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청주의 공식 행정지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西原府'(서원부)라는 지명이 자주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원장 장준식)은 최근 청주 문화동 일대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여 고려시대 청동 향완, 기와, 석조석불 등 다량의 유물을 수습했다. 특히 높이 21㎝, 직경 23㎝, 내경(안지름) 16㎝ 크기의 청동향완에는 '西原府'라는 지명이 새겨져 있다. 유관으로 관찰이 가능한 부분 명문은 '金堂香宛中二斤十兩西原府七里接OO告納OO四弘'으로, 나머지는 표면이 접혀 있어 보이지 않고 있다. 해석 가능한 부분은 △금당향완을 만드는데 청동 2근10량이 들어갔고 △서원부 7리에 사는 OOO가 헌납했다 정도가 된다. 이중 명문 '서원부'는 고려시대 청주의 공식 행정지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교유물을 중심으로 자주 발견되고 있어 특히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명문 '서원부'는 이번 문화동 발굴 외에도 △직지가 발굴됐던 흥덕사지의 금구(쇠북) 표면 △청주 사직동의 각종 사뇌사 금속공예 유물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이밖에 고려시대 청주 사뇌사에 와서 하안거를 했던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1178∼1234)의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에도 '서원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로 홍문관이 있고, 그 수장은 정2품의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이런 대제학들 사이에는 '주문연'(主文硯)이라는 벼루를 주고 받는 아름다운 전통이 존재했다. 굳이 벼루를 주고 받은 것은 대제학이 '문'(文)을 총괄하는 최고의 벼슬자리였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 권221 직관고는 주문연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문연은 남곤(南袞)으로부터 이행(李荇)에게 전해진 뒤 서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덕형(李德馨)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그런데 명(明)나라 군대가 이를 얻어서 가져다가 단지를 괴는 돌로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서 도로 가져와 홍문관(弘文館)에 둠으로써 다시 전해지게 되어 이이첨(李爾瞻)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이첨이 패(敗)하게 되자 다시 잃어버렸는데, 신흠(申欽)이 대제학으로 있을 적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으로 다시 큰 벼루 하나를 만들어 '전심연(傳心硯)'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남아 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대한제국기인 1903~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2백50권 분량의 책이다. 따라서 주문연은 △임진왜란
≪쇄미록·王+肖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은 서울 태생이나 그의 일기에는 우리고장 황간의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외가가 황간이기 때문으로, 그는 성장기를 황간에서 보냈다. 오희문은 1591년(선조 24) 11월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장흥·성주 등에 있는 노비의 신공도 받을 겸 두 명의 종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중도에 임진왜란을 당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그 과정을 10년 가까이 기록한 일기가 《쇄미록》으로, 1601년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연구논문을 보면 그의 일기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이와 관련 오희문은 '막정'이라는 노비가 죽자 "살아서는 몸을 바치고 죽어서는 재산을 바치니 공이 있는 노비'라고《쇄미록》에 적었다. 이 문장은 조선시대 노비들도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노비가 죽으면 그 재산은 주인의 것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사료에는 외거노비들 중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경우가 더러
40년전 첫 발굴이 시작된 '청원 두루봉 동굴'(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이 최근들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가 재평가 방향이 "당시 발표가 너무 확대 해석됐고 감성적이었다"라는 시각이어서,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발굴당시 모습이 사라진 청원 두루봉동굴은 1976년 첫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87년까지 충북대와 연세대박물관에 의해 11차 발굴이 실시됐다. 1차 발굴(제 2굴)은 충북대와 연세대가 공동으로 했고, 2차부터는 충대 박물관이 단독으로 두루봉동굴내 제 15굴·새굴·처녀굴·가지굴·흥수굴 등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흥수아이와 각종 동물뼈화석 외에 매우 많은 수량의 뼈연모(골각기), 석기연모 등도 출토됐다. 이중 두루봉동굴 제 2굴에서는 사람의 손질이 간 연모가 긁개 9백90여점, 쑤시개 1백95점, 밀개 1백79점, 째개 1백62점(이상 뼈연모), 석기연모 15점 등이 출토된 것으로 학계에 보고돼 있다. 이에 대해 조태섭(연세대) 박사는 △이는 깨어진 뼈들을 다 연모로 본 결과이고 △연모의 분류도 그 형태를 파악하여 거기에 따라 기능을 부여했으며 △그러나 이는 다분히 관찰자의 주관적인 시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
청주 중앙공원의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사진)이 수개월 동안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다시 본모습을 드러냈다. 충청병영이 있던 지금의 중앙공원 일대에는 병영과 관련된 건물이 여러 동 존재했었다. 충청병마절도사의 처소인 청진당, 도서실격인 후당과 반시당, 병사의 집무소인 운주헌, 지휘소인 통군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병마절도사영문 한 채만 남아 있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 15호인 병마절도사영문은 지난 1988년까지 '청녕각'(淸寧閣)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던 것을 이상주와 박상일 씨 등의 고증 노력으로 구 청원군청 내의 청주동헌이 '청녕각'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같은 오인은 한자의 사용 용례만 살폈다면 바로 확인될 수도 있었다. 한자 '閣'(각)은 규모를 꽤 갖춘 집이나 2층으로 이뤄진 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개 섬돌을 통해 대청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이에 비해 한자 '樓'(누)는 2층 구조로, 오르는 계단이 사닥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따라서 2층 건물인 충청병마절도사 영문이 '청녕각'으로 불렸던 것에는 당연히 의심이 뒤따랐어야 했다. 현재 충청병마절도사 영문은 중앙공원 정문의 바로 우측에 진입로와 평행한 방
유석(劉石)의 시역(弑逆) 미수사건 때문에 충주목이 예성부로 강등된 것(그림)은 처음부터 문제점이 많은 정책적 판결이었다. 유석이 강원도 원주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는 결과적으로 충청도와 충주목이 입었다. 충주의 지식인이 가만있지 않았다. 유생 허초(許礎)라는 인물이 승정원 앞으로 상언(上言)을 했다. 상언은 관원으로서가 아니라 사인(私人)으로서 자기 주장을 올린다는 점에서 상소와 차이가 있다. 허초는 장문의 상언에서 충주목 강등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유석은 전일 비록 본주(충주목 지칭)에 살기는 하였으나 그의 아비와 마찬가지로 맹인으로서 구걸하러 다니고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기 때문에 본주에 호적 대장이 없었고, 유석이 아비를 따라 구걸하러 다닌 기간은 어림잡아 4∼5년이었습니다.'- 허초는 또 절차상의 잘못도 지적했다. '유석은 후에 원주 서면(西面) 강천리(江川里)에 사는 양인(良人) 이금산(李今山)의 딸에게 장가들어 살다가 극악 무도한 죄를 저질러 원주 관아에 수금되어 처결되었으니 이는 곧 원주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안(推案)에 본주 태생이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읍호를 강등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율에 의하면 한번 읍호가 강등되면
충북지역사를 알리는데 본산 역할을 해왔던 '충북학연구소'가 최근 신임 소장을 맞았다. 충북발전연구원(원장 정초시)은 최근 인사를 통해 사회문화연구부 소속의 김규원(56·사진) 연구위원을 신임 소장을 임명했다. 이에따라 지난 1999년에 출범한 충북학연구소가 어떤 변화의 바람을 몰고올지 벌써부터 주변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다음은 신임 김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사실상 10여년만에 충북학 소장 자리가 바뀌었다. 이번 인사의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의 충북학 연구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이것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대중화된 충북학, 재미있는 충북학을 추구하라는 것이 임명권자의 의중으로 알고 있다." - 지역학의 대중화는 과거에도 많이 거론됐으나 그 실천은 쉽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재미있으면서 대중화된 충북학을 추구할 것인가. "디지털 매체 혹은 영상 이미지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기존의 지역 인문학은 정통사학에 너무 치우치다보니 지역 청소년과 여성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한 면이 있었다." - 종전 충북학연구소의 주된 표현 방법은 활자가 만들어낸 텍스트(문장)였다. 이것과 과감히 결별하겠다는 것인가. "활자매체와 결별한 표현
조선시대 충주지역에서는 공교롭게도 청주와 같은 8번의 읍호강등 사건이 일어났다. 발생 순서대로 살펴보면 △유석 사건(1539년·중종 19) △이홍윤 사건(1549년·명종 4) △유인발 모반사건(1613년·광해군 5) △안집중 모반사건(1628년·인조 6) △채문영 모반사건(1644년·인조 22) △유수원 모반사건(1755년·영조 3) △이인좌의 난 가담(1728년·영조 4) △채수영 모반사건(1765년·순조 1) 등이다. 충주의 첫번째 읍호강등은 1539년 6월에 일어났고, 그 이유는 유석(劉石)이라는 인물의 시역(弑逆) 미수사건 때문이었다. '시역'은 지금으로 말하면 존속살인으로 부모나 임금을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이를 강상윤리를 위반한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해 매우 엄중하게 다스렸다. 『중종실록』은 사건전개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지난 경자년 원주(原州) 사람 유석(劉石)이 자기 아비를 살해하기 위해 매우 추운 겨울에 강가 바위 위로 아비를 꾀어 와서 물속으로 밀어넣고서, 혹 살아날까 우려하여 대나무 막대로 머리와 뺨 등을 마구 난타하여 막대도 부러졌고 출혈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침몰하여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고종의 친부이다. 그와 친척인 사이로 이하전(李夏銓·1842~1862)이라는 인물이 있다. 미리 말하면 이하응은 일부러 '바보짓'을 해서 세도정치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이하전은 '바보짓'을 하지 않아 안동김씨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리면서 제주도로 유배된 끝에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의 나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21살이었다. 1862년(철종 13)년 7월 당시 오위장(五衛將) 이재두(李載斗)가 "김순성(金順性)과 이긍선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오위장은 오위도총부 소속이면서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으뜸 벼슬로, 정3품의 품계를 지녔었다. 김순성은 체포됐고 곧 국문이 시작됐다. 이와 관련, 『철종실록』은 '김순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라고 서술했다. 그는 혐의가 잘 입증되지 않았는지 곧 풀려났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유호(李儒虎)를 대질시켰을 적에 정유성(鄭裕誠)의 분소(分疏)가 너무도 명백했으므로, 온갖 요악한 짓을 한 김순성도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부당하게 죄에 걸린 정상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특별히 방송(放送)시키소서." 하니,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새해를 맞는 기분이 남달랐는지 이를 한시로 많이 남겼다. 이를 통해 당시 정치상황, 사회상 등도 엿볼 수 있다. 새해는 희망으로 상징되지만 중년 이후로는 나이를 또 한 살 먹는 것이 된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 ~ 1793)도 '세시잡영'(歲時雜詠·1765)이라는 연작시를 통해 그런 심리를 숨기지 않았다. '새해와 묵은해가 나뉠 즈음 / 대청의 등잔 불꽃 어느덧 낮아졌네 / 나에게 길고 긴 새끼줄이 있다면 / 첫새벽 우는 닭을 묶어두고 싶네.' '세시잡영'의 네번째 연작시에는 조선후기의 살기 어려운 모습이 애뜻하게 표현돼 있다. 정황상 이덕무의 아내는 요양을 위해 친정에 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정에간 병약한 아내는 / 새해 맞아 남물래 눈물 흘리리 / 슬프도다 땅 속에 묻힌 딸년이 / 살아 있으며 이제 네 살일텐데.' 조선후기 유만공((柳晩恭)이라는 사람도 한시로 세시풍속을 표현했다. 그는 '발해고'를 쓴 실학자 유득공의 사촌지간으로, 둘은 양반이기는 하나 선대에 서출의 피가 섞여있어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다. 유만공이 '세시풍요'(歲時風謠·1895)에서 새해 첫 무렵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물녘 마당에 머리카락 태
2015년은 을미년(乙未年) 양띠해다.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띠 개념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먼저 '십간십이지'가 생겨났고, 이후 '십이지'에 쥐, 소, 호랑이, 토끼 등 12개 동물이 짝을 이뤘다. 이처럼 고대 중국에서 십이지에 동물의 이름을 부여한 것은 '농민들에게 시간개념을 주입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십이지 동물띠 개념은 나라마다 이름이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다. 중국의 십이지 동물띠 개념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전래된 후 풍토화 과정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 가축띠가 '축'(丑), 즉 '소'(牛)이나 베트남에서는 '물소'가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또 우리나라는 네 번째 가축띠가 '묘'(卯), 즉 토끼이나 베트남과 태국은 '고양이'(猫)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있다. 이 밖에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 열두번째 띠가 '해'(亥), 즉 돼지이나 일본에서는 멧돼지, 태국에서는 코끼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있다. 문헌상 우리나라에 십이지 동물띠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5세기 후반이다. 승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제1권 '사금갑'(射琴匣) 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다. '왕이 곧 궁에 들어가 금갑을 쏘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이 있었고, 1811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그 이후 국정 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김조순에게 돌아가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부패한 정치로 평가받는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1826년(순조 26). 나라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덩달아 청주는 어수선했다. 그해 4월 김치규(金致奎)라는 인물이 청주읍성 북문에 시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적은 괘서를 과감히 실명으로 투척했다. 그런 어수선함이 가시기도 전에 그해 10월 비슷한 성격의 괘서투척 사건이 청주읍성에서 또 일어났다. 범인을 잡고 보니 요언은 정상채(鄭尙采)라는 인물이 처음 만들어 냈고, 이를 괘서에 적어 투척한 인물은 아전출신 박형서였다. 따라서 훗날 이 사건은 '박형서 역모사건'으로 명명됐다. 조선시대 아전은 달리 향리로도 불렸던 중인계층으로 관청의 일을 보는 등 식자층에 속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늘 쪼들렸다. 사회나 국가에 대해 제도적으로 원한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괘서가 그렇듯이 박형서 것도 미래에 대한 허왕된 내용인 도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①홍경래는 죽지 않았다느니, 서적(西賊)은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②병화가
일제가 청주의 생명수인 무심천을 직강하천으로 만들면서 풍수적 장점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경대 지종학 교수에 따르면 풍수에서의 물은 그 자체가 경제력이자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풍수학에서는 물흐름의 형태와 유속을 유난히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이 경우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의 물은 구불거리면서 서서히 흘러야 양호한 풍수지세가 된다. 명나라 풍수서인 '인자수지'(人子須知)는 다음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풍수의 법은 물을 얻음이 으뜸이다.'(風水之法 得水爲上) '물이 급하게 흐르면 화가 속히 온다.'(水勢急流 禍速) '물의 출구는 굽이쳐 꿈틀거려야 하고, 나를 돌아보고 머무르고자 해야 한다.'(水之出口欲其灣環屈曲, 顧我欲留爲妙) 또 강이나 하천내 섬도 만곡(구불거림)과 마찬가지로 유속을 낮추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지 교수에 따르면 세계 유수 도시의 강은 '다곡'(多曲)에 '多섬'의 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다. 런던 템즈강은 10번의 만곡, 파리 세느강은 10번의 만곡과 6개의 섬, 모스크바의 모스크바강은 9번의 만곡에 4개의 섬, 베를린의 슈프레강은 10번의 만곡에 2개의 섬, 로마의 테레레강은 15번의 만곡의 1개의 섬을 강안에
1804년(순조 4) 청주목이 다시 서원현으로 강등되고 충청도는 광역행정 지역은 공충도바뀌있다. 청주목에 거주하는 한해옥(韓海玉)이라는 사람이 대역죄에 해당하는 흉언(凶言)을 지어냈기 때문이었다. '이조에서 청주목을 서원현으로 강등시키고 충청도를 공충도로 바꿀 것을 아뢰었으니, 죄인 한해옥이 거주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청주에서 일어났던 여러 역모사건과 달리 한해옥 건은 그 전모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16자로 이뤄진 흉언'이라는 것만 『순조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본래 효경의 뱃속에 항상 귀역의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이번 여름 역적 권유·정재민 무리들의 국옥(鞫獄)이 있고 난 연후에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오다가 감히 제멋대로 후매하는 계획을 짜서 소회를 읊은 16자의 흉언을 지어냈으니, 견준 것은 망측하였고 그 뜻은 음흉·사특하였습니다.'- 인용문 중 '효경'의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이라는 짐승을 말한다. 즉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됐다. '귀역'은 귀신과 수상곤충의 일종인 물여우를 일컫는 표현으로 음흉한 사람을 일컫고 있다. 정리하면 △권유 무리의 사건이후 그
1777년(정조 1) 청주목이 다시 서원현으로, 그리고 충청도는 공충도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사진) 홍상범(洪相範·?-1777)이 역모를 도모했고, 그 어머니인 효임(孝任)의 태생지가 청주때문이었다. 홍상범의 역모사건은 그 아버지인 홍술해(洪述海·1722-1777)의 유배가 발단이 됐다. 그는 황해도관찰사 재직중 부정한 돈 4만냥, 세곡 2천5백석, 소나무 2백60 그루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됐다. 이 유배형은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주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상범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거주지인 전주에서 상경, 홍인한·정후겸 등 벽파(僻派)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다. 아버지를 유배지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직접 정조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벽파는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당시의 정치집단으로 세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홍상범의 역모 기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그 뿐만 아니라 아우 필해·지해·찬해 및 조카 상간 등도 함께 주살당하였다. 주살은 죄를 물어 사형시켰다는 뜻으로, 그 방법은 다양했다. 홍술해의
조선시대 청주는 역모사건이 일어나면 '청주목'에서 '서원현'으로 읍호 강등을 당했다. 청주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역모는 숙종6년(1689)의 박상한(朴相漢) 기우제 제문 사건이다. 17세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지구가 기상이변을 겪었다. 기상학자들이 '소빙기'라고 말할 정도로 1만년이래 지구의 기온이 가장 낮았다. 청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빙기에 따른 가뭄이 찾아왔고 따라서 청주목은 자연재해를 주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게 됐다. 이때 제문을 작성한 사람이 유생 박상한이다. '하늘이 가물게 하는 가뭄은 오히려 기도해 물리칠 수 있으나,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 가뭄은 누구로부터 이것을 풀 것인가. 오로지 이러한 가뭄은 가물게 한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사람이 스스로 가물게 한 것이니, 기도해 물리칠 바가 없다.'- 인용문 중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 가뭄은 누구로부터 이것을 풀 것인가'라는 부분이 특히 문제가 됐다. '나라에서 가물게 하는가뭄', 이 대목이 당시 임금 숙종이 정치를 잘못한다고 비유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해석됐다. 다음 문장도 문제가 됐다. '사람이 생각에 없어서 스스로 하늘을 단절하였고, 나라에서는 정사(政事)가 없어서 이미 백성
그동안 행적이 잘 확인이 안 돼 '그림자 독립운동가'라고 불렸던 증평 도안면 출신의 연병환(延秉煥·1878-1926) 선생이 수식어 그림자를 뗄 수 있게 됐다. 연병환은 3대에 걸쳐 5명이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의 중심적인 인물로, 그의 아우 연병호, 딸 연미당, 사위 엄항섭, 외손녀 엄기선 등도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7일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에 따르면 연병환은 지난달 유골 형태로 88년만에 국내로 돌아와 국립 대전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다.그러나 1919년 용정 만세시위운동을 후원하는 등 만주의 행적은 어느 정도 확인됐으나 중국으로 가기 전의 국내 행적은 잘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의 묘지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그 동안은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위패만이 봉안돼 있었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광무양안을 확인한 결과, 연병환은 당시 청안지역에 1만2천2백68척(약 4천13평)의 전답을 소유한 중농이었으나 이를 처분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며 "때문에 국내에 남은 처자를 걱정하지 않고 만주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양안은 대한제국기 고종 정부가 정확한 부세(세금 징수)를 위해 근대적 측량을 바탕으로 작성한 토지대장을 일컫고 있다.
목은 이색(李穡·1328~ 1396)의 영정은 전국적으로 최소 7곳 존재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주시 주성동의 목은영당을 비롯해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충남 서천시(그림), 예산군 삽교읍, 부여군 홍산면, 서울 종로구 수송동,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등에 위패와 함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처럼 이색이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은 빼어난 문장실력과 함께 성리학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그는 우왕의 사부이자 권근(權近·1352~1409)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색은 이런 환경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이념·통치적으로 본궤도에 오르는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색은 충남 한산 출신이고 주로 수도 개성에서 생활했으며 경기도 여주의 여강에서 졸했다. 그는 고려말 청주옥에 잠깐 갖혔던 것을 제외하고는 청주에 장기체류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우리고장 청주를 소재로 빼어난 시를 여러 수 남겼다. 다음은 '돌아가기를 생각하다'라는 시다. 청주에 놀러 왔다가 개성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유포에 가을 기운 깊고 비가 잠깐 개니(柳浦秋深雨乍晴) / 수촌과 산중 별장 경치가 더욱 깨끗하네(水村山墅景彌淸) / 천심은 다 드러나서 나락 풍년이 들었고(天心盡露嘉禾熟) / 시
고려 관리들의 최고 바람은 은퇴 후 별장의 일종인 '별서'(別墅) 생활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지금의 전원생활를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일면이 있어, 시대를 뛰어넘어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목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이정호 교수에 따르면 이규보, 이색 등 고려 문인들이 남긴 각종 문집에는 별서생활에 대한 동경심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별서는 '4가지를 갖췄다'는 뜻에서 '사가재'(四可齋)로 개명했다. '사가'는 밭, 뽕나무, 샘, 땔나무를 갖췄다는 뜻으로, 그 자체가 별서생활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전집』에 관련 내용이 전해진다. '밭이 있으니 갈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뽕나무가 있으니 누에를 쳐서 옷을 마련하기에 가하고, 샘이 있으니 물을 마시기에 가하고, 나무가 있으니 땔감을 만들기에 가하다.'- 이규보는 이어지는 내용을 '내가 이 집에 거하면서 만일 전원의 즐거움을 얻게 되면 세상일을 팽개치고 옷을 떨쳐 입고서는 옛동산으로 돌아가 늙으면서 태평성세의 농사짓는 늙은이가 되리라'(〃)라고 적었다.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로는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있고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사진)에는 일지홍(一枝紅), 봉황지(鳳凰池), 이름없는 기녀 등 청주의 기생도 다수 등장한다. 수양대군 세조가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킬 때 오른팔과 왼팔 역할을 한 인물이 한명회와 권람이다. 한명회는 당시 청주목 땅(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권람은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잠들어 있는 등 우리고장과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만나기 전 청주를 찾았고, 이때 권람은 일지홍이라는 기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러나 몇년 뒤 권람이 다시 청주를 찾았을 때 일지홍은 저승으로 간 뒤였다. 권람은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이렇게 읊었다. '지난 무오년에 놀던 일 생각하면(憶昔來遊戊午年) / 일지홍의 요염한 자태 선비의 간장 녹였지(一枝紅艶惱儒仙). / 오늘 다시 찾아오니 감개가 무량하나(今日重遊還有感) / 가련하다 외로운 무덤 인간을 등졌구료(可憐孤塚隔寒烟).'- 권람은 그후 동시대 문신 강중(剛中·김수온의 자)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가 있었고, 이때 청주기생 일지홍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김수온은 "나도 청주 율봉역의 봉황지라는 기녀를 좋아했는데 몇년 뒤 다시 찾으니 이승에 없었다"라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김수온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에는 충북과 연고가 있는 기녀들이 10여명 등장한다. '한지와 봉매', '전목과 충주기생 금란', '보은현감 성원제와 춘절', '윤현과 청주기생', '송상현과 김섬' 등은 본란에 소개됐거나 비교적 널리 알려진 편이다. 이에 비해 '배극렴과 설매', '신광수와 영춘기생 계화', '충주 교리석(校理石) 전설', '서원기생 일지홍', '송인과 서원기생' 등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진천 인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은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공양왕을 폐한 공으로 조선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됐다. 『조선해어화사』에 의하면 당시 정승 배극렴이 연회석상에서 기생 설매(雪梅)에게 "들으니 너는 동쪽에서 먹고 서쪽에서 잔다더구나. 오늘은 노부(老夫)를 위해 천침(薦枕)하는 것이 어떨까"(제 31장)라고 유혹의 말을 던졌다. 노부는 배극렴 자신, 천침은 첩이나 시녀 등이 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자 설매는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자는 천한 기생의 몸을 가지고 王씨를 섬겼다가 李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사리에 꼭 맞습니다"(〃)라고 독설했다. 모시기는 모
백제 흑색마연토기의 제작 기술이 상당부분 규명됐다.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남상원(박사과정·사진) 씨와 국립문화재연구소 김수경 씨가 백제학보 최근호(제 12호)를 통해 「실험고고학을 통해 본 백제 흑색마연토기 제작기술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백제 흑색마연토기는 표면이 매끄럽게 마연됐고, 이를 통해 흑색의 광택을 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이 백제 토기는 거친 형태의 원삼국기 토기와 형태나 기술면에서 확연히 구분되면서, "한반도 고대 토기사의 전환점이 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어떤 공정에 의해 '반질반질하면서 검은 색을 나타내는 토기'가 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규명된 것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두 사람이 실험고고학적인 방법으로 흑색마연토기에 접근, 100%로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관련 제작공정의 상당 부분을 규명했다. 두 연구자는 자연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흑색 성분은 탄소(C)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규명했다. 이를 토대로 직접 토기 형태를 만들고, 백제 시대 것과 유사한 형태의 가마환경에서 소성(굽기)하는 방법으로 완형의 흑색마연토기를 재현하였다. 연구 결과 백제 흑색마연토기는 ①매우 정선된 태토(일종의 손질된 점토흙)를 사용했고
도내에서 구한말~일제 강점기를 산 역사적 인물로는 단재 신채호의 지명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는 인물로 괴산출신 이능화(李能和·1869∼1943)가 있다. 이능화는 당시 괴산군 이도면 수진리(현 괴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원긍(李源兢·1849-1919)은 문과에 급제한 후 경상도관찰사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는 1990년대 후반에야 시작됐다. 권평 씨는「이능화와 조선기독교及외교사」(1999, 연세학술논집)에서 이능화의 생애 마디를 ①어린시절(1869-1889), ②외국어 공부 시기(1889-1897, ③외국어 교수 시기(1897-1910), ④한국종교사 연구 시기(1912-1920), ⑤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수관 또는 편수위원 역임(1921-1937) 등으로 분류했다. 그는 ①에 대해 '이 시기의 이능화는 한문을 공부하며 과거를 준비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가학으로 공부를 한 셈으로 훗날 수많은 한문전적의 분석과 방대한 한문저술의 초석이 이때 이뤄졌다'고 밝혔다. ②에 대해서는 '상경하여 영어, 중국어, 불어 등 3개 국어를 배워 능통하게 된다. 그가 양반의 자제로서 외국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한지(韓祉·167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월악서소』(月嶽書疏)라는 저서를 남긴 문장가이자, 청렴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이른바 '팔포'(八包)의 법을 엄히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팔포는 조선시대 때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여비(旅費) 등으로 쓰기 위해 가져가는 8개의 포대를 말한다. 각 포대에는 인삼 10근씩이 담겨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신들은 이 팔포를 당나라 사행길에 가지고 가 여비 또는 물품구입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여비를 풍족히 쓰는 것 외에 당나라 물품을 구입, 국내에 들여와 되팔면 적지 않은 차익이 발생했다. 대신 인삼자원은 고갈됐다. 이를 과감히 금지시킨 인물이 바로 한지였다. 그는 1727년(영조 3)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팔포의 법을 엄히 지켜 역관(譯官)이나 비록 대관(大官)이라도 이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의 청렴강직한 성품은 관료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윤리적인 것에도 같이 적용됐다. 조선시대 관찰사(감사)는 임기 2년이 기본으로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대개 홀몸으로 부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관찰사 등 당시 외관들이 합법적으로
조선시대 여성계의 패션을 주도한 계층은 팔천(八賤)의 하나였던 기녀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이민주 국학자료실 연구원이 얼마전 충북대 박물관대학에서 '기녀, 조선의 패션을 이끌다' 주제의 특강을 가졌다. 이 연구원에 따르면 조선시대 기녀는 나이가 젊고 자색(姿色)이 있어야 했으며, 여기에 사대부가 남성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음률(音律)을 해득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번 기적에 오르면 종친이나 사대부가의 첩이 되기 전에는 신분 상승이 어려웠다. 대표적인 경우가 연산군의 연인인 장녹수였다. 그녀는 가난한 까닭에 몸파는 생활-대군집의 여종-시집간후 노래·춤을 배운 후 창기 입문- 궁궐 공연-연산군 발탁·총애 등을 거쳐 숙원(종4품)의 위치에 올랐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 초고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사대부가 이상을 제외한, 평민 여성들이 금은주옥(金銀珠玉)과 사라능단(紗羅綾緞)으로 몸치장을 하는 것을 금했다. 전자는 보석류, 후자는 화려한 비단의 종류를 총칭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기생은 이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이 연구원은 이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으나 사대부가 남성이 기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선물용 선심을 미리 법적으로 장치한 것으
[충북일보] 이범석 청주시장이 취임 2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여지껏 이 시장을 대표할 수 있는 사업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나마 찾아보자면 '꿀잼청주'를 예로 들 수 있지만 이 역시 여러 위락시설 조성사업들을 한 데 모아 이름을 붙인 것일 뿐 이 시장이 민선 8기 들어 처음 주장해 추진했다고 할 만한 굵직한 사업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한범덕 전 시장의 '트램' 사업이나 이시종 전 충북지사의 '무예마스터십', 김영환 현 충북지사의 '레이크파크 르네상스' 등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이들 사업의 성공 유무나 예산의 효율성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꿀잼청주'를 제외하면 이 시장을 대변할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셈이다. 실제로 민선 8기 청주시가 3대 핵심현안으로 꼽은 △우암산둘레길 △청주시 신청사건립 △원도심 활성화 등의 경우 이 시장 취임 이전 집행부에서부터 추진해오던 사업이고, 이 시장은 이 이슈들의 결론을 냈다는 좋은 평가를 받긴 하지만 이 시장을 대변할 사업으로는 손색이 있어보인다. 우암산둘레길의 경우 양방향, 단방향 통행과 둘레길 개발 등을 놓고 그동안 청주지역 시민사회단체와 극렬히 찬반논쟁을 벌여오다 민선 8기 들어 조성됐고,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속보=지난해 청주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40대가 항소심에서도 혐의를 부인했다. 청주지법 형사1부는 지난 10일 강도 상해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A(40대)씨에 대한 항소심 공판을 열었다. 앞서 원심 재판부는 범행 전후로 장갑을 착용하고 옷을 여러 차례 갈아입는 등 범행을 철저히 숨기려고 한 점과 피해자가 상해와 정신적 충격을 받은 점 등을 참작해 A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이에 대해 A씨는 사실오인과 양형 부당을 이유로, 검찰 측은 양형 부당을 이유로 각각 항소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범행한 점과 반성하지 않는 점, 피해자가 엄벌을 탄원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더 중한 형의 선고가 필요하다"며 징역 8년 선고를 항소심 재판부에 요청했다. 반면 피고인 측은 피해자를 폭행한 것은 맞지만, 강도질하려는 마음은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A씨 변호인 측은 "피고인은 원심의 판단과는 달리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근무할 당시 피해자의 거주지를 방문했던 사실이 없다"며 "피고인이 인터넷 도박으로 수억원의 채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강도질하려는 것이었다면 금품이 들어있는 피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제천·단양 국민의힘 엄태영 "우선 저를 믿고 다시 한번 선택해 주신 사랑하는 제천시민·단양군민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제천·단양 국민의힘 엄태영(66)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운동 기간에 강조했던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주민 행복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엄 당선인은 "당선의 기쁨을 뒤로 하고 이번 총선을 통해 저를 재선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주신 지역민분들의 뜻깊은 염원과 열망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책임감이 막중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정부와 여당을 회초리로 매섭게 질책해 주신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며 "분골쇄신(粉骨碎身)의 마음가짐으로 국민의 참뜻을 깊이 되새기며 당의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도 부여된 책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여야를 떠나 제천·단양을 위한 마음은 같았던 만큼 각 후보님들의 지지층까지 체감할 수 있도록 좋은 공약을 함께 공유하고 의견을 적극 경청해 지역 발전을 위해 함께 중지를 모을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는 "오직 제천·단양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완성하라는 지역주민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