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국제정세를 보는 눈이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유입된 서양문물을 보고 개방과 개혁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동생 봉림대군에게 청나라는 오랑캐 국가로 단지 복수의 대상일 뿐이었다. 소현세자의 급서와 부왕 인조의 승하로 보위에 오른 봉림대군(후에 효종)은 포병 10만명 양성을 계획하는 등 북벌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색(色)도 멀리할 정도였다. 나아가 같은 북벌론자인 우암 송시열을 이조와 병조판서에 동시 임명, 북벌을 진두지휘토록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은 이른바 관념론적인 북벌로 효종의 군사적인 북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이는 효종 서거 후 예송논쟁이 두 차례나 일어난 것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우암은 속으로 전전긍긍하였다. 당시 정치 지형은 효종과 송시열이 이끄는 산당(山黨)이 군사적인 북벌을 매개로 암묵적인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벌의 반대는 곧 두 권력 관계의 파탄을 의미했다. 당시 송시열·송준길 등은 산당, 한양을 거주지로 했던 김육(金堉) 등은 한당(漢黨)으로 불렸다. 전자는 대동법 시행을 반
[충북일보] 높은 당도에 훨씬 커진 과실 크기. 반면 한층 얇아진 껍질. 금년은 보은 대추가 과거 명성을 명실상부하게 되찾은 한 해였다. 보은 생대추가 2015 대한민국 과일산업대전에서 전국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보은 생대추는 올 과일산업대전에서 산림과수 대추분야에 내걸렸던 최우수·우수·장려·특별상 등 4개 부문을 싹쓸이했다. 그 중심에 '복조'라고 불리는 보은 생대추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복조는 명성과 달리 씨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품종 등록도 되어 있지 않는 등 미스터리 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복조'는 왜 씨없는 대추가 됐을까 왕 생대추의 대명사가 된 보은 복조는 그 원산지가 경북지역이고,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를 전국적으로 대중화시킨 곳과 사람은 보은지역이고 보은 사람이다. 지난 80년대 보은 삼승면 지역의 대추농가는 경북 지역을 방문해 높은 당도, △씨알이 굵은 과실, △얇은 껍질을 생산하는 대추나무를 가져다가 보은 지역에 식재하였다. 보은지역은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처녀 눈물짓는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의 대추 명성지역이었으나 지난 1950년대 빗자루병이 창궐하면서 그 명성을 잃었었다. 보은지역 대추
이명상(李明相, ?~1909)은 단양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호좌의진 이강년부대의 청풍 단양 장의장으로 활약한 후기 의병장이다. 이강년이 순국한 뒤에는 김상태와 함께 김상한 부대의 소모장으로 청풍·단양·충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충북 굴지의 한학자 의병장 이명상은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가족관계나 어린 시절 등은 자료 부족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908년 7월 일제 경시총감관방주리(警視總監官房主理)인 경시 청목계삼(靑木戒三)이 그를 추적 조사한 비밀조사 보고서(警秘 제2944호의 1, 1908. 7. 16)가 남아 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그의 인상에 대하여 나이는 54∼5세로 머리는 검으나 수염은 희끗희끗하고, 얼굴은 평평하고 둥글며 마마자국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와 친교가 있는 사람이 서울에 고관으로 있으며, 7촌에 해당하는 인척이 헌병 정위(正尉)인데 역시 서울에 살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특히 그를 '충청북도에서 손꼽히는 한학자'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학문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그는 일찍
[충북일보] 속리산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을 둘러싸고 최근들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사용된 재료에 따라 시멘트 미륵대불, 청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 순으로 불리워져 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조각가인 김복진은 1939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제작했다. 그리고 월탄스님이 주지로 있던 1987~1990년 사이에는 청동미륵대불, 석지명 스님이 주지로 있던 2000년에는 청동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가 진행됐다. 이후 청동색 녹이 배어나오면서 금년 4월까지 3번째 개금불사가 진행됐다. 금동미륵대불은 말 그대로 금동+미륵+대불의 조합어이다. 일련의 진행을 보면 법주사는 불가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이것들에 집착(?)을 보이고 있다. 금동은 곧 황금색을 의미하고, 따라서 석불, 철불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불상은 황금색을 나타내고 있다. 황금색에는 부처의 이른바 32길상(吉相)이 관여한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의 표현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
[충북일보] 이중봉(李重鳳, 1871~?)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이강년 부대에서 활동했던 후기 의병이다. 그는 일제의 가속되는 침략과, 특히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소식에 분개하여 의병으로 봉기하였고, 이강년 부대에서 우군장과 소모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제천을 중심으로 한 호좌의진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이강년이 가장 신뢰한 부하 의병이었다. ◇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통탄하다 이중봉은 충청북도 청풍군 도화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중봉(李中鳳)을 사용하였다. 그의 본관이나 가족, 어린 시절 등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거의 알 수 없다. 국가보훈처에서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조차 그의 생몰년이 모두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1908년 일제의 통감부 문서를 통하여 그가 1871년 출생이라는 사실과, 『폭도사편집자료(충청북도편)』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청풍군 출생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몹시 혼란한 상황이었다.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이권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에는 25개 교구가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제 5교구 본사로, 도내에만 60여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종갓집격인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했다. 법주사의 법주는 '법이 머무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이는 창건 설화와 관련이 깊다. 창건주 신라의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고, 따라서 '법주사'라는 사찰명을 지니게 된 것으로 구전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설화로, 사찰명 '법주사'가 역사 기록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이다. 법주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철기(鐵器)에는 '統和二十四年歲次 / 丙午正月▨▨成幢 / 棟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통화(統和) 24년째 되던 해인 병오년 정월 일에 당(幢)을 주조하여 만들었다. 동량(棟樑)은 법▨(法▨)이다. ▨▨▨▨.' 정도가 된다. 명문 '法▨' 가운데 뒷글자가 마모돼 있어 '住' 자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나 전문가들은 '住'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통화 24년째의 병오년은 고려 목종
[충북일보] 교토의 북서쪽의 교외에 위치하는 이와쿠라에서 1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 9월 말이 되니 어느새 아침·저녁으로는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가 되었다. 2009년 9월 27일, 그 동안 미루고 있었던 우지(宇治) 답사를 위해 이와쿠라를 나섰다. 이와쿠라는 일본의 동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작은 맨션 몇 개를 제외하고 주변 대부분이 단독주택으로 구성되어 있다. 깔끔한 단독주택의 주차장에 벽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주차한 차가 눈에 띈다. 주차에도 그들의 깔끔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엿보인다. 이와쿠라에서 우지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이와쿠라에서 버스를 타고 국제회관역으로 가서 교토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교토역에 도착하면 된다. JR교토역에서 JR이나리역에 도착하면 후시미이나리신사, JR우지역에 도착하면 교토 우지 평등원에 갈 수 있다. JR대신 게이한 전철로 가고자하면 기온시죠역이나 산죠역에서 탑승하면 되는데, 교토에서 우지로 가는 게이한 전철은 2층으로 된 특급 열차로 매우 깨끗하고 고급스럽다. 게이한 우지역에는 평등원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 이 버스를 타면 우지시의 우지신사 근처의 마을 입구까지 무료로 갈 수 있다. 우지천을 마주보는
[충북일보] 보은 지역에 조선시대 유명 인물과 관련된 기념물이 잇따라 이주해 오고 있다. 그러나 도로변에 안내 표지판이 설치돼 있지 않는 등 무관심으로 인해 이를 활용할 기회를 저버리고 있다. 역사가들은 조선 세종대의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그 중심에는 이천(李O·1376∼1451)과 장영실(蔣英實·?~?)이라는 인물이 위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천은 무신이자 과학자로서 세종대의 해시계·금속활자·화포 개발과 개량을 주도하였다. 특히 이천은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미려한 것으로 평가받는 갑인자(甲寅字) 개발을 주도했고, 세종은 이를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板)을 만들고 주자(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천은 예안(지금의 안동) 사람이나 그를 추모하는 전각인 추원각(追遠閣)이 보은군 장안면 오창리 70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전각 건물 안에는 이천이 무신으로서 세종대 육진을 개척한 내용을 기록한 '세종유서'(世宗諭書) 현판도 존재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에도
[충북일보] 최성천(崔聖天, 1884~1910)은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의 휘하 장수로 알려져 있는 의병장이다. 그는 1910년에 소백산맥 이남의 산간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20명 내외의 소규모 병력을 지휘하며 안동·예천·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는 등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베일에 가려진 의병장 최성천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한 편이다. 다만 일제의 기밀문서에 의거해서 1884년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재판 판결문 기록을 통해 광부 출신으로서 충주 신기리(新基里)에 살았다는 정도의 사실만 확인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판결문에도 그가 살았던 충주 신기리가 어느 면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충주 일원에는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신기리라는 지명은 없었다. 다만 현재 충주와 인접해 있는 괴산군 괴산읍과 문광면에 신기리가 있는 것이 확인되는 바, 이 신기리를 충주 신기리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그가 서울 시해동(柴楷洞) 출신이라는 기록과 강원도 영월 하동면 직실리(稷實里)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으로 확실
통일신라시대 내제군(奈堤郡), 고려시대 제주군(堤州郡), 조선시대 제천현(堤川縣), 대한제국 이후 제천군(堤川郡), 현 제천시(堤川市). 이상에서 보듯 제천의 지명은 전통적으로 '둑'〔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의림지(義林池)의 유명성이 지명으로 옮겨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삼국사기》 지지리를 보면 제천은 삼국시대 때는 '내토군'(奈吐郡)으로 불리었다. 어문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내'는 흐르는 '내'〔川〕, '토'는 '둑'〔堤〕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시 삼국시대 제천의 지명 '내토군'도 의림지에 포섭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제천은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川), 의원(義原), 의주(義州) 등의 별호(別號)를 갖고 있었다. "제주는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으로 신라 경덕왕이 내제군으로 했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14년(1483)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 8년에 이를 없앴으며, 현종 9년(1668)에 내속하였고 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다. 별호를 의천(義川)이라 하며 또 의원(義原)이라고도 불렀다."- 별호는 글자 그대로 본래 명칭 외에 다르게 불려지는 호칭을 의미하고 있다.
현재의 경상도 지역의 지리적 경계는 마치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서쪽으로는 소백산맥〔백두대간〕 줄기가 아구리가 좁은 U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고, 그 가운데를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같은 닫힌 구조의 지형에서는 배타적이고 폐쇄성이 강한 문화가 발달하기 쉽다.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서 보듯 팔도 가운데 경상도 사투리는 유독 발음이 강하다. 어문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경상도의 닫힌 지리구조에서 찾고 있다. 신라는 고대부터 이같은 환경탓에 백두대간을 늘 의식했다. 신라는 아달라왕 3년(156) 충주~문경 사이에 위치한 계립령을 처음으로 열었다. 다른 지역 입장에서 보면 고갯길 하나 뚫은 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역사적인 일인 양 《삼국사기》에 기록하였고, 이후부터 계립령에는 '우리나라 역사문헌에 등장하는 제 1호 고개'라는 서술어가 따라다니고 있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대부터 백두대간을 돌파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달걀껍질을 쪼고 나오려는 모습과 같았다. 그 결과, 신라는 550년 백두대간 죽령(689m)을 넘어 단양에 적성비(赤城碑·국보 198호)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충북일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고인이 생전에 행하였던 '휘호 정치'가 새삼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연초에 써 언론에 공개한 '대도무문(大道無門)', '유시유종(有始有終)', '제심합력(齊心合力)', '무신불립(無信不立) 등의 휘호는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도무문'은 지난 1993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과 1995년 김종필 전 민주자유당 대표와의 갈등 때, 1997년 임기 후반기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뜻의 '유시유종'을 휘로로 썼다. 이밖에 1998년 IMF 때는 힘을 합쳐 외환위기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제심합력', 이회창 전 총재와 갈등 때는 신의를 강조한 '무신불립' 휘호를 썼다. 이들 휘호 가운데 YS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한 것은 '대도무문'이다. 그러나 대도무문은 본래의 의미가 다르게 알려진 가운데 지금도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YS는 유혹에 흔들리거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바른길을 걷겠다는 의미로 대도무문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대도무문은 본래 불교 가운데 선(禪) 불교, 그리고 그 지적 재산권은 중국남송 이종(理宗) 황제 때
[충북일보] 서상열(徐相烈, 1854∼1896)은 1895년 제천의병에 참가하여 선봉장 역할을 한 인물로, 학문으로는 김평묵과 유중교 문하에서 수학하여 화서학파를 계승하였다. 그는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 강경한 투쟁노선을 갖고 대항하면서 의(義)를 실천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한말 전기의병장이다. ◇위정척사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다 서상열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서제순(徐濟淳)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호는 경암(敬菴), 당호는 춘수당(春睡堂)이며, 본관은 달성이다. 서상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바르고 굳세었다고 한다. 그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문장에도 또한 능하였다. 그는 당시 조정에서 묄렌도르프[P.G M·llendorf, 穆麟德]를 병조참판에 임명하자 이를 개탄하며 '이런 판을 어떻게 사대부가 벼슬할 만한 때라고 하겠는가' 하고서는 포천으로 낙향하였다. 서상열은 영평(永平)에 거주하였던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화이(華夷)와 인수(人獸)에 대한 분별을 깨닫고 위적척사사상을 강화하였다. 이후 1889년 유중교(柳重敎)가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였음을 듣고는
[충북일보] 교토의 교외 남쪽을 낙남이라고 하는데, 낙남에는 도후쿠지(東福寺)ㆍ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神社)ㆍ우지가미신사(宇治上神社)ㆍ뵤도인(平等院)ㆍ다이고지(醍·寺)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신사가 있다. 후시미의 남쪽에서는 가쓰라강과 가모강이 합쳐지는데, 교토의 서북쪽에서 발원된 가쓰라강이 가모강보다 훨씬 수량이 많은 강이기 때문에 합쳐진 후에도 강의 명칭은 가쓰라강이 된다. 이 강은 다시 교토부와 오사카부의 경계에서 우지천(宇治川)과 기쓰강(木津川)이 합류하여 더욱 큰 강인 요도가와(淀川)가 된다. 이 일대는 도래인과 깊은 관련을 가진 곳이 많다. 예를 들어 기쓰강이 휘감고 흐르는 교토부 기쓰가와시(木津川市)의 고마데라(高麗寺)터에서는 2007년에 일본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기와 토담장이 발견되었다. 이 사찰은 610년께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이 창건한 것인데, 고마(高麗)씨의 가족 사찰로 알려진 고려사는 나라(奈良)현의 아스카(飛鳥)사와 함께 일본 최고의 절로 알려져 있다. 2008년 교토부 재류외국인 통계에 따르면, 교토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41,119명인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27,060명으로 70%정도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충북일보] 조선 왕실은 태(胎)는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명당자리를 고른 후 해당 예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그 시설물이 태실(胎室)이다. 나아가 왕실은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했다. 우리고장에는 진천군 진천읍의 김유신 태실, 충주 엄정면 괴동리의 경종대왕 태실, 청주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대왕 태실, 보은 속리산면 사내리의 순조대왕 태실,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 등 5개 태실이 존재한다. 왕명과 인명이 부여된 것에서 보듯 이들 태실은 주인이 모두 확인된다. 이에 비해 충청북도기념물 제 96호인 청주 문의면 산덕리 태실은 지명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태실의 주인이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역 학계는 대체로 선조의 7번째 아들로,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인성군(仁城君)을 산덕리 태실의 주인으로 보고 있다. 태실비는 높이 98㎝, 너비 46㎝, 두께 14㎝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고, 그 뒷면에
[충북일보] 전어(錢魚)는 가을 이후가 제철로, 지금이 그런 시기에 해당한다. 전어의 어원이 재미있다. 백과사전은 전어에 대해 '등쪽에 갈색 반점의 세로줄이 여러 개 있고 아가미 부근에는 커다란 흑색 반점이 존재한다'고 쓰고 있다. 바로 전어는 흑색 반점이 '동전'〔錢〕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어와 관련된 속담으로 '봄 도다리, 가을 전어' 그리고 '가을 전어는 깨가 서말이다' 등이 있다. 전어는 산란기인 봄에서 여름까지는 맛이 없지만, 가을이 되면 체내에 지방질이 축적된다. 따라서 생선으로 구울 때 지글거리며 특유의 냄새가 난다. 그 내음이 매우 고소하기 때문에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가던 며느리가 돌아온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최근 모 방송인이 고소를 많이 한다고 해서 '고소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도 상소를 많이 하는 '상소남' 선비들이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조헌(趙憲·1544-1592)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조헌은 임진왜란 가능성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1년전 도끼를 메고 한양 궁궐로 올라가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했다. 지부상소는 나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도끼로 쳐달라는 의미를 지닌다
[충북일보] 속보= 증도가자와 관련된 진위 논란이 과학의 영역인 금속공학 분야로 옮겨붙고 있다. 이에 따라 증도가자 위변조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음과 동시에 논란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3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강태이 연구사가 증도가자 위작 가능성을 제기한 데 이어, 이번에는 경북대 남권희 교수에 의해 증도가자로 지목돼 온 금속활자에서 '테크네튬'(Tc)이라는 인공원소가 검출됐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한겨레〉 15일자 기사에 의하면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이재정 학예연구관이 14일 열린 한국서지학회 가을공동학술대회(국립중앙도서관) 토론에서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증도가자로 지목한 '법'(法) 금속활자의 문제성을 거론했다. 그는 "남교수가 용역을 수행한 보고서를 보면 '법(法)'자의 성분 구성은 산소(O) 1.74%, 규소(Si) 0.49%, 구리(Cu) 88.5%, 테크네튬(Tc) 2.62%, 주석(Sn) 6.66%로 나와있다"며 "그런데 미량이 나온 테크네튬(원자번호 43)은 과학자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최초의 원소로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따라서 이런 원소가 검출됐다는 것은 활자를 위
[충북일보]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은 영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1912년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이다. 그는 대전에서 태어났으나, 1883년 영동으로 이사한 뒤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1888년과 1903년에 각각 의금부도사, 홍문관의 서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하자 「토역문(討逆文)」을 작성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했으며,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다. ◇ 충북 영동에서 제자 양성에 주력하다 송병순의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1839년 4월 10일 충남 회덕(懷德) 석남(石南)(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 아버지는 면수(勉洙), 어머니는 이씨이고,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송병순은 7세 때부터 참의를 역임한 백숙 달수(達洙)와 좌의정을 역임한 당숙 근수(近洙)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공부했다. 송병순에게 있어 성리학은 단순한 차원의 학문이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로서 마땅
[충북일보] 申八均(1882~1924)은 진천의 전통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로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김경천·이청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 '군인계의 삼천'이라 칭해질 만큼 남만주 일대의 무장투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사, 특히 만주지역 무장투쟁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로서, 대한제국 군대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연계하는 가교적 인물이다. ◇ 진천 논실 전통 무반가문의 후예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한성부 판윤을 역임한 신석희(申奭熙)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동천(東川)이다. 그를 '삼천'의 한 사람으로 부른 것은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관원이력서·에는 거주지가 충북 진천군 이곡면(梨谷面) 노곡리(老谷里, 현재의 이월면 노원리)로 되어 있다. 그의 선대는 무관 벼슬을 하였던 사람들이 많다. 그의 고조부 홍주(鴻周)는 4형제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순조 대에 훈련대장을 지냈고 형 봉주(鳳周)와 응주(應周)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와 포도대장을 지냈다. 증조부 의직(義直)도 무과에
[충북일보]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가 주최한 '젓가락 페스티발'이 청주 예술의 전당과 백제유물전시관 등에서 내달 17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 이어령 조직위 명예위원장(전 문화부장관)은 국제 학술심포지엄에서 "젓가락의 종주국을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어느 나라가 더 젓가락 문화를 보존하고 젓가락 정신을 잘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밝혔다. 현재 젓가락 문화는 한·중·일 삼국과 베트남·타이·미얀마 등 동아시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지만, 그 기원은 대략 3천년전 중국에서 제사와 관련해서 태동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갑골문의 '鄕' 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갑골문 존재하던 시기, 즉 중국 은나라(BC1600~BC 1046) 때는 젓가락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440년)였다. 당시 제관(祭冠)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옮길 때 감히 손으로 함부로 쥘 수 없어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지배층들이 이 같은 모습을 모방해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면 정인(淨人·깨끗한 사람), 그렇지
[충북일보] 가야계 신라인 하타씨가 교토의 서북쪽 가쓰라강이 흐르는 사가노(嵯峨野)에 정착하여 당시 황무지였던 이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말이었다.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교류지(廣隆寺)ㆍ누에신사(蠶の社)ㆍ뱀무덤(蛇塚)에서 좀 더 서북쪽으로 가면 아라시야마(嵐山)를 휘감고 흐르는 가쓰라가와를 만나게 된다. 아라시야마 주변의 넓은 들판을 사가노라 하는데, 사가 들판의 북쪽에는 해발 924m에 달하는 아타고산(愛宕山)이 위치하고 있고 아타고산 동쪽으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인화사ㆍ용안사ㆍ금각사 등의 사찰이 있다. 가쓰라강은 아라시야마를 끼고 남쪽으로 흘러서 교토의 남쪽에서 가모가와(鴨川)와 합쳐지고 더욱 교토부(京都府)와 오사카부(大阪府)의 경계인 야와다시(八幡市)에서는 우지가와(宇治川)ㆍ기즈가와(木津川)와 합쳐져 요도가와(淀川)가 된다. 아라시야마역에 도착하면 가까운 거리에 가쓰라강을 건너는 도게츠교(渡月橋)가 나타나고 도게츠교 주변에는 호린지(法輪寺)ㆍ마쓰오신사(松尾神社)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하타씨가 이민을 와서 개척한 땅이었으므로 1,500여년에 걸친 역사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살아남은 하타씨의 유적ㆍ문헌ㆍ구전이 전해
[충북일보] 농업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국가재정의 밑바탕을 차지했고,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리 시설의 개설과 유지·보수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차치하였다. 수리시설 가운데 제언(堤堰)은 벼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그 등장 시기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이 듣던 수산제·벽골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대국가 단계인 삼국시대 들어서면 제언에 대한 기록이 부쩍 증가한다. 이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미곡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인공 제언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논을 '오답(奧沓)'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수리시설이 발달하면서 고려시대에는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역시 제언은 축조와 관리에 많은 비용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이 투입되었고, 따라서 제언의 건설 및 유지 관리는 보통 국가가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도에는 제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를 보면 당시 관내에는 남일면, 북강내일면, 산외일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북강내이면, 수신면(현 천안시), 서강외이면, 서강외일면, 서강내이면, 남이면 등에 11개의
[충북일보] 후고구려의 궁예(弓裔·?-918)는 왜 '청주인호 일천'(淸州人戶 一千)을 철원성으로 옮겨 도읍을 설비하게 하였을까. 강원도가 최근 후고구려[태봉국]의 철원성 발굴·복원 계획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궁예의 '청주인호 일천' 정책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태봉국의 수도 철원성은 현재 DMZ 내에 위치하면서, 해당 면적이 남북으로 비슷한 규모로 나뉘어 있다. 궁예는 후고구려(901)를 건국한 후 국호를 마진(摩震·904년)에 이어 태봉(泰封·905년)으로 바꾸었고, 태봉기에 지금의 강원도 철원 일대를 도읍지로 삼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그 직전인 서기 904년 '청주인호 일천'을 철원성으로 이주시켜 도읍을 설비·축성케 하고 병력의 핵심 기반으로 삼았다. '청주의 인호(人戶) 1천호를 철원성으로 옮겨 서울을 삼고, 상주 등 30여 주현을 공취하니, 공주장군 홍기가 와서 항복하였다(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이때의 '청주인호 일천'이 1천 명(名) 또는 1천 호(戶)를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략 후자는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궁예의 이같은 결정은 중세 최대의 이주정책으로 평
[충북일보] 백남규(白南奎, 1884~1970)는 충추 출신으로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1907년 군대강제해산 이후 경북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이강년 의병진에 합세하여 우선봉장·도선봉장 등으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2회에 걸쳐 23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 우국노인회 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지만, 김구 암살 이후 대외적인 활동을 모두 그만두고 야인으로 여생을 보냈다. ◇ 기운 센 소년이 군인을 꿈꾸다 백남규는 1884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131번지에서 농사를 짓던 백낙성(白樂成)과 남양 홍씨의 2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남수(南壽), 호는 운암(雲庵)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 수는 없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용맹한 기상의 소유자로 전쟁놀이에서는 항상 대장이 되었고, 힘이 장사라 씨름판에 나가서는 황소를 여러 번 끌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던 그는 어른이 되어서 반드시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지니며 성장하였다. 군인의 꿈을 품고 있던 그는 17세에 대한제국의 사관학교인 육군무관학교(陸軍
[충북일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싸고 국론이 양분돼 있는 가운데, 충주 출신으로 중앙에서 활동한 4인의 역사학자들이 새삼 지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신형식(76), 최규성(74), 최근영(78), 이호영(작고) 씨 등 4인으로, 지역에서는 이들을 충주출신 역사학자 4인방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출생 시기가 1930년대 말~1940년대 초반으로 비슷하고, 충주에서 고등학교내지 충주사범을 졸업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최몽룡 전 서울대 명예교수가 성추행 파문으로 국정 역사교과서 대표필진에서 자진 사퇴하면서 사실상 해당 조직을 이끌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그는 한국고대사~삼국시대가 전공으로 《한국고대사의 신연구》, 《새로 밝힌 삼국시대의 역사적 진실》 등을 대표 논저로 갖고 있다. 최규성 전 상명대학 교수는 고려시대가 전공으로 《고려 태조의 경제 정책》, 《고려초기 여진관계와 북방정책》 등의 대표 논저를 갖고 있다. 지난 2006년 퇴임했으나, 외부 강연 등을 통해 현역 못지않은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영 박사는 대학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는 서울 현대고를 거쳐 국사편찬위원회 자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