집에 '임진왜란용이 되어버린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기고했다. 호사사학회는 충청권을 아우르는 역사학술 단체로 현재 2백여 회원과 기관이 가입돼 있다. 민교수에 따르면 율곡은 임진왜란 10년 전에 죽고, 또 전란을 예상하지 못하는 등 생전에 대일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 임진왜란 10년 전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직 일본열도를 장악하지 못했던 때로, 논리상 임진왜란을 예견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반면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은 여진족, 특히 니탕개(尼湯介) 난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 등 각종 개혁안을 잇따라 내놨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는 난을 일으켜 경원부를 함락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두만강 유역의 6진을 계속 공격하는 등 조선정국을 위기로
세조의 어가가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초정약수)에 당도한 것은 1464년 2월 21일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이날 진천~초수리 구간을 단 하룻만에 이동했다. 따라서 세조의 어가가 초수리에 도착한 시간을 늦은 오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의 어가를 맞은 당시 청주목사는 고태필(高台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465년 청주목사가 되어 정사를 엄정히 집행, 아전들은 그를 두려워 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여겼다.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가 글로써 아뢰기를, "청주 목사 고태필·온양 군사 이신효·임천 군사 박휘는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며 상세하고 공명하여,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안하니, 승직(陞職)할 만하고…"'- 초수리에 도착한 세조가 다음날 한 일은 사냥과 천변에서 가진 작은 술자리였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토령(吐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川邊)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민족의 기록문화 꽃으로, 국보 제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이런 조선왕조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의해 한글로 완역돼 있어, 일반인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부분은 번역상 적지 않은
상당산성의 숲길, 초정약수의 물길, 증평 율리의 들길로 이어지는 세종대왕 100리길에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100리길 안에 박물관 미술관 공방 휴양림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있을 뿐 아니라 마을별로 때묻지 않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세종대왕이 행궁을 짓고 한글 창제를 마무리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문화융성의 새로운 보고(寶庫)로 떠오르고 있다. 세종대왕 100리길은 청주시, 청원군, 증평군, 청주시문화재단이 지난해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와 농림부가 공동으로 공모한 지자체간 연계협력 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길을 뚫는 것이 아닌 역사·문화자원 특화 올레길이나 둘레길 등 전국에 길 열풍이 일면서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길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 100리길은 길을 뚫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길, 들길, 마을길 등 기존의 길 안에 있는 역사적인 가치와 문화관광 자원을 특화하고 콘텐츠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에따라 청주시문화재단은 세종대왕이 1444년에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요양하며 한글창제를 마무리하고 다양한 정책을 펼친 사실을 고증을 통해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청주시 문화산
세종과 세조는 20년 시차를 두고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러나 움직이는 속도는 달랐다고 밝힌 바 있다. 세종 어가는 한양도성~초정약수 구간을 닷새에 주파한데 비해, 세조의 어가는 하루 이른 사흘 걸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세조는 '오고'(五鼓)에 일어나 하루 거둥을 시작했다. '5고(鼓)에 어가(御駕)가 거둥하였는데, 어가 앞의 횃불이 혹은 꺼졌다가 혹은 밝아졌다가 하였으므로 횃불을 없애도록 명령하고…'-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종각의 북을 쳐서 통금의 시작과 해제를 알렸다. 이를 '파루(罷漏)라고 불렀고, 이를 어긴 자는 경수소(警守所) 곳에 구금하였다가 그 다음날 위반한 시간에 따라 곤장을 차등있게 때렸다. 이밖에 조선시대는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를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까지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다섯 마디의 시간을 각각 일고(一鼓)~오고(五鼓)라고 부르고, 그 숫자만큼 북을 쳤다. 다섯 단계의 맨 마지막인 '오고'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를 뜻했다. 한여름에 새벽 5시면 날이 훤하게 새나, 겨울철은 그렇지 않다. 음력 2월말도 많이 어두운 편이나, 세조의 어가는 그 시간에 거둥을 시작
'금년에는 광활한 북방 대륙이다.' 충북대 박물관(관장 성정용 교수·사진)이 올 제 20기를 맞아 1학기 '박물관 대학' 수강생을 모집한다. 특히 금년 박물관 대학은 제 20기를 맞아 한민족의 시원이 되는 북방의 공간에 초점, 어느 해보다도 흥미로우면서 지적 갈증을 풀 수 있는 강의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강의는 이달 6일의 '고대 알타이의 비밀'(정진헌 사회문화연구)를 시작으로 답사 3회를 포함 총 14차례 계획돼 있다. 이달 중하순에는 '중국 고대의 출토 문자자료'(김정열 숭실대 사학과), '동토 위에 피어난 문명'(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등이 있을 예정이다. 김교수 강의에는 갑골문과 청동기명문, 강교수 시간에는 시베리아 고대문화와 한반도와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다뤄지게 된다. 4월에는 '고조선과 북방민족'(박양진 충남대 고고학과), '칭기스칸의 나라'(송병구 단국대 몽골학과, '고구려 산성을 거닐다'(양시은 서울대 박물관) 등의 내용이 수강생에게 소개될 예정이다. 5월에는 '신라, 대륙으로 진출하다'(조윤재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몽골제국과 고려'(신호철 충북대 역사교육과), '중앙아사아 고대문화와 한반도'(장준희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등의 강
한양도성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는 사흘만에 우리고장 충청도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이 세조 어가를 맞이했다.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辛永孫)이 어가를 맞이하고, 절제사 권언이 군사를 거느리고 결진(結陣)하였는데, 군대의 장비가 매우 성하였다. 임금이 우상대장 김질에게 명하여 용천산(湧川山)에서 몰이하게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구경하였다.'- 세조실록은 신영손이 도계 어느 곳에서 세조의 어가를 영접했는지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천 광혜원에서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광혜원에는 충청도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인장을 주고 받는 교구정(交龜亭)이 존재했다. 당시 관찰사 인장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것을 교환했기 때문에 그 장소를 '교구정'이라고 불렀다. 경상도 교구정은 한양애서 봤을 때 그 초입에 해당하는 문경새재 동쪽 사면에 위치했고, 지금도 현존한다. 세조의 어가가 좀더 남행(南行)을 해 진천 광석(廣石)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진천 광석이 어느 곳인지는 지명 추적이 잘 안 되고
'그는 일본순사 2명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그 결과, 30대 중반의 청춘은 50살이 돼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뒤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없고, 법원 판결문 하나만 전해지고 있다.' 가 올 제 95주년 3.1절을 앞두고 국가기록원에서 항일의병 강수원(姜遂元·1873~?)에 대한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의 판결문을 입수, 지상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조선 말기의 의병활동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기(1905년) △통감부에 의한 차관정치가 시작된 정미칠조약기(1907년) 등으로 나눠지고 있다. 강수원은 이중 정미칠조약기에 활동한 의병으로, 출신지는 제천군 동면 흑석리였고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당시 일본인 검사 소야독차랑(小野篤次朗)에 의해 폭동 및 살인 혐의로 기소돼 1910년 4월 1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 법정에 섰다. 청주지부 법원은 검사의 기소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피고 강수원은 명치 40년(1907) 음력 7월 중 폭도 수괴 이강년의 부하가 되어 포군(砲軍)에 편입되어 화승총 1정을 받아 이후 각 곳을 배회하던 중 동월 14, 15일경 영춘군 읍내부근 방두리에서 이강녕의 명에 의해 동료 1
세종대왕은 눈병 치료를 목적으로 1444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조선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그로부터 20년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세조가 초정약수를 찾은 것 역시 치료 목적이었으나 병명은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가려운 증상의 피부병을 '아양'이라고 불렀다. 세조는 이 '아양' 치료를 위해 충청도 순행에 나섰다. 세조는 권력 찬탈 과정에서 조카 단종과 동복동생 안평·수양대군을 죽인 까닭에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가지가 저절로 올라갔다'는 정이품송 전설도 정통성 시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각종 야사도 세조가 얻은 피부병을 그의 정통성 시비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자신을 꾸짖었다. "네가 내 자식을 죽이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라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이후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이 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비명했고, 세조는 피부병을 얻었다.' 피부병 치료를 위한 세조의 충청도 순행은 1464년 1월 하순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정은 이와 관련한 '특별 경계령'을 충청병영에 내렸다. '충청도
옥천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규흥(金奎興·1872~1936)은 중국 망명생활 중에도 고향땅을 팔아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규흥(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3일의 KBS 스페셜에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으로 방영되는 등 근래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독립 운동가의 한 명이다. 특히 배경한(신라대) 교수 등 학계에 의해 "공화제를 주창한 중국 신해혁명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담했고, 이것이 중국 혁명파의 조선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약한 편으로, 그가 지론으로 주장한 '둔전제적 독립운동'이 어떤 실천과정을 통해 전개됐는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왔다. 충북대 사학과 김호진 씨의 석사논문 '범재 김규흥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지도교수 박걸순)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을 1만냥이나 내는 등 구한말 옥천지역 최대 거부였다. 실제 고종실록 3년(1866) 10월 1일자 기사의 원납인 명단에는 그의 조부 '동교'(東敎)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충남 강경에 20칸 규모의 집을 소유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송건호(宋建鎬·1927~2001)는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에서 아버지 송재찬과 어머니 박재호의 3남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은진송씨로 조상은 대대로 충남 대덕군 동면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송건호의 증조부는 그런 가족을 이끌고 산너머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했다. 옥천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그의 증조부는 민족의식이 강했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왜놈들이 보기 싫다며 스스로의 호를 '하곡'이라 짓고는 첩첩산골로 찾아들었다. 언론인 송건호를 평생 지배한 반골정신은 어찌보면 이런 가통(家統) 때문에 유전적으로 획득됐다. 송건호는 옥천 증약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한성사립학교를 거쳐 서울대 행정과에 입학했다. 그가 처음부터 신문기자를 꿈꿨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학재학 때부터 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사의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는 유신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런 태도는 당시 정권에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1975년 의 기사 내용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정권은 신문 광고주 압박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 를 압박했다. 그 결과, 신문 광고란이 백지 상태로
는 1934년 2월 17일자 기사에서 시골 마을 한 천재소년의 출현을 사진과 함께 요란스럽게 보도했다. '충북 제천군 청풍보통학교에 3학년에 재학중인 천관우 군은 제천군 청풍면 읍리 천영석씨 셋째 아들인데 다섯 살 때부터 읽기와 쓰기가 능하여서 일반은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명석했던 소년 천관우는 청주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사학과 학부 졸업 논문으로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 ~ 1673)의 사상을 썼다. 당시는 조선시대 실학에 대한 개념도 성립돼 있지 않았던 시기로, 그가 당시에 쓴 이 논문은 실학연구의 서막을 여는 역할을 했다. 그는 학계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6.15 전쟁이라는 시대의 불우를 만나면서 1951년 에 입사, 언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문재가 또 한번 빛을 발하게 된 것은 1952년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수할 때였다. 그는 이때 기행기 '그랜드캐년'을 썼고, 이 글은 명문을 인정받아 제 2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1968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K형, 나는 이것을 보려 여기에 온 것입니다. 별안간 일진의 바람이 거세게 불
조선시대 호조(戶曹)는 조세, 부역, 인구 등을 담당했던 관서로, 그 수장은 지금의 경제장관에 해당하는 호조판서(정2품)다. 각종 문헌은 조선시대 최고의 호조판서로 충청도관찰사도 역임한 윤현(尹鉉·1514-1578)을 자주 기록했다. '윤현이 비용을 아끼고 보관해 두는 것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각사에 오래 묵어 썩고 깨진 물건들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창고에 저장해 두었었는데 뒤에는 모두 쓸 데가 있었다. 일찍이 사옹원에서 깨진 사기 그릇을 거두어다가 저장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웃었다.'- 이 인용문의 악센트는 뒤에 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지만, 그 비아냥은 곧 탄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후에 궁성을 수리하게 되자 단청 물감을 담을 그릇이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 그 깨진 사기 그릇을 내어다 나누어 주니 사용하기에 넉넉하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나라 도간(陶侃)이 나무 톱밥을 사용하게 했던 것보다도 훌륭한 일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의 무장인 도간은 배를 만들다 남은 나무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곧 요긴하게 사용됐다. 나무 톱밥은 눈이와 진창이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門前石路半成沙)'- 이옥봉의 대표적 한시 작품인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전회에 여러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어학자 이종문 계명대 교수는 '몽혼'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한국한문학연구 제 47집에서 제기했다. 논문의 제목은 '이옥봉의 작품으로 알려진 한시의 작자에 대한 재검토'다. 그는 이 논문에서 조선 중기의 문신은 윤현(尹鉉·1514-1578)의 '국간집(菊磵集)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한시의 제목이 우리 고장 지명의 '題贈淸州人'이다. '人間離合固無齊 / 忍淚當時愴解携 / 若使夢魂行有跡 / 西原城北摠成蹊.'-
현존하는 청주지역의 오래 된 사찰 중 풍수적 가람배치 원리에 비교적 충실한 곳은 우암산 자락의 보현사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불교는 가람의 배치에도 당연히 풍수적 고려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 이를 부처의 얼굴이나 신체와 비교하는 등 땅도 불격화(佛格化)해왔다. 따라서 이마는 법당, 코는 불당, 입은 산문, 왼쪽 눈은 창고, 오른쪽 눈은 승당, 왼쪽 귀는 욕실, 오른쪽 귀는 화장실이 위치해야 한다는게 일반적인 논리였다. 얼굴이 아닌 신체에 비유할 경우 머리는 법당, 심장은 불당, 음부는 산문, 왼손은 창고, 오른손은 승당, 왼발은 욕실, 오른발은 화장실에 해당한다고 일컬어져 왔다. 법당은 불상을 모시고 설법을 하는 등 절의 으뜸 되는 집채, 불당은 단순히 부처만은 모신 집을 말한다. 반면 승당은 스님들이 좌선하며 기거하는 곳으로,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원광대 김혁배씨가 청주지역(청원포함) 보살사, 용화사, 보현사, 연화사, 백족사, 안심사, 동화사, 원리사, 현암사 등 14개 사찰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이같은 전통 가람배치 원리가 충실히 지켜진 곳은 우암산 자락의 보현사(주지 원봉스님·우암동)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현사의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이옥봉 시인의 삼척과의 인연과 작품세계를 조명하자는 문화계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옥봉(李玉峰)은 당시 충북 옥천군수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나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詩)를 짓는 것으로 고독한 세월을 보내던 중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의 첩으로 살면서 삼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2011년 8월 30일자 기사 내용이다.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이옥봉은 의 기사 내용대로 첩 신분으로 남편 조원을 따라, 1583~1586년 3여년 동안 삼척에 기거했다. 이옥봉은 이 기간동안 삼척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죽서루'와 '춘사'(春思)라는 한시를 남겼다. 시 '죽서루'는 매우 짧은 시이기는 하나, 하늘과 땅을 한 지점에서 조망하는 등 입체적인 풍광을 그리고 있다. '강물에 몸담근 갈매기의 꿈 드넓기 그지없고(江涵鷗夢闊) / 하늘에 든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만 하구나(天入·愁長).' '강물'과 '하늘', '갈매기'와 '기러기' '꿈'과 '시름', '드넓고'와 '길기만' 등의 시어에서 보듯 이 시는 뚜렷한 대구(對句)를 하고 있다. '죽서루'는 서애집, 청창연담, 일사유사 등에 이옥봉의 작품으로 수
실학자 이덕무는 이옥봉의 한시를 "부녀자로서 대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녀 또한 자부심이 대단, 정실부인 아들에게 준다는 뜻인 '증적자'(贈嫡子)라는 시를 남겼다.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妙譽皆童稚) / 동방에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東方母子名) /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驚風君筆落) /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泣鬼我詩成).' 인용문의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는 정실 아들의 글짓기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뒷문장은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로 돼 있다. 옥봉 자신도 그에 못지 않게 문재(文才)가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음 구절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옥봉은 정실 아들의 글솜씨에 대해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란다'라고 칭찬한다. 반면 자신의 글솜씨는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라고 더 자찬(自讚)했다. '읍귀'(泣鬼)는 '읍귀신' 즉 '귀신도 울린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 659-744)이 이태백의 시를 보고 극찬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도
삼국 쟁패기의 주요 격전장의 하나였던 '독산성'(獨山城)은 충주 장미산성(337m·사적 제 400호)이 거의 확실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것이 정설화된다면 장미산성은 실체가 문헌으로 고증되는 역사적 사실을 또 하나 추가하게 된다. 김현길 한국교통대 명예교수는 얼마전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발간한 '충북학' 제 15집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논문 제목은 '백제 독산성 고(考)'로, △고구려의 남진과 나제동맹 △독산성의 위치 △백제의 독산성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등의 목차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대인 서기 427년 수도를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진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신라와 백제는 433년 이른바 1차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섰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 의지는 매우 강력해,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이 무너졌고 개로왕이 참수됐다. 그러자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은 백제의 수도를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응전했다. 이 시기는 고구려의 공격에 백제와 신라가 주로 수비를 하는 국면으로, 이런 양상은 신라가 죽령을 넘는 551년까지 계속 된다. 를 보면 고구려→백제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여류시인인 이옥봉(李玉峰·?-?)을 소실(첩)로 맞은 조원(趙瑗·1544-1595)은 수재형 인물이었다. 그는 명종대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선조대에는 별시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이 부분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는 시문에도 능해 빼어난 한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지은 시중에 '별원즉사(別院卽事)'가 있다. 봄날의 서정이 잔물결이는 물가를 지켜보듯,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묘사돼 있다. '정원의 실바람에 제비 나직이 날고(庭院微風燕影低) / 배꽃 핀 방초 언덕엔 새들이 지저귀네(梨花芳··鳥啼) / 담 모퉁이에 지는 해 의당 늦은 봄이라(墻頭落日宜春晩) / 행원 서쪽에 붉은 꽃 요란히도 나부끼리(·亂飄紅杏苑西)'- 조선후기 실학작의 한 명으로 이덕무가 있고, 그는 '청정관전서'를 저술했다. 그는 이 문집에서 "이 시는 마치 만당(晩唐)의 시체(詩體)와 같다"고 평했다. 생소한 표현인 '만당'은 중국 당(唐) 나라의 말년의 시를 초당·성당·중당·만당 등 4시기로 구분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중 만당은 문종 이후 당말에 이르는 시기를 일컫는다. 조원의 시가 당나라 말기의 한시를 닮았다는 뜻이다. 조원의 시중 위와 같은 분위기를 풍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이옥봉( 李玉峰·?-?)은 어머니가 천인이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봉(李逢, 1526~?)은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호는 자운(子雲)이다. 그녀는 이런 혈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지녔고, 그같은 심리는 한시로 나타났다. 그녀 대표작의 하나로 '영월도중'(寧越道中)이 있다. 글자 그대로 강원도 영월을 가는 도중에 지은 한시다. '닷새는 강을 끼고 사흘은 산을 넘으며(五日長干三日越) / 슬픈 노래 부르다 노릉의 구름에 끊어졌네(哀詞吟斷魯陵雲) /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니(妾身亦是王孫女) / 이곳의 두견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此地鵑聲不忍聞).'- 인용한 내용 중에 '노릉'과 '이몸 또한'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노릉은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의 능을 의미하고, '이몸 또한'은 자신도 그런 핏줄이라는 점을 강한 자의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녀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내용이 각종 자료에 공통적으로 서술돼 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시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역시 문재(文才)를 갖춘 남성를 따르고자 했다. 그 결과, 조원이라는 인물의 문재가 대단함을 알고 그의 소실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은 청동기에서 신석기시대로 소급하는 것이 가능할까. '고양 가와지 볍씨와 아시아 쌀농사의 조명'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회의가 얼마전 고양시에서 열렸다. 특히 이날 학술회의에는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와 충북도문화재연구원의 김정희 씨도 발표자로 참석, 지역학계의 관심도 끌었다. 현재 국내 고고학계는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 시점을 BC1천년 전쯤인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고, 교과서를 포함한 각종 역사서서도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국제학계가 지난 1976년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에서 발굴된 BC1천년전의 탄화미(炭化米)를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의 물질적인 증거로 보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 선사고고학계는 지금까지 신석기시대에는 조·기장·수수 등 밭작물이 주로 재배됐고,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벼가 경작되기 시작했다고 봐왔다. 나아가 한반도 청동기 문화지층에서 자주 발굴되는 반달돌칼(반월형 석도)이 '한반도 벼농사 기원=청동기시대'의 또 다른 물질적인 증거로 여겨왔다. 이에 대해 이 명예교수는 이날 "지난 1991년 고양시 가와지 지구에서 출토된 2백점의 장립형(자포니카) 볍씨가 교란되지 않은 신석기 토탄층에
윷은 우리 민족이 정월에 즐겼던 고유의 민속놀이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지금도 촌로들은 이를 즐기고 있다. 윷놀이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정확한 정설이 없다. 다만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사희조(柶戱條)에서 '윷놀이를 고려의 유속(遺俗)으로 본다'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 당나라 이연수가 지은 북사( 北史)의 열전 백제조는 약간 다르게 기술했다. '투호·저포·배주·악삭 등의 여러 가지 오락이 있었는데, 특히 바둑을 좋아한다.(投壺 저(노름저)蒲 弄珠 握삭(쌍륙삭) 等雜 尤尙奕기(바둑기).'- 민속학자들은 이중 '저포'가 오늘날의 윷놀이와 유사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럴 경우 우리나라 윷놀이의 기원은 적어도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국어학자들이 만든 한국언어지도를 보면 윷에는 사투리가 존재한다. 우리고장 충북에서는 윷을 'ㅊ'받침의 윷으로 발음하고 있다. 이것이 표준말로 충청, 경기, 강원, 경상도 등 대부분의 지방에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라도와 제주도 그리고 거창, 산청 등 경남 일부 지방에서는 윷의 고어인 '숫'이나 '숯'으로 발음하고 있다. 이는 '무수'가 '무우'를 거쳐 '무'로, '가새'가 가위로 변한 것과 같은
조선시대 여류문인으로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에 못지 않은 여류 시인으로 16세기 인물인 이옥봉( 李玉峰·?-?)이 있다.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은 그의 작품을 매우 호평했다. 권응인(權應仁·1517-?)은 '송계만록에서 "옥봉의 시는 청원장려(淸圓壯麗)하여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 아닌 듯 매우 가상하다"라고 평했다. 인용문 중 '청원장려'는 맑고 모나지 않으며, 힘이 있으면서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허균(許筠·1569∼1618)도 학산초담에서 비슷하게 평가, "이옥봉은 그 시가 몹시청건( 淸健)하여, 거의 아낙네들의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라고 했다. '청건'은 맑으면서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다양한 내용의 시를 남겼으나, 특히 임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운율로 잘 표현했다. 일반인에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고 서예대회 시제로도 자주 등장하는,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
[충북일보] 충주 사과 과수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15일 충주시에 따르면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전체 매몰 작업에 착수했다. 과수화상병 예찰을 진행하던 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5일 해당 과수원에서 잎맥이 타들어 가는 증상을 발견했다. 농촌진흥청의 정밀검사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이 나온 14일 시는 3천900㎡ 과수원 전체를 매몰하기로 하고 나무뽑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난 사과나무는 전체 327그루 중 홍로와 양광 등 36그루다. 관련 매뉴얼은 과수화상병 발생 주율이 10%를 넘으면 전체 매몰을, 5% 미만이면 발생 가지만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과수원은 과거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선례가 없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이 과수원에서 1.2㎞ 떨어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바 있다. 충주 사과 발생농가 해당 반경 안엔 사과·배 농가 304곳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수화상병 발생 과수원에는 현재 외부인 출입이 차단됐다. 올해 첫 과수화상병이 발생함에 따라 농촌진흥청은 위기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관심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30대 여성이 새내기 경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청주청원경찰서 율량지구대 이의성(31) 순경. 15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5시 40분께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한 호텔에서 '공황장애가 있는 여성이 귀가를 못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와 공동대응 요청을 받아 출동한 이 순경과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 A씨의 귀가를 돕던 중 갑자기 A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여성은 과호흡을 하다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고 호흡을 멈추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 순경은 A씨의 기도를 확보하고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이 순경은 동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119 구조 요청을 했고 그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쓰러진 A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후 A씨는 구급대에 인계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경은 "실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본건 처음이었다"며 "혹시나 잘못될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과거 적십자에서 CPR 교육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응급 처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보은·옥천·영동·괴산 국민의힘 박덕흠 "우리 동남 4군 군민의 응원과 지지 덕분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 같습니다. 박덕흠을 4선 중진으로 키워준 보은·옥천·영동·괴산군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슴 깊이 담아 앞으로 지역 발전과 좋은 의정활동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4선 중진 의원의 역할과 책무를 고민하며 지역 발전의 세세한 방안을 구상 중인 국민의힘 박덕흠(70)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 운동 기간 약속했던 공약 이행을 통해 지역구인 보은·옥천·영동·괴산군의 발전을 앞당기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선거 운동 전 여론조사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한 후보와 지지율이 1%P로 좁혀지면서 초접전 양상을 띠었고, 갈수록 고소 고발도 난무했다.박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달라"며 진심의 정치를 내세웠다. 이 결과 박 당선인은 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정계 인사들은 동남 4군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개혁보다 지역 발전을 우선시하고 힘 있는 4선 국회의원을 선택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