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시의 지명을 결정할 때는 여러 유형의 권력 중 기초의회 의원의 지역구 위치가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상대적으로 기초의원 수가 적은 쪽이 통합지명으로 결정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통합을 성사시키기 위해 지명을 양보한 사례인 것으로 분석됐다. 경희대 지리교육과 지상현 교수에 따르면 지명은 지역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다른 곳과 구분짓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지명에는 장소를 특징짓는 요소로 위치, 색상, 풍토, 기후, 교통, 전설, 동식물, 유적, 유물 등 다양한 요소들이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두 지역이 통합돼 불가피하게 하나의 지명을 선택할 상황이 발생하면, 두 지역 사이에는 '자기 지명' 관철을 위한 격렬한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인구, 땅면적, 역사성 등 상대지역을 설득시키기 위한 다양한 논리들이 동원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기초의회 의원들이 수적 분포도인 것으로 분석됐다. 는 1994년을 기준으로 작성된 관련 기초의회의원의 분포도다. 1~7의 지역인 충주시(16), 남양주시(10), 강릉시(21), 보령시(11), 아산시(11), 구미시(24), 문경시(9) 등은 통합 상대지역인
연좌제(連坐制)는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를 말한다. 연좌제에 대한 동양 삼국의 첫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역사 50인의 모략가 중 한 명으로 진(秦)나라 상앙(商革+央)이 있다. 그는 국민을 10호·5호로 조직하여, 그 중 1인이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도 처벌하도록 아이디어를 냈다. 이른바 십오지제(什伍之制)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연좌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전기부터 그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대 이효관(李孝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극형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당시 의정부가 이렇게 아뢴다. '대체로 죄인의 친딸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부가(夫家)를 따라 면죄하거늘, 하물며 효관(孝寬)은 외손(外孫)으로서 연좌되었사오매, 실로 근거가 없다 하겠으니, 바라옵건대…'-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러자 고종과 민씨 일족은 즉각 연좌제를 발동, 개화파 가족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이때 김옥균의 생부인 김병태와 양부인 김병기는 삭탈관직
현재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묘는 일본 동경시내 아오야먀(靑山) 외국인 묘역과 진정사(眞淨寺) 경내, 그리고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무덤은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중국 상해에서 암살됐다는 소식이 일본열도에 전해지자 그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 1835-1901)를 중심으로 '김씨장의위원회'가 구성돼 장례가 치뤄졌다. 그러나 아오야마 묘는 김옥균 시신이나 의복이 매장되지 않은 단순 '위패묘'이다. 대신 묘비명은 존재하고 있고, 이를 지은 사람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다. '오호,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때를 만나 비상한 공이 없이 비상한 죽음이 있었다. 시체는 고굴에 돌아갔어도 사지가 찢기는 욕을 당하였구나.'- 김옥균을 존경한 일본인 중에 카이군지(甲斐軍治)라는 사진사가 있다. 그는 1881년 김옥균을 처음 만난 이후 최후까지 정신·물질적으로 지원한 인물로, 자신이 죽을 경우 "김옥균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김옥균의 묘를 동경 진정사에 조성한 인물이 바로 카이군지이다. 1927년 조선거류민단은 '청물어'(淸物語)라는 책자를
고종은 재위 33년(1896)에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전국 8도를 13도로 개편했다. 이에따라 충청도는 충청좌도로 불리는 곳은 대체로 충청북도, 충청우도로 일컬어지던 지역은 충청남도로 분도(分道)됐다. 충청북도는 2년 후면 시간적 마디의 의미가 무척 큰 2甲, 즉 정도(定道) 120주년을 맞게 된다. 충북도와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定道 2甲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충청도정자료집1'(사진)을 540여쪽의 비교적 방대한 분량으로 출간했다. 특히 이번 출간은 역사 안목이 있는 한 공무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만식(82) 옹은 1955년 첫발을 디딘 후 36년 동안 지방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관련 자료를 꼼꼼히 챙겼다. 최옹은 충북도청 고위직과 단양·보은군수, 제천시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자료집은 합격 및 발령 통지서, 각종 문서, 사무 인수인계서, 상장 및 감사장, 각종 수료증, 각종 위임장, 업무일지, 단체사진, 앨범사진 등 전체 9장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자료집을 한 쪽 한 쪽 넘기면 충북도정의 역사가 파노라마의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중 눈길을 끄는 대목을 일부 살펴보면, 1982년 제천시장으로 발령된 최옹은 당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면, 김옥균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추구했다. 두 사상의 명칭은 다르지만, 한·중·일 삼국이 공존공영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옥균은 삼화주의에 대한 첫 번째 실천으로 당시 청나라 실력자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을 만나고자 했다. '百千의 호위가 있어도 죽을 때에는 죽는다. 인간 만사가 운명이다. 虎穴에 들어가지 않으면 虎子를 얻을 수 없다. 이홍장이 나를 속이고자 하여 겸양한 말로 맞이하며, 내가 그를 속이고자 하여 그 배를 탄다.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유배 지칭)된다면 즉각 끝이다. 5분이라도 담화의 시간을 준다면 내 것이다.'- 전집을 쓴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은 중국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로, 김옥균의 또 다른 일본내 후견자이기도 했다. 인용문 중에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된다면 즉각 끝이다'라는 독백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이는 김옥균 자신도 중국 상해행에 대해 내심 매우 불안해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옥균과 몸종 격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 그리고 홍종우 등은 1894년 3월 23일 여객선 사이쿄마루(西京丸)을 타고 고베항 출발, 3일 후 중국
염수정 신임 추기경은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나 선대 신앙의 뿌리는 옥천, 진천, 충주 등 충북지역에 두루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염 추기경은 이중 신앙의 흔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남아 있는 진천 백곡과 이월 등을 자주 찾았고, 현재도 파주염씨 집성촌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교회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한 성직자 가정 공동체의 신앙 이야기'(2003년)의 저자인 차기진(60·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에 따르면 염수정 신임 추기경의 가톨릭 신앙 뿌리는 5대조인 염덕순(요셉)으로부터 시작됐다.서울 양반가 출신으로 가톨릭 신앙을 수용했던 염덕순은 박해가 심해지자 중부 내륙인 충북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로 피신했다.이후 4대조인 염석태(베드로)는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곳이 있다"는 주위의 말을 듣고 옥천을 떠나 부인 김마리아와 함께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 사기장골로 이주했다.그러나 신심이 두터웠던 두 부부는 1850년 진천 관헌들에 의해 체포돼 경기도 죽산으로 옮겨진 뒤 그해 가을 모두 참수됐다. 죽산으로 옮겨진 것은 진천옥은 공간이 좁았고, 죽산은 도호부로 옥이 넓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겨진 세 아들은 진천 이월면 새울 마을로 거처를 옮겼고,
옥천으로 피신한 김옥균의 부녀를 서울로 최종적으로 데려온 사람은 같은 개화파였던 박영효로 알려져 있다. 동학군의 기세가 충청도와 호남을 휩쓸 무렵 '이윤고'(李允曰+木)라는 사람이 옥천으로 찾아온다. 그는 김옥균이 1차로 일본을 갔을 때 통역으로 따라갔던 인물로,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던 일본군을 따라 우리고장 충북에 들어왔다가 두 모녀를 만나게 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이 아닌 의도된 행동으로 그 뒤에는 박영효가 있었고, 박영효는 뒤에는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1835-1901)가 있었다고 관련 논문들이 공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의 부탁을 받은 박영효가 이윤고에게 김옥균 부녀의 근황을 알아보도록 시킨 것이 된다. 현재 일본 1만엔권 지폐에는 인물 도안이 그려져 있다.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일본 내에서는 근대화 주역의 한 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김옥균이 차관을 얻으러 일본을 갔을 때는 물론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양아버지이자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는 메이지 천왕의 스승이면서 현재 동경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난학숙'을 세웠다. 현재의 산케
김옥균의 부인은 기계 유씨(兪氏)로 두 사람이 언제 결혼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김옥균이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후 일본으로 망명할 당시 슬하에 7살 난 딸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1870년대 중·후반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전투가 벌어진 창덕궁을 탈출, 인천항에서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부인 기계유씨와 딸도 연좌제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시아버지 김병태(金炳台)가 살고 있는 우리고장 옥천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당시 옥천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김옥균의 정변 동지였던 정납이란 인물이 쓴 '옥주유고'(沃州遺稿)에 등장한다. 옥주를 지금의 옥천을 말한다. 정납은 이 유고에서 '김옥균의 처 유씨가 옥천 관노로 있을 때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쓴 것으로, 바둑연구가 이청 씨가 '김옥균 통신'이라는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유씨가 한때 옥천관노가 됐다는 것은 피신해 왔다가 신분이 탄로난 것을 의미한다. 주한일본공사관은 김옥균 부인의 행방이 묘연하자 정보망을 총력 가동했다. 주한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인 스기무라(杉村濬)는 1894년 6월 8일자
고종과 민씨 일가의 수구파들은 갑신정변 때 당한 치욕을 곱씹고 있었다. 고종은 김옥균(金玉均·1851-1894) 암살을 위해 칼잡이(자객)를 거푸 일본에 밀파했다.1885년에 장은규(張殷奎·일명 장갑복 또는 장응규), 1886년에는 지운영(池雲英·1852-1935)을 몰래 보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김의 암살에 실패했다.장은규는 평민출신으로, 고종의 아들(의화군, 후에 영친왕)을 낳았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민비)에게 미움을 받아 궁중에서 쫒겨난 장상궁의 오빠다. 그는 한때 충주 노은면에 살았던 민응식의 주선으로 고종에게 접근해 1만5천엔의 행동자금을 받고 김옥균 암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김옥균을 한번 만난 후 더 이상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거금을 물쓰듯 하며 환락에 빠졌다. 당시 일본경찰은 '요시찰 거동' 제목의 정보문건을 통해 "장은규는 나가사키의 게이샤(유녀)를 첩으로 삼아 고베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다"라고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본관이 충주인 지운영은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인 지석영의 친형으로, 국내 제 1호 사진사이기도 하다. 그는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 간 일본에서 사진술을 익혀 훗날 고종의 초상화용 사진을
충청북도 중부권과 세종특별자치시의 젖줄인 '미호천'이 한 때 '美湖川'과 '尾湖川'이 병기되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본보는 청원군 강내면이 면명 개정과 관련된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지명 미호천의 생성 배경을 면밀히 추적해 봤다. 그 결과, 미호천은 적어도 191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는 '아름다울 美' 자의 '美湖川'과 '꼬리 尾' 자의 '尾湖川'이 병기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청주·청원 통합기념 특별전인 '까치내와 미호천, 그 삶의 여정'을 개최하면서 조선총독부 통첩(通牒·1914년)과 조선지형도(1대 5만·1923년)에 '美湖川'과 '尾湖川'이 병기된 사료를 관련 도록에 실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각도 장관에게 보낸 통첩 제 242호 4항에서 '河川ノ名稱中發音ヲ同クシ漢字ヲ異ニシクルモノハ其ノ一定セムスル用字記載スルコト'라고 지시했다. 해석하면 '하천의 명칭 가운데 발음은 같고 한자를 달리하는 것은 정하여 쓰려고 하는 글자를 기재할 것' 정도가 되고 있다. 이때 통첩은 그 예로 '토(門+者)們江과 豆滿江', 그리고 '美湖川과 尾湖川'을 들었다. 이 과정은 '美湖川'이 이때부터 '尾湖川'을 제치고 공식 지명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극우 세력이 준동하면서 최근의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흡사 구한말 같다는 표현이 적지 않다. 구한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인 김옥균(김玉均·1851∼1894)이다.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이 단행된 지 2갑, 즉 120주년이 되지만 김옥균 서거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풍운아 김옥균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을 '갑신정변'(1884년)이라는 매우 급진적인 방법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하려 했다. 고종실록은 우정국 낙성식장에서 일어난 갑신정변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김옥균 등이 생도 및 장사들을 시켜 좌영사 이조연. (…) 내시 유재현 등을 앞 대청에서 죽이게 하였다. 상께서 연거푸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고 하교하시는 말씀이 있기까지 하였으나, 명을 듣지 않았다. 이때 상의 곁에는 김옥균의 무리 십수 명만이 있었는데, 상이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없게 하였고…'- 이 부분은 고종이 사실상 유폐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민씨로 대표되는, 수구파의 도움 요청을 받은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1천5백명을 이끌고 창덕궁을
엽기적인 행동을 많이 했던 폭군 연산군은 말(馬) 중에도 백마를 좋아했다. 백마육이 양기(陽氣)에 좋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陽氣)를 돕기 때문이었다.'- 2014년은 말띠해, 그중에도 '청마'(靑馬)의 해에 해당된다. 2014년은 60갑자 중 31번 째인 '갑오년'이다. '갑오'(甲午) 중 '오'(午)는 십이지 중 말(馬)에 해당한다. 그래서 2014년은 '말띠해'다. 그리고 말띠 중에서도 '청마'라고 하는 것은 '甲午' 중 '甲'에서 나왔다. 십간에 속하는 '甲'을 오행에 대입하면 '木'이 된다. 이 목은 생명력이 강해 연약해 보이는 풀이 땅 위로 솟아오르도록 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木'은 색깔은 청색, 사계절로는 봄, 방위로는 동쪽, 하루 중에 11~13시, 맛은 신맛, 오장 중에는 간(肝)과 관련이 있다. 말과 관련된 충북도내의 지명들은 이런 시공간성을 간접적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한글학회에서 지난 1970년에 발간한 '한국지명총람 충북편'(이하 총람)을 기준으로 살펴본 결과, 도내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총
대성동에 위치한 청주향교는 이른바 5성, 송조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를,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같이 밝혔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우서(虞書·요순시대 지칭)의 12목(牧) 제도를 본받아 지방관들을 설치하였노니, 주나라의 국운이 8백년간 계속 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운이 장구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청주, 충주 등 전국 12목에 향교도 함께 설치되면서 중앙에서 경학박사가 파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전회에 세종대왕이 1444년 청주 초수리로 거둥했을 때 통감훈의·성리군서·근사록·통감강목·유문(柳文)·한문(韓文)·통감절요·집성소학·사륜집 등 9권의 책을 하사했다고 밝혔다. 이들 책은 역사물이 가장 많고 나머지는 유교적인 내용이다. 통감훈의는
'지명(地名)은 하나의 기준이 아닌, 지리·언어·역사적인 방법론과 통합하여 복합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간을 이루는 것은 지명이 갖는 권력적인 속성이다.' 김순배(한국교원대 강사·교원대 부설고 교사·사진) 박사가 최근 6백60여쪽의 방대한 분량인 '지명과 권력'을 경인문화사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에 따르면 땅이름인 지명은 공간에 자리한 무수한 존재의 형상과 윤곽을 새기며, 그것으로 인해 다른 존재와 구별되고 있다. 이처럼 지명은 이른바 수평적 공간으로의 공시성(共時性·함께 나타나는 것)과 수직적 시간으로의 通時性(통시성·순차적으로 나타나넌 것)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기준이 아닌,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번 학술서의 겉표지에는 김해김씨 한 분파가 '김녕김씨'로 분관(分貫)해 가는 과정을 입증하는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조선후기 들어서면 김수로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김시흥(김알지의 38세손)을 시조로 모시는 이른바 '후김해'(後金海)로 나눠지게 된다. 이때 '후김해'측은 자신들은 구분하기 위해 본관을 '김해'의 옛지명인 '金寧'(김녕)으로 분관하게 되고, 이를
누군가가 직지를 만든 고려 금속활자가 중세 정보화 혁명을 불러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객관적으로 검증된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 인쇄술은 기술력뿐만 아니라, 활자를 이루는 문자 자체가 자모음의 분리가 가능한 소리문자이기 때문에 대량 인쇄가 가능했다. 구텐베르크는 이를 바탕으로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을 출판,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려, 조선 등 우리나라의 전통시대 식자층이 사용하던 문자는 자모음의 분리가 불가능한 한자였기 때문에 조합되지 못하면서, 원천적으로 대량 인쇄는 불가능했다. 가령 어떤 책에서 1만개의 한자 활자가 필요하다면 그에 버금가는 활자를 일일히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같은 동북아시아 문자환경 때문에 역사의 발전이 이뤄졌다는 조선 중기에도 책은 여전히 매우 귀한 존재였다. 중종은 책이 워낙 귀하자 책을 관가로 가져온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이를 베껴(필사) 보관하도록 명령한다. "우리 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옛사람이 전해준 서책이 없지 않을 것이다. 관청에 소장된 서책 이외에 서책을 납입하는 자에게는 상을 후히 주게 하고, 만약 하나뿐인 책은 관에서 필사한 다음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게 하라. 이렇게
청주 우암산 토성에서 발견된 마형대구(馬形帶鉤)와 청동방울(馬鐸)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호서문화유산연구원(원장 이규근)의 17일 발굴내용 발표와 관련, 많은 언론들이 '우암산에서 대규모 토성 확인'에 초점을 맞춰 기사를 보도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초기철기(원삼국기) 유물인 마형대구와 청동방울이 고지인 우암산에서 발견된 사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마형대구와 말 장식용으로 추정되는 청동방울은 주로 고대 무사계급이 사용했던 유물로, 당시 일대에 강력한 권력집단이 주둔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암산 토성에는 백제초기 청주지역의 치소(治所)내지 치지(治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청주역사 여명기의 권력집단은 평지가 아닌, 산중에 상주했다는 논리로 연결되고 있다. 지금까지 백제를 포함한 삼국시대 청주의 치소와 관련해서는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청주읍성(현 성안길) 일대설, 부모산성설 등이 있으나, 어느것도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해왔다. 반면 지역 또 다른 전문가는 "이번에 발견한 우암산 토성을 백제초기 치소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대신 고지성(高地性) 취락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매우 많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3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 추천석 설화다. 충청도 진천에는 양순한 추천석이, 반면 경기도 용인에는 심술많은 동명이인의 추천석이 살았다. 이에 염라대왕이 심술많은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으나 사자는 엉뚱하게 진천의 추천석을 잡아왔다. 따라서 생환시키려 했으나 진천의 추천석은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와 진천 추천석의 혼을 넣어 환생시킨 후 용인에서 살게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설화다. 두번째는 개가한 여인에 대한 설화다. 이 여인은 개가 전에는 진천에 살았으나 남편과 사별하자 용인에 살면서 역시 아들을 낳았다. 이후 양쪽이 서로 모실려고 하자 관가에서 "어머니 생전에는 진천에서 모시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제사로 모셔라"라고 판결했다. 세번쩨 설은 진천과 용인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됐다. 진천은 예로부터 미질(米質)이 좋기로 유명하다. 반면 용인은 산세가 순후에 풍수적으로 명당이 많다고 소문나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묘소도 용인에 위치한다. 그래서 생겨난 표현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것
본보는 지난 11월 15일자에서 '진천서 나온 고문서, 근래 최고의 가치' 제목의 기사를 보도한 바 있다. 이들 고문서류는 채 해독이 끝나지 않아, 전체 6백여점의 내용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나 이들 유물에는 임진왜란 이전 것도 포함돼 있고 또 일기, 고한글 간찰, 분재기(재산 나눔 기록), 구한말 희귀사진도 있는 등 공개 자체가 화제가 됐었다. 평산신씨 충헌공(신잡) 종중의 총무인 신동석(51·사진) 씨를 만나 △유물을 공개한 배경 △그 동안의 보관 방법 △앞으로의 바람 등을 들어봤다. - 종중 전체의 의견으로 충북대 사학과에 고문서류 해독을 의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유물이 자연히 공개됐는데, 이 시점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을 공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평산신씨 지칭) 문중이 보관해 왔지만 한번도 '우리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든 역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유물의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문중에서 계속 보관하는 것은 늘 한계가 있다." - 유물의 내용도 무척 다양한 편이다. 어떤 방법으로 보관해 왔나. "처음에는 진천 논실의 평산신씨 문중 차원에서 보관했다. 그러
보은산업단지 조성 부지인 삼승면 상가리 24-1 현장에서 구석기~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와 유물들이 매우 다양하게 출토됐다. 특히 구석기 문화층과 청동기시대 집터는 보은지역에서는 처음 발굴된 것이어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은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찍개와 ↑개 등이 포함된 구석기시대 문화층과 함께 청동기시대 주거지, 석관묘, 원삼국시대 토광묘, 삼국시대 옹관묘,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조선시대 토광묘, 회곽묘 등 총 90여기의 주거와 분묘 유구를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청동기 전기의 '가락동형' 집터와 청동기 중기의 '송국리형' 집터가 발견됐고, 유물로는 청동기시대의 석검, 석창, 석촉과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 등도 발굴됐다. 이밖에 조선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회곽묘에서는 양태가 양호한 인골도 확인됐다. 우원장은 "보은지역에서 구석기유물과 청동기 집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보은지역 선사~역사시대 생활상을 복원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 이론상 청동기 집터는 장방형의 '가락동형'과 타원형의 '송국리형'으로 대별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유한인보' 제 7호에는 충북을 주소로 두고 있는 포로 수용자들이 정확히 63명 등장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당시 청주군이 31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영동 11명, 옥천 6명, 제천·보은 각 4명, 괴산군 3명 등의 순이다. 이중 오창면 주소자가 무려 12명이나 되는 점은 향후 학계가 연구해볼 대목이다. 도내 출신을 포함한 당시 3천명의 조선인 징병자들은 주로 남양군도(南洋群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남양군도는 마샬, 마리아나, 캐롤라인, 길버트, 뉴기니아 등 태평양 적도 부근에 있는 여러 개의 섬을 일컫는다. 1940년대 미국과 일본간에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필리핀, 하와이 그리고 남양군도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 전열을 다시 갖추면서 1943년에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고, 이후 제해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1943년 11월에는 남양군도의 하나인 길버트 섬, 1944년 2월에는 먀살군도, 6월에는 사이판 섬에 상륙해 일본군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최전선에 배치됐던 우리나라 징병자들도 대거 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됐다.
얼마전 지역 한 일간지가 '자유한인보 제 3호' 발견을 보도했다. 자유한인보는 태평양 전쟁 때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사람들 3천명 가량이 하와이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제작한 주간 소식지를 말한다. 한국인 포로들은 1년 6개월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제 7호까지 소식지를 만들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제 3호 복사본이고 마지막 호인 제 7호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과 함께 종간된 '자유한인보'에는 미국 하와이 포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 등이 기록돼 있다. 가령 제 3호에는 당시 함께 포로생활을 하던 이탈리아 포로들과 축구시합을 했고, 그 결과 3대 5로 졌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밖에 귀국하면 어떤 나라를 건설한 것인가, 또 미군에 대한 고마움 등의 내용이 실려있으나 이중 후자는 다소 의외다. 자신을 포로로 잡고 있는 적국에 대해 고마움을 갖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정서상 맞지 않는다. 당시 미군은 한국 포로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한국인 포로 3천여명은 8명이 한 조가 돼 천막에 수용돼 있었다. 즉 당시 하와이 지역에는 한인 포로를 수용한 천막이 3백70여동 가량 들어서 있던 셈이다. 난민
충북 음성군 원남면이 고향인 최병식(61·사진) 씨는 21년째 백제사, 그것도 백제부흥 운동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따라서 운영하는 출판사 이름도 백제부흥 운동의 마지막 장소의 하나로 비정되는 '주류성'으로 했다. 백제부흥 운동이 벌어졌던 곳은 주류성과 임존성 등 두 곳으로, 이중 주류성이 위치에 대해서는 서천군 한산면과 세종시 전동면 운주산성 등의 설이 제기돼 있다. 그러나 그는 운주산성이 주류성이고,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왕자 부여풍은 운주산성에서 공주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비암사에 머물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확신하에 벌써 20년째 운주산성에서 백제 마지막 의자왕의 원혼을 달래는 고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 운주산성을 백제부흥 운동의 근거기 하나인 주류성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일본서기는 주류성에 대해 '백강에서 가깝고 농사짓는 땅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돌 많고 척박해 농사지을 수 없는 곳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운주산성이 이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주류성은 연기군에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 주류성과 인연을 맺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지난 1992년 운주산에 올랐습니다. 정상
조선시대 수령들이 임지에 나가서 힘써야 할것으로 7가지가 있었다. 이른바 '수령칠사(守令七事)'로, 여기에는 '호구증(戶口增)'도 포함돼 있다. 인구를 많이 늘리라는 뜻이다. 나머지 칠사는 농상(農桑)을 성하게 할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정을 닦을 것, 부역을 균등하게 할 것, 소송을 간명하게 할 것, 서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고칠 것 등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구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아를 언제부터 사람으로 봤느냐는 점이다. 경국대전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무릇 구타로 태아가 사망한 것과 수태후 90일 초과한 것으로 형체가 이뤄진 것이면 타태죄(구타에 의한 낙태죄)로 처벌한다. (그러나) 수태후 90일 이내로 태아의 형체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는 구타상해로 논죄하지 타태죄로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이상에서 보듯 90일 전의 태아는 사람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닌 '잠재적인 인간'으로 인식했다. 전통시대 역대 권력자 중 임산부를 가장 이해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정말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종은 노비가 임신을 했을 경우 노비부부 모두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세종실록 26년
조선시대 인구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문헌으로 '호구총수'(戶口總數)가 있다. 편찬 시기는 다소 불명확하나 대체로 1789년(정조 13) 규장각에서 한성부의 기록을 기초로 9책 분량으로 간행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 1책은 1395년(태조 4)부터 1789년까지 전국의 호구 총수와 1789년 한성부의 인구 상황을 기록했다. 그리고 제2∼9책은 1789년 각 도의 인구 상황을 경기도·원춘도(原春道)·충청도·황해도·전라도·평안도·경상도·함경도 순으로 기재했다. 충청도의 인구 변화에 대한 흐름은 제 4책에서 만날 수 있다. '호구총수'를 보면 1789년 충청도의 인구수는 86만8천2백19명으로 전국 11.7%를 차지했다. 반면 전라도는 122만2천8백4명으로 전국 16.5%의 인구 분포도를 보였다. 이밖에 경상도는 159만9백73명으로 21.5%의 분포도를 보였다. 하삼도의 이같은 인구 추이는 얼마전까지 계속 됐다. 그러다가 세종특별시의 도시 기능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충청권이 호남권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충청권의 인구가 호남권을 근소하나마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금년 5월쯤이었고,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이지고 있다. 안행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현재
우리 눈이 가로로 넓듯이, 읽는 것 역시 가로 문장이 편한 구조로 돼 있다. 한글은 초·중·종성이 한데 모아져 하나의 글자를 형성하기 때문에 가로로 써야 훨씬 능률적이다. 한글의 이런 특장은 IT와 최고의 궁합으로 결합하고 있다. 한글이 갖는 무궁무진한 자모음의 조합성과 인체 구성에 맞는 가로쓰기는 한글을 IT시대의 최강 문자, 그리고 한국을 IT 최강국으로 만들고 있다. 근현대 한글의 역사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주시경과 최현배(崔鉉培·1894~1970) 선생이다. 주시경이 한글문법의 뼈대를 세웠다면, 최현배는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이론을 완성하고 실천했다. 국내 유력 일간지들은 90년대 중반까지도 세로쓰기를 고수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은 그보다 50여년 앞선 지난 1946년 '한글가로글씨연구회'를 만들었고, 70년대는 '한글전용'을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8월 최현배 선생이 청원의 궁벽한 마을인 초정약수를 이례적으로 찾았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 청주지국장인 김동환의 초청으로 '청남학교'에서 한글강습회를 가진 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가 이날 쉽지 않은 발길을 한 것은 '초정약수=한글의 성지'라는 의식을 굳건히 갖고 있었기 때문
[충북일보] 충주 사과 과수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15일 충주시에 따르면 동량면 조동리 건지마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해 전체 매몰 작업에 착수했다. 과수화상병 예찰을 진행하던 시 농업기술센터는 지난 5일 해당 과수원에서 잎맥이 타들어 가는 증상을 발견했다. 농촌진흥청의 정밀검사에서 과수화상병 확진 판정이 나온 14일 시는 3천900㎡ 과수원 전체를 매몰하기로 하고 나무뽑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잎 마름 증상이 나타난 사과나무는 전체 327그루 중 홍로와 양광 등 36그루다. 관련 매뉴얼은 과수화상병 발생 주율이 10%를 넘으면 전체 매몰을, 5% 미만이면 발생 가지만 제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과수원은 과거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선례가 없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이 과수원에서 1.2㎞ 떨어진 과수원에서 과수화상병이 발생한 바 있다. 충주 사과 발생농가 해당 반경 안엔 사과·배 농가 304곳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수화상병 발생 과수원에는 현재 외부인 출입이 차단됐다. 올해 첫 과수화상병이 발생함에 따라 농촌진흥청은 위기 경보 단계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관심은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30대 여성이 새내기 경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주인공은 청주청원경찰서 율량지구대 이의성(31) 순경. 15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5시 40분께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의 한 호텔에서 '공황장애가 있는 여성이 귀가를 못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와 공동대응 요청을 받아 출동한 이 순경과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해 여성 A씨의 귀가를 돕던 중 갑자기 A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당시 여성은 과호흡을 하다 손발이 약간 오그라들고 호흡을 멈추는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이 순경은 A씨의 기도를 확보하고 즉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이 순경은 동시에 지나가던 행인에게 119 구조 요청을 했고 그의 신속한 응급처치로 쓰러진 A씨는 의식을 회복했다. 이후 A씨는 구급대에 인계됐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순경은 "실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본건 처음이었다"며 "혹시나 잘못될까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과거 적십자에서 CPR 교육을 받았던 때를 떠올리며 침착하게 응급 처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보은·옥천·영동·괴산 국민의힘 박덕흠 "우리 동남 4군 군민의 응원과 지지 덕분에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서도 4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 같습니다. 박덕흠을 4선 중진으로 키워준 보은·옥천·영동·괴산군민의 소중한 한 표를 가슴 깊이 담아 앞으로 지역 발전과 좋은 의정활동으로 꼭 보답하겠습니다" 22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4선 중진 의원의 역할과 책무를 고민하며 지역 발전의 세세한 방안을 구상 중인 국민의힘 박덕흠(70) 당선인은 충북일보와 인터뷰에서 선거 운동 기간 약속했던 공약 이행을 통해 지역구인 보은·옥천·영동·괴산군의 발전을 앞당기려는 각오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번 선거에서 박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선거 운동 전 여론조사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한 후보와 지지율이 1%P로 좁혀지면서 초접전 양상을 띠었고, 갈수록 고소 고발도 난무했다.박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한 번 더 일할 기회를 달라"며 진심의 정치를 내세웠다. 이 결과 박 당선인은 4선의 중견 정치인이 됐다. 정계 인사들은 동남 4군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개혁보다 지역 발전을 우선시하고 힘 있는 4선 국회의원을 선택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