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청주 상당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충북 도민헌장탑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난 적이 있다. 관리가 어렵고 시대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상당공원 도민헌장탑은 '시멘트+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적어도 3년에 한 번씩 흰색 페인트칠을 해야 한다. 탑을 설계·시공한 청주출신 김경화(전 공주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조각가는 이에 대해 "도민헌장탑을 만들 당시인 1970년대에는 국내 조각가들 사이에 석재를 다루는 기술력이 현재처럼 발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탑에 새겨진 글과 조각 형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도민헌장탑의 글은 탑 전면과 뒷 공간의 부속 조각 등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탑 전면에 새겨진 글 내용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탑 부속 조각의 글은 전면의 슬로건을 풀어쓴 것으로, 주장은 비슷하다. '이러한 전통은 가즈런히 오늘에 전승되어 우리 품성의 바탕이 되고 행실의 기조가 되어 교육과 문화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거니와 온후 순박한 인심 속에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며 보수에 흐르기 쉬운 도민기질을 하면 된다는 신념아래 부지런히 일하고 협동단결하여 남보다 앞서가려는 적극적인 기질로 일신시켜 가고
중앙공원에 이어 청주시민들이 즐겨찾는 곳은 상당구 수동 283-3번지 위치한 상당공원이다. 상당공원은 1만9백여㎡의 그리 크지 않은 면적으로, 공원내 주요 시설로는 충북도민 헌장탑, 한병수(韓鳳洙, 1883~1972) 동상, 충북 4.10학생혁명 기념탑 등이 있다. 그러나 상당공원은 지난 1930년대에 조성된 중앙공원과 달리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4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청주 향토문화대전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 금수장 여관과 동아극장 등이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암산(牛岩山·338m)을 가린다고 하여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했다. 상당공원은 지난 1979년 충북도민헌장탑이 건립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 도민헌장탑은 공원의 많은 면적으로 차지하고 또 도심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단번에 시민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러나 도민헌장탑에는 언제, 누가 이 탑을 세웠고 또 조형물이 의미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한 줄의 설명문도 만날 수 없다. 현 충북도민헌장탑은 1979년 전국소년제천 청주대회를 앞두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물로 세워졌고, 당시 충북지사는 정종택 씨였다. 당시 충북체육은 소년체전 7연패를 하는 등 전국의 부러움을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이 타이베이로 가기위해 일본 후쿠오카 모지항에서 승선했던 당시 배가 외형과 제원 모두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는 비록 서적 형태로 확인된 것이기는 하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확장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4일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단재는 중국, 러시아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26년의 기간 동안 1926년 4월 25일 단 한 차례만 일본을 방문했다. 단재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전환, 그에 필요한 자금을 위체(爲替·일종의 위조 수표)를 통해 확보하고자 했다. 역할 분담상 단재의 최종 목적지는 타이베이 지롱(基隆) 항으로, 그는 13일 후(5월 8일) 후쿠오카(福岡) 모지(門司) 항에서 고슌마루(恒春丸) 호에 승선했다. 그러나 고슌마루 호는 지난 1937년 가고시마현 가자섬(臥蛇島) 남단에서 암초에 부딪히는 해난사고로 침몰, 지금까지 그 실체가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아왔다. 그러던 것을 박 교수가 최근 일인학자 우에노 기이치로(上野喜一郞)가 1957년에쓴 '船舶百年史'(成山堂書店 간)라는 일본 선박전문 서적을 통해 고슌
제 17회 충청북도 청소년자원봉사대회에서 청주 일신여고 학생들과 교사가 주요 상을 휩쓸었다. 충북도 청소년종합진흥원은 21일 오후 CJB 미디어센터에서 올 도내 청소년자원봉사대회에서 입상한 개인, 단체, 지도자에 대한 시상식을 가졌다. 도청소년종합진흥원은 매년 청소년 자원봉사 우수 사례를 공모, 봉사활동을 통해 참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청소년과 단체 그리고 지도자들을 시상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올 대회에서는 청주 일신여고 학생과 교사가 3명이나 수상,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일신여고의 수상자 명단은 △김수민(개인) 여성가족부장관상 △홍기희(지도자) 충청북도 교육감 표창△박민경(개인) 충청북도 청소년 종합진흥원장 표창 등이다. 한편 여성가족부장관상 개인 중등 부분은 김예연, 단체는 단지나눔 6기·7기(형석고)와 극뽁(월드비번 용암사회복지관) 등이 수상했다. / 김병학 기자
청주 중앙공원은 조선시대는 청주목 관아,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충북도청이 위치하던 자리였다. 중앙공원은 충북도청이 지금의 문화동 자리로 이전하면서 조성됐지만, 공원 건립을 위한 공간 확보는 1911년부터 시작됐다. 일제는 1911년 4월 이른바 시구(市區)의 개정, 즉 도시계획에 착수했다. 『청주연혁지』를 보면 일제는 사방의 성벽을 허물도록 하고 그 돌을 이용하여 새롭게 하수도를 건설하고 일직선으로 석교에서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를 개수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본정통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종횡에 가로를 계획하여 가로 세로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함으로써 바둑판의 모양과 유사한 시가지를 만들게 되었고, 1915년(대정 4)에 이르러서는 그 대부분의 공사를 준공하였다.(55쪽) 그 이전에 충북도청이 1908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해 오면서 청주읍성 관아의 각 건물에는 과(果)들이 분산 배치됐다. 본건물인 근정전(勤政殿)에는 지방, 통군루에는 회계과, 공손수(압락수) 아래의 건물에는 학무과, 근정전의 동쪽에 있는 건물에는 재무과가 배치됐다. 1922년에 편찬된 『대청주』라는 자료를 보면 일제는 이때부터 서공원과 동공원 외에 별도의 공원을 청주 도심이 조
공원은 공공녹지로서 자연지(自然地)나 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후생적 조경지로 정의된다. 전자를 자연공원, 후자를 도시공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이 역사적으로 언제 출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근대공원은 중세 이후 영국의 왕후·귀족이 소유·독점 사용하던 수렵장이나 대규모 정원을 19세기 중반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에서 비롯됐다.청주의 근대적 의미의 공원은 일제 강점기 때 등장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에는 '서공원'(현 사직동 충혼탑 자리·사직산)과 '동공원'(현 당산 일대·명장사 뒷산))에 대한 설명이 동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최소한 1920년대 초반부터청주에도 공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공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먼저 『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무렵에는 청주에 공원이 없었기 때문에 鈴木 장관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땅을 깍아 도로를 개척하고, 여러 종류의 수목을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돌을 운반하여 벤치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오처옥(吳妻屋)을 설계하여 휴식장소로 삼도록 하였는데, 동공원과 함께 성대하게 설비되어 있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
(재)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과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이 공동으로 지난 14일부터 '가마에서 무덤으로 - 청주의 백제가마, 오산리 유적' 특별전을 신봉동 백제유물전시관에서 갖고 있다.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청주 옥산면 오산리 가마터에서 백제시대 토기류 등 다량의 유물을 발굴한 바 있다. 특히 일대 가마터는 청주지역에서는 처음 발굴된 백제시대 생활유적이어서 지역은 물론 전국적인 관심을 끈 바 있다. 이중 토기로 만든 파배(把盃·손잡이잔)와 장군은 사료적 가치가 클뿐 아니라 아직도 유물 해석에 대한 정리가 종결되지 않아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파배는 5세기를 전후해 생산된 토기로, 옛 마한과 백제 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등 영역성이 강한 유물이다. 특히 청주지역에서 출토된 파배의 경우 토기표면 상단에 가로 음각선이 그어진 것이 많아, 그 기능을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 왔다. 이와 관련 10년 전에는 음각선이 눈금자 역학을 했고, 따라서 파배는 액체나 곡식의 용적량을 재는 '양기'(量器)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이 논리는 "백제는 600㎖(소형 바리)를 1되로 해서 4되, 즉 2400㎖(파배)를 1말로 계산하는 용적체계를 가진 것 같다"는 논리로 발전했다
단양은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쌀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이런 환경에서 전세(田稅)를 쌀 등 현물로 내는 것은 고욕이 아닐 수 없다. 쌀 생산량이 적다보니 타지에서 쌀을 사다가 전세를 내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를 해결한 인물이 당시 관찰사 이석규(李錫奎)다. '단양군의 전세(田稅)·대동미와 군포(軍布) 등을 영원히 전량 돈으로 대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도백 이석규가, 산간 고을에서는 쌀과 베가 매우 귀하여 멀리 타도에서 사와야 하고 수송의 길도 험하여 매양 전복된 배가 많다는 이유로 돈으로 대납하기를 청하니, 묘당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그의 충청도 관찰사 재임시절에 연풍현에서 이희윤(李喜允)이라는 인물에 의해 전패(殿牌)훼손 사건이 일어났다. 전패사건이 빈발한 탓인지 순조실록은 이 사건을 소략으로 기록했다. '공청감사 이석규가 연풍현의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킨 죄인 이희윤을 처형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순조실록은 20여일 뒤 또 하나의 관련 기사를 기록해 놓았다. 이희윤의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풍현에 전패를 가지고 변을 일으켰던 죄인 이희윤의 아들
조선시대 우리고장의 전패훼손 사건은 충주, 황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빈번히 발생했다. 조선후기가 되면 전정, 군정, 환정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서민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전패 훼손사건은 음성, 단양, 연풍, 괴산 등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의 훼손 사건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정치적,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왔다. 이는 사건이 나름대로 독특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먼저 음성현 객사의 전패훼손 사건이다. 현종실록 3년(1662) 2월 4일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음성현에서 전패를 도난당했다고 감사가 계문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그 읍만 혁파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서 간악한 백성이 계획적으로 수령을 몰아내는 일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 이에 상이 따랐다." '수령을 골탕 먹이려는 전패훼손 사건이 너무 자주 일어나니 고을만 강등시키고 수령을 파직하지 말아달라'는 건의 내용이다. 현종은 이를 수용, 당시 수령은 파직하지 않았으나 음성현은 10년 동안 그 이름이 사라졌다. '호서의 음성현(陰城縣)을 혁파하였는데, 전패(殿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성현 전패훼손 사건을 기점으로 전패에 대
일제가 강점기 동안 한반도 통치차원에서 발간한 '조선지지자료'라는 지리지가 순우리말 지명의 보고(寶庫)인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를 활용할 경우 새주소 사업 등 이런저런 이유로 급격히 소멸되고 있는 순우리말 지명을 효과적으로 복원·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원대 김순배 강사가 얼마전 한국지역지리학회에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충청북도편 지명 자료의 시론적 분석' 논문을 발표했다. 조선지지자료는 일제가 1910년대에 제작·발간한 지리지로, 전국 각 면의 산, 골짜기, 들, 리(里), 주막, 둑, 보(洑), 시장 이름 등이 수록돼 있다. 특히 한자화된 이름과 함께 당시 문법으로 한글이름도 병기, 1910년대 이전의 순우리말 이름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가 담겨져 있다. 사례를 살펴보면, 조선지지자료는 보은군의 경우 총 13개 면에 6백34개의 지명을 수록해 놓았고, 이중 84%인 5백30개의 지명을 한자+한글로 병기했다. 조선지지자료를 보면 보은읍 '장몽평'(長夢坪)이라는 지명은 순우리말로는 '장ㅅㄱ+ㅜ+ㅁ이들'(현대어 장꿈이들)로 불렸다. 이것을 일제는 △장에서 長(음차) △ㅅㄱ+ㅜ+ㅁ이에서 夢(훈차) △들에서 坪(훈차) 등의 한자를 빌려 '장
국왕을 상징하던 전패(殿牌)는 조선후기 들어 각종 사건에 휘말렸다. 그 사연은 정치적인 동기, 개인 비리에 의한 훼손 등 매우 다양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전패 훼손사건은 효종 6년(1655)에 전라도 나주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주에는 경현서원이 존재했고, 그 운영권이 전패 훼손사건의 발단이 됐다. 비(非) 서인계가 서원(書院)의 원장이 되자 당시 나무목사 정기풍(鄭基豊·1594~?)은 이를 옹호했다. 그는 본관이 초계로 1642년 신계(新溪·지금의 황해도 신계군) 현령으로 재직하던 중, 암행어사 정치화를 통해 그의 선정이 보고되어 임금으로부터 의복을 하사받을 정도로 유능한 관료였다. 또 우리 고장과도 인연이 있어 1650년(효종 1)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하던 중 문학(文學·정5품)에 임명되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나주의 서인 집단은 이를 빌미로 목사 정기풍을 축출하려 했다. 전패가 훼손되면 그 책임의 일부가 목사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미리 계산한 사건이었다. 전패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지능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일성록 헌종 11년(1845)에 관련 기록이 적혀 있다. 이 때는 우리 고장 청주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한다. 청주사람 박용수는 유한원이
조선 조정은 국가차원에서 두 개의 위패를 관리했다. 하나는 궐패(闕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전패(殿牌)이다.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 조정은 황제국인 명나라를 향해 정초, 황제생일, 동짓날 등에 절올리는 의식은 망궐례를 행했다. 이때의 위패는 '궐패'(闕牌)라고 불렀다. 궐패가 국외용이라면, 전패는 국내용이었다. 조선 조정은 또 전국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殿(전)'자를 새긴 나무 패를 봉안했다. 바로 전패이다. 고려 시기까지의 객사는 말 그대로 공무로 출장온 관료들의 숙박 장소로 사용됐다. 조선 조정은 지방에서도 국왕 권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이 객사 내부에 전패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사극을 보면 '전하'(殿下)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원래 이 전하는 신하가 임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이른바 '인기척 표현'이다. 감히 신하가 임금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전패나 전하의 '전'은 일국의 최고 통치권자를 상징했다. 전패는 국왕의 상징물이었으므로 그 보관 및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다. 이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자는 대역죄에 해당되어 본인은 물론 일가족까지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10년간 혁파되어 이웃 고을
일제는 왜 조선 백성들의 흰옷(白衣) 착용을 막고, 대신 색깔옷(色衣)을 입도록 전국적인 운동을 펼친 것일까. 일본 제국주의는 1920년대 후반을 시작으로 1930년대 초반까지 색깔옷 입기 운동의 일환인 '염색강습회' 행사를 전국 각군을 순회하며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본보가 확인한 결과, 이와 관련되 충북의 첫 기사는 1928년 8월 28일자(사진1)에 실려 있다. 가급적 원문을 살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북 염색강습회는 예정인원 60명에서 20명이 초과되야 80명의 출석으로 지난 20일부터 3일간 청주공립보교 여자부 강당에서 중앙시험소 기수 瀧川昇씨 지도하에 개최하엿더라.' 인용문의 '瀧川昇' 씨는 조선인이 아닌, 염색 기술을 지닌 일본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립보교'는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일제시대의 초등교육기관을 일컫는다. 다음 기사는 충북도내의 염색강습회를 주관한 곳은 충북도청 사회과이고, 당시 총독부는 공무원-일반주민 순으로 색의 착용운동을 전파시키려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도 사회과 서기 李重甲씨 임석하게 염색강습회를 개최하엿다는데(…). 일반지도의 제 일선에 처하여 잇는 면직원 보교원에 충분히 염색에 대하야 지식을 보급식혀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부터 처음 들어온 담배는 특유의 중독성을 발했다. 17세기 후반의 하멜은 표류기의 일부를 이렇게 기록했다. '현재 조선인들은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이들까지도 4,5세 때에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래서 남녀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국왕 중에서도 '골초 임금'이 등장했다. 정조가 지은 문헌 중에 '남령초 책문'이라는 것이 전해지고 있다.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오로지 이 남령초에서만 도움을 얻었다. 화기(火氣)로 차가운 담(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를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뒤에는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붓방아를 찧을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고뇌를 편안하게 누그러뜨리는 것도 그 힘이다'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번역한 글이다. 그런 정조는 '백성들에게 담배의 혜택을 주겠다'는 사명감에 불탓다. 말 그대로 전국민의 흡연화로, 역시 '책문'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이 풀이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을 보면, 천지의 마음을 엿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 따라서 남령초를 월령에 싣고 의
담배는 포르투갈어 '토바코'(TOBACCO)가 일본에서 '다바코', 그리고 이 '다바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담바구'로 불리다가 '담배'로 정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토바코'에 대해서는 △서인도제도의 섬이름이라는 설 △그곳 원주민이 사용하던 담뱃대 이름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정설화된 것은 없다. 이밖에 담배는 조선시대에는 남령초(南靈草), 연초(煙草), 다연(茶煙) 등으로도 불렸다. '남령초'는 남쪽의 신령스러운 풀, '연초'는 연기나는 풀, '연다'는 연기나는 차라는 뜻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어디이고, 또 우리나라에는 언제·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담배의 원산지는 중아메리카로,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담배에 약효능이 있다고 생각해 유럽으로 가져갔다. 이것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유입 경로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포르투칼-필리핀-일본-조선 순으로의 전래설, 둘째는 비단길-청나라-조선 유입설, 셋째는 두 가지 모두, 즉 한반도 남북으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첫 번째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경우 담배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들어왔다는 설이 보다 유력해 진다. 조
청주 사뇌사 금고(金鼓·쇠북) 등 고려시대 유물에는 청주 특유의 금속공예 문양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직지는 청주 특유의 서체로 발간됐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지역학 차원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993년 10월 10일 청주 무심서로(용화사 북쪽 제방)의 전신주 이설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4백94점의 고려시대 금속공예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발굴된 유물은 범종, 반자, 향로, 향완, 금강령, 주전자, 국자, 숟가락, 솥, 맷돌 등으로, 불교와 생활 금속공예품이 혼합돼 있었다. 이들 유물들에는 리베트로 연결한 국자, 청주목관이 검인한 청동 기름말 등도 포함돼 있는 등 전국의 금속공예사 전공자 외에 기술과 사회 분야의 관심까지 끌었다. 청주시는 이같은 발굴성과와 지역에서 유명 도자기가 생산되는 점을 감안, 2년마다 국제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하게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발견된 금고 유물에서는 청주만의 특징을 지닌 문양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보존처리 전에는 문양이 없는 무문 형태를 보이면서 중앙의 아류로 인식됐다. 이에 대해 동국대 대학원 장수진 씨는 얼마전 발표된 '청주 사뇌사지출토 고려 금속공예 연구'(지도교수 최응천) 석사학위 논
음악, 무용, 기예가 어울리는 일본 전통연극으로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16∼17세기 에도시대에 서민 예술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대 최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 가부키에 임진왜란 제 1차 진주성 전투의 맹장으로, 우리고장 괴산 출신인 김시민이 '모쿠소'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주도의 조선관민이 보여준 필사의 항전은 적인 왜군에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때문에 당시 왜군들은 김시민을 '모쿠소'라고 불렀다. 이때의 모쿠소는 '진주목사' 할 때의 '牧使'(목사)를 일본식으로 발음이고, 표기는 '木曾'으로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신출세를 다룬 작품으로 '다이코키'(太閤記)가 있다. 이 다이코키에 '모쿠소'가 실리면서 일본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됐고, 그 영향으로 가부키에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 캐릭터로 그려지게 됐다. 모쿠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부키 작품은 지카마츠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혼쵸산고쿠시(本朝三國志·초연 1719년 2월 14일)이다. 여기에서 모쿠소는 조선에서 가장 신뢰받는 장군으
임진왜란 당시 같은 성(城)에서 8개월의 시차를 두고 '2차 전투'가 발생한 것은 진주성이 유일하다. 1592년 음력 10월에 벌어진 7일 밤낮의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조선인은 1천여명, 일본군은 1만3천여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왜군의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무리하게 성벽으로 기어오르다 진주성 안 조선인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김시민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대비하고 있었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을 종이에 싸서 풀로 묶어 성 위에 감춰두게 하고 대포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인용문 뒤에는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이르는 곳마다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여 일단 공격을 완전히 좌절시켰다.'(〃)라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진주성 1차전투 패배에 대해 극도의 분노와 함께 복수를 곱씹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진주성 1차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왜군 정병이 육지에서 당한 최초의 대규모 참패였다. 그 후유증이 매우 심해 호남 진출에 실패했고, 또
청주 역사는 언제부터 여명기를 맞이 했을까. 청주 역사의 여명기를 고고학적 물질문화를 통해 규명한 논문이 나와 주위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조상기(중앙문화재 연구원장·사진) 씨가 얼마전 '청주지역 3~5세기 토기의 전개양상과 정치체의 변동' 논문으로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원장은 고고학적 물질, 그중에도 토기의 출토 양상을 중심으로 청주 역사의 시작 시기를 원삼국기, 백제토기 성립기, 백제토기 확산기, 백제토기 발전기 등 4단계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청주의 정치체의 변화를 추적, 청주 역사의 여명기 변화상을 규명하려 했다. 그 결과, 청주역사 여명기는 흐릿하지만 2세기 무렵부터 '어떤 내용'을 문화적인 물질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청주는 3세기 무렵부터 마한문화가 존재하기 시작했다. 세형동검, 청동의기 등 청동기 유물이 2세기 문화층에서 출토됐다. 3세기에는 낙랑계 유물인 칠기류가 송절동고분에서 출토됐으나 마한문화와는 관련이 먼 편이었다. 한사군의 한 부류인 낙랑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한반도에서 완전 축출된 바 있다. 청주지역에서 마한문화가 절정을 맞은 것은 3세기 후반이었다. 이 시기 들어 비로소 마한유물
시호(諡號)는 왕이나 왕족 그리고 신하들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한 호를 가리킨다. 이 시호는 그때마다 무원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할 3백여자의 글자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중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즉 시호는 이들 글자의 조합인 셈이다. 조선시대 시호는 4글자로 된 사자성어 형태로. 그 뜻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었다. 가령 문(文)에는 박학호문(博學好文·널리 배운 것이 많고 글 읽기를 좋아한다), 충(忠)은 위신봉산(危身奉上·자기 몸이 위태로우면서도 임금을 받든다), 무(武)는절충어모(折衝禦侮·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다)의 뜻이 담겨져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만이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영무(태종), 남이(세조), 이준(세조), 김시민(선조), 김응하(광해군), 이수일(인조), 정충신(인조), 구인후(효종) 등 9명에 달하고 있다. 이중 우리고장과 연고를 갖고 있는 인물로 적지 않아, 남이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인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비교적 늦은 29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그는 밀양부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남도병마절도사, 길주목사겸 방어사,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무관의 요직을 섭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초기전투(예천·용궁)를 제외한 야인토벌과 반란군 진압 등의 싸움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뒀다. 특히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겸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한성을 수복, 그 공으로 진무공신 2등과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논할 때 그 실체를 '솔선수범'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매우 많다. 이수일 장군이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도 분명히 그만의 리더십이 작용했다. 현존하는 여러 문집이나 관찬자료 등에는 이수일 장군의 생전 행적을 읊은 시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고, 그 리더십의 공통점은 여러 곳에서 인(仁), 즉 '어짐'으로 표현돼 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중 한 명으로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가 있다. 그는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을 남겼고, 그 안에 '계림부원
대청호와 충주호의 조류발생은 유사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두 내륙호의 차이점에는 공간과 결합된 수리적인 특성이 강하게 작용, 조류발생이 상대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수자원공사 정선아·이혜숙 연구원이 얼마전 '3차원 모델을 이용한 대청호와 충주호의 공간적 조류발생 특성비교' 논문을 대한상수도학회와 한국물환경학의 공동 논문집에 발표했다. 두 연구원은 이른바 '3차원 모델'을 이용해 충북의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청호와 충주호의 조류발생 시작과 그에 따른 진행을 상호 비교·분석했다. 3차원 모델은 두 내륙호의 지도 위에 격자망을 구성하고 여기에 조류발생과 진행에 대한 물리, 이화학, 생물학적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분석에는 두 댐의 일반 방류와 발전방류, 수온, 수질, 취수탑 위치 등도 입력됐다. 또 기온, 풍향, 풍속, 기온, 일사량, 상대습도, 운량 등 기상청 데이터도 함께 입력됐다. 금강수계의 대청호는 저수면적 72.8㎢, 총저수량 15억t 등을 제원으로, 지난 1980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과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을 막은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됐다. 남한강수계의 충주호는 저수
조선 후기에 보이는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했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화풍의 관념산수화가 유행했으나, 이는 미술 사대주의의 다름이 아니었다. '진경주의' 정신은 미술만이 아닌 문장에서도 시도됐고, 담헌 이하곤도 이를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따라서 "담헌은 문장을 윤택하게 하거나 조탁하는 것은 올바른 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문학 평론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물빛은 산 그림자 거꾸로 모사해 내고(湖光倒寫峰頭月) / 물에 비친 하늘 산그림자 다시 비추어내네(山影橫侵水底天) / 위아래로 점하나 공명 가린 것 없으니(上下空明無點·) / 바로 내 몸이 옥호에 있는 신선이 아닐까.(直疑身世玉壺仙).'- 담헌은 달빛, 나무그림자, 일렁이는 밤물결 등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지극히 쉬우면서 조탁없는 시어로 묘사했다. 담헌은 1972년 10월 장인 송상기를 뵙고 완위각이 있는 진천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남원 광한루를 찾았다. 전통시대 겨울 여행은 조금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담헌은 특유의 산수애호 사상과 역마살(驛馬煞)적인 성격을 앞세워 그해 12월 한겨울에 광한루를 찾았있다. 여기에도 달과 함께 조탁없는 쉬운 시어들이
9일이 제 568돌 한글날인 가운데,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충주일대 고한글 지명의 하나인 '쇠벼라'라가 아직도 국어학계의 깊은 주목을 받고 있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1440년)한 후 처음 만든 서사시 형태의 책으로, 여기에는 2백60여개의 순한글 옛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쇠벼라'는 용비어천가 여러 내용중 남한강 수계의 흐름을 설명하는 대목에 등장한다. 관련 부분의 원문은 '至忠淸道忠州與達川달내合爲淵遷쇠벼라西流'로 돼 있다. 해석하면 '(남한강물은) 충청도 충주에 이르러 달천(달내)과 합쳐져 연천(쇠벼라)이 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정도가 된다. 이와 관련, 국내 국어학자들은 용비어천가 2백여개의 지명 중 유독 충주일대 고한글 지명의 하나인 '쇠벼라' 해독에 수십년간 강한 집념과 애착을 보여왔다. 최근까지 '쇠벼라'를 직접 주제로 다룬 논문은 무려 편이 이르고 있다. 향가를 처음으로 해독해 "인간 국보 1호", "걸어다니는 국보"를 자칭했던 양주동 박사를 시작(1954년)으로 김윤경(1962년), 김종운(1964년), 이기문(1964년), 유재영(1974년), 최범훈(1982·1983년), 강헌규(1995년), 박병철(2010·2011년),
진천군 초평면 연담리와 문백면 은탄리 사이의 하천에는 '소두머니'로 불리는 독특한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한자로는 '牛潭'(우담)으로 적는다. 소두머니는 물이 맑고 깊은 가운데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치 해수욕장을 연상케 하고 있다. 또 동쪽과 서쪽으로 길게 뻗은 산이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어 명승의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일대는 산의 끝이 용의 머리같이 생긴데다가 마치 내를 건너는 형상이라 하여 도용(渡龍)골로도 불리우고 있다. 진천군에서는 이같은 전설을 바탕으로 매년 농다리에서 '소두머니 용신놀이'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나 전설의 출처는 연담-은탄리 하천의 소두머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이같은 명승을 그냥 지나칠리 없다. 조선 순조-고종 연간의 인물로 정해필(鄭海弼·1831-1887)이 있다. 그는 송달수(宋達洙)의 제자로, '조암집'을 저서로 남겼다. 그가 이런 시를 남겼다. '깊은 물 맑고 푸른데 산을 뚫은 듯(一泓澄碧穿雲山) / 조그마한 배는 역류에서 가볍게 출렁이도다(漁·輕·溯中間) / 도인을 따르는 곳에 진정한 낙이 있구나(道人隋處得眞樂) / 반나절이나 고기떼 새떼 오락가락하는 한가로운 곳 왕래하도다(牛餉管來魚鳥閒)'. 청주대 정종진 교수는
[충북일보] 충주 사과 과수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15일 충주시에 따르면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전체 매몰 작업에 착수했다. 과수화상병 예찰을 진행하던 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5일 해당 과수원에서 잎맥이 타들어 가는 증상을 발견했다. 농촌진흥청의 정밀검사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이 나온 14일 시는 3천900㎡ 과수원 전체를 매몰하기로 하고 나무뽑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난 사과나무는 전체 327그루 중 홍로와 양광 등 36그루다. 관련 매뉴얼은 과수화상병 발생 주율이 10%를 넘으면 전체 매몰을, 5% 미만이면 발생 가지만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과수원은 과거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선례가 없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이 과수원에서 1.2㎞ 떨어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바 있다. 충주 사과 발생농가 해당 반경 안엔 사과·배 농가 304곳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수화상병 발생 과수원에는 현재 외부인 출입이 차단됐다. 올해 첫 과수화상병이 발생함에 따라 농촌진흥청은 위기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관심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30대 여성이 새내기 경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청주청원경찰서 율량지구대 이의성(31) 순경. 15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5시 40분께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한 호텔에서 '공황장애가 있는 여성이 귀가를 못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와 공동대응 요청을 받아 출동한 이 순경과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 A씨의 귀가를 돕던 중 갑자기 A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여성은 과호흡을 하다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고 호흡을 멈추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 순경은 A씨의 기도를 확보하고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이 순경은 동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119 구조 요청을 했고 그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쓰러진 A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후 A씨는 구급대에 인계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경은 "실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본건 처음이었다"며 "혹시나 잘못될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과거 적십자에서 CPR 교육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응급 처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보은·옥천·영동·괴산 국민의힘 박덕흠 "우리 동남 4군 군민의 응원과 지지 덕분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 같습니다. 박덕흠을 4선 중진으로 키워준 보은·옥천·영동·괴산군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슴 깊이 담아 앞으로 지역 발전과 좋은 의정활동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4선 중진 의원의 역할과 책무를 고민하며 지역 발전의 세세한 방안을 구상 중인 국민의힘 박덕흠(70)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 운동 기간 약속했던 공약 이행을 통해 지역구인 보은·옥천·영동·괴산군의 발전을 앞당기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선거 운동 전 여론조사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한 후보와 지지율이 1%P로 좁혀지면서 초접전 양상을 띠었고, 갈수록 고소 고발도 난무했다.박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달라"며 진심의 정치를 내세웠다. 이 결과 박 당선인은 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정계 인사들은 동남 4군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개혁보다 지역 발전을 우선시하고 힘 있는 4선 국회의원을 선택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