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고려 제 5대 임금인 경종(955~981)은 관리들의 봉급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 제도에 의해 고려의 관리들은 가을철이 되면 농민의 개인 농토에서 수확량을 10%를 가져갔고, 또 땔감을 채취할 수 있는 임야를 제공받았다. 그런 전시과는 벼슬의 높고 낮음인 관품(官品), 그리고 인품(人品)에 따라 토지를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이 가운데 인품은 시행 초기부터 골칫거리가 됐다. 인품은 개성 신·구 세력의 정치적 흥정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주관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경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목종(穆宗, 980~1009)이 초기 전시과의 불합리성을 개혁하였다. 본명이 왕송(王誦)인 목종은 전시과 외에 학문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행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성애를 즐긴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종의 생모는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이다. 그녀는 중 김치양(金致陽·?~1009)과 불륜에 빠져 아들을 낳았고, 목종이 후계자로 정한 당숙 대량원군 순(詢)을 제치고 그 사생아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목종은 둘의 음모를 눈치채고 서경(평양)에 나가있는 강조(康兆)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
[충북일보] 중국 어선들의 서해 불법어로 행위가 빈발하고 있는 가운데, 조선시대에도 '당선'(唐船)의 해상 불법행위가 거의 일상화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떼로 몰여온 당선들은 서해 백령도를 통째로 에워싸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그 정도가 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민덕기 교수가 얼마전 《한일관계사연구》 제 42집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명나라 조정은 왜구의 침략 행위가 극성을 부리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외국과의 무역과 선박 왕래 등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금(海禁) 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한 조각의 널빤지도 바다로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不許寸板下海)는 표현이 등장했다. 조선도 이 시기에 왜구의 노략질에 대한 방어책으로 먼 바다 항해 금지, 섬비우기 등을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로 인해 왜구가 더욱 창궐을 하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1360~1424)부터는 해금정책을 완화했다. 그러자 '황당선(荒唐船)'으로도 불렸던 당시 중국 어선들이 서해에 대거 출현,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명나라에 이어 등장한 청나라도 대만 정씨(鄭氏)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정씨정권
'임꺽정(林巨正)'은 우리고장 괴산출신 홍명희(洪命憙·1888~?)가 지은 일제 강점기의 장편소설로 유명하다. 그러나 임꺽정(?~1562)은 조선 중기인 명종대에 실존했던 도적의 우두머리이다.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을 꼽은 바 있다. 백정 출신으로 알려진 임꺽정은 서울까지 진출하는 등 신출귀몰하였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사론(史論)에서 이렇게 썼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조선 조정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다. 임꺽정을 생포한 인물은 당시 경기·황해·평안도의 3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1570)이었다. 토포사는 조선후기 도적이나 반란 세력의 진압 임무를 맡은 특수 관직을 말한다. '국조인물고'는 남치근이 임꺽정을 체포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재령(載寧
[충북일보] 괴산군 청청면 화양리의 만동묘(萬東廟·충북도기념물 제 25호) 계단이 비정상으로 좁고 가파른 것은 풍수와 주역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청운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정해 씨가 《한국문화연구》 제 22호에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만동묘 건물은 묘우 5칸, 가운데 문 3칸, 좌우 좁은 문 각 1칸 등이고, 이를 오르내리는 계단은 숨을 몰아 쉴 정도도 매우 가파르면서 좁은 구조를 하고 있다. 실제 현장을 가보면 발을 전후가 아닌 좌후 횡방향으로 디뎌야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만동묘가 명나라 황제를 모신 것이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경건함과 엄숙성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단을 그렇게 조성했다는 견해가 존재해 왔다. 그러나 박씨는 이를 반박, "풍수와 주역적인 이유 때문에 의도적으로 계단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논문에 의하면 만동묘가 입지한 터는 높다란 언덕 위에 입지하고 있으나, 풍수의 최종 목표점이라 할 수 있는 혈처에 입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주산과 이를 마주 보는 안산 그리고 좌우의 청룡과 백호가 뚜렷하게 입지하고, 그 사이로는 혈처에 생기를
[충북일보] '신라 지배를 받던 진천의 특정 집단이 전망이 빼어난 야산에 화장묘를 오랫동안 집단적으로 조성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진천 종합스포츠타운 조성사업 부지인 진천읍 신정리 38-12번지 야산(137m)에서 장골기(藏骨器)가 사용된 신라시대 집단 화장묘가 발굴돼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원장 장준식)은 지난 3월부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사업을 벌여 최근 신라 석곽묘 2기, 화장묘 20기, 토광묘 1기 등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신라 화장묘는 왕성이 있었던 경주에서 여러 기가 발견된 사례가 있으나 지방에서, 그것도 장골기 20기의 화장묘가 집단적으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기의 화장묘는 묘제에 따라 대략 △단순형 △이중형A △이중형B △이중형C 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단순형은 원형의 U자 세로구덩(수혈)을 판 후 골분이 담긴 장골기를 안치한 사례로 13기가 발굴됐다. 이중형 A는 넓은 구덩 안에 다시 작은 구덩을 판 후 용기를 매립한 경우로 2기가 발견됐다. 이중형 B는 골장기를 매납한 후 주변에 돌을 세워 이를 보호한 유형으로 4기가 발견됐다. 이중형C는 대형 토기 안에 소형
문명의 발달이 빨라지기 시작한 고려시대에도 높은 고개를 넘기는 종종 쉽지 않았다. 도둑이 들끓었고 맹수인 호랑이도 자주 출몰했다. 김부식이 지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호랑이와 불한당으로 인하여 올라오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주저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하며, 반드시 많은 동행자가 생기고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도록 서로 경계 하였는데도, 오히려 살해를 당하는 자가 1년이면 수백명에 달하게 되었다.' 고려 조정은 그 대책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국립숙박시설의 일종인 혜음원((惠陰院)을 세웠다. 혜음원지는 현재 사적 제464호로 지정돼 있고, 이곳을 방문하면 숙박시설 외에 절터와 행궁지를 만날 수 있다. 충북 백두대간에는 제일 북쪽의 단양 영춘면에 여촌령(呂村嶺, 늦은목이), 맨 남쪽의 영동군 상촌면에 우두령(牛頭嶺)이 위치하고 있다. 모두 24개 영로이다. 이들 영로 가운데 충북 백두대간 세번째 고개인 고치령(串赤嶺) 정상에는 산신당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산신령과 단종을 신격화한 그림이 산싱당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고치령 산신당은 충북 북부와 경북 북부를 넘나들던 보부
[충북일보] 고려 초기 충주지역의 대호족이었던 충주유씨는 남한강 수운을 정치·경제적 기반으로 했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이와 관련하여 충주유씨의 당시 세거지로 지금의 중앙탑면 남한강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함께 나왔다. 전북대 대학원 유선영(柳善永) 씨가 얼마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은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충주유씨 긍달(兢達)이다. 그녀는 왕건과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고, 이 가운데 2남 왕요(王堯)는 고려 제 3대 국왕인 정종(定宗)이 됐다. 그리고 3남 왕소(王昭)도 보위에 올라 제 4대 임금인 광종(光宗)이 됐고, 장녀 낙랑공주는 귀순한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 출가하는 등 고려 전기의 외척 가운데 권력의 최고 정점에 도달했다.. 유씨의 논문에 의하면 이처럼 충주유씨가 당대 최대 호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한강 수운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논문은 그 근거로 △통일신라 말기의 지방호족 발호 △후삼국기 왕건의 충주 진출 △남한강 수변의 곡창(穀倉)과 염창(鹽倉) 존재 등을 제시하였다. 논문은 전자에 대해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왕권 약화와 반비례해 지방호족의 권
554년 백제 성왕이 우리고장 옥천 관산성 부근에서 참수를 당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백제군은 말 한 마리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600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신라군은 성왕의 사지(四肢)는 돌려보냈으나 머리는 경주 왕성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신라는 백제 왕실과 국가에 대한 모욕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하였고, 이후 두 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백제 성왕이 접경의 여러 성 가운데 유독 옥천 관산성을 빼앗으려 한 이유는 매우 궁금하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를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을 봉쇄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백제는 그 직전 한강 하류지역에 신라에게 강탈당했다. 나-제동맹(433년)에 의해 신라와 합동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수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의 동맹 위반으로 한강 하류를 잃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경주를 축으로 하여
[충북일보] 경북의 상당수 언론이 백두대간 생태통로 사업을 두고 '추풍령 능선 연결'이라는 표현을 사용, 마치 추풍령 고갯마루(마루금)가 연결되는 듯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18일 경북지역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경북도는 2017년 말까지 210억 원을 투자, 추풍령 일대에 백두대간 생태통로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구체적으로 △올 9월까지 기본·실시설계를 마치고 △10월에 공사를 시작하며 △육교형으로 건설되는 생태통로에는 모니터링시설도 설치하게 된다. 경북지역 상당수 언론은 이 과정에서 "고속도로, 철도, 국도, 지방도 개설로 능선이 끊어진 백두대간 추풍령 구간이 다시 연결된다"라는 표현을 사용, 마치 추풍령 고개 정상 위로 생태통로가 연결되는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백두대간 추풍령 마루금은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되는 지점으로, 경북이 추진 중인 생태통로보다 조금 북쪽인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충북 영동군은 해당 지점에 소공원과 함께 '추풍령 기념탑'을 설치한 바 있다. 바로 옆에는 가수 남상규가 부른,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으로 시작되는 추풍령
수레는 둥근 바퀴와 축의 회전운동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쉽게 운반하는 교통수단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수레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원전 3천년전 서아시아로 추론된다. 수레의 등장으로 물자와 사람들의 이동 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도시 발달이 촉진됐다. 나아가 인류는 수레를 보다 잘 이용하기 위해 길을 닦았다. 현재는 그 수레가 자동차, 길이 고속도로 등으로 바뀌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만주 집안현과 한반도 평양, 황해도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분벽화에는 18개의 고분에 40여개의 수레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고대 수레바퀴는 크게 텟쇠. 빗등, 살, 장구통, 메뚜기 등의 부품으로 구성돼 있다. 텟쇠는 목재 바퀴를 보호하기 위해 두루는 쇠, 빗등은 바퀴의 테를 이루는 목재, 살은 바퀴테를 유지하기 위해 빗등과 장구통 사이에 끼우는 것으로, 주로 참나무로 만들었다. 장구통은 바퀴 중앙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나무통으로 살이 이 부분에 모아져 꽂혔다. 메뚜기는 양쪽 바퀴를 가로로 연결하는 축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축구멍에 꽂은 쇠를 일컬었다. 수레바퀴 가운데 가장 만들기가 어려운 부분은 바퀴의 모양대로 철판을
[충북일보] 계(契)는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만든 전래의 민간협동 조직으로, 낙찰계·상포계·친목계 등의 종류가 있다. 조선후기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의 전주최씨들은 단순친목 이상의 문중계를 1백년 넘게 운영했다. 이른바 동성촌락를 배경으로 한 종계(宗系)다. 조범희(충북대 사학과 석사·사진) 씨가 역사실학회에서 발간하는 《역사와 현실》 제 58집에 '19세기 음성군 조촌리 전주최씨 종계 운영과 토지소유'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16세기 중반 최우령(崔禹齡)의 부인 연산곡씨는 남편이 갑자기 돌아가자 한양의 50칸짜리 대저택과 노비 60여 구(口) 등을 처분하고 친정식구가 살고 있는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로 이주하였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노비를 인간이 아닌 매매가 가능한 재물 개념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숫자를 파악하는데 있어 원(員)이나 명(名)이 아닌 구로 호칭했다. 조촌리 일대의 전주최씨 세거는 그 같은 배경 속에 시작됐고, 이후 누대를 거치면서 동성촌락의 혈족집단으로 성장하자 최우령을 입향조로 숭모하였다. 조촌리 전주최씨의 종계는 《도곡봉상기》(賭谷捧上記)라는 운영 장부가 현존하고 있어 상세한 파악
고려와 조선시대 형벌은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등 대략 5가지가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태형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로, '笞' 자에 회초리를 의미하는 대죽변(竹)이 들어갔다. 장형은 길고 무거운 몽둥이로 볼기(히프)를 내리치는 형벌로, '杖' 자에 몽둥이를 의미하는 나무목변(木)이 들어갔다. 도형은 지금의 징역형을 말한다. 유형은 유배형이고, 사형은 죄인의 목숨을 빼앗는 형이다. 이 가운데 유배형은 원칙적으로 압송관이 유배지까지 동행했다. 조선시대 벼슬을 한 죄인은 의금부 관원이, 일반 사족은 형조 관할의 역졸(驛卒)이 압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인인 망나니[회자수]에게는 '속참행하(速斬行下)', 즉 단칼에 베어달라는 청탁성 뇌물이 건네졌다. 그래야 고통이 짧았다. 유배인 압송관에게도 뇌물을 건네는 관행이 존재했다. 조선 명종대 대신인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유배형을 받자 압송관이 찾아와 뇌물을 요구했다. '새벽에 의금부 서리 최세홍이 나를 찾아왔다. 불러들여 만나보니 유배지가 성주로 정해졌다고 한다. 오늘 마패가 나오면 내일 출발할 수 있다고 한다. 술을 대접해
[충북일보] 속보= 조정철(趙貞喆·1751~1831)의 묘가 충주 수안보 돌고개(박석고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세번째 부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본보 취재 결과, 조정철이 괴산 연풍면의 수옥정(漱玉亭) 이름을 지었다는 구전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시는 조선후기의 문신이면서 수안보 돌고개에 영면하고 있는 조정철을 관광 요소로 스토리텔링화하기로 결정,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조정철은 제주도 27년, 남해도서 2년 등 조선시대 최장기 유배생활을 한 인물이면서 제주여인 홍윤애(洪允愛)와의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로 근래들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제주도는 홍윤애의 일대기를 몸짓언어〔춤〕로 작품화, 무대에 올리는 등 문학·예술·관광이 결합된 삼위일체식 스토리텔링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조정철은 충주 수안보와는 연고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그의 묘가 왜 돌고개 인근에 위치하는 지는 묘소 발견 이후 줄곧 커다란 궁금증이 돼 왔다. 이와 관련해 본도가 취재를 한 결과, 세번째 부인인 영월신(辛) 씨가 어릴적 수안보에 지역에 살았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양주조씨 대종회에 따르면 조
국립대구박물관은 지난 2011년 6월 '편지로 읽은 일상'이라는 기획전을 개최했고, 그 주인공은 조선 선조대의 곽주(郭澍) 부부였다. 지난 1989년 경북 달성군 현풍리에 거주하는 곽병주 씨가 같은 군의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12대 조묘 진주하씨 묘를 이장하여 위해 봉분을 열었다. 진주하씨는 곽주의 부인이다. 놀랍게도 관속에서는 고인의 미이라와 의복, 그리고 한글편지[언간] 150매 등이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됐다. 작성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전기에 쓰여진 것이 가장 많았다. 언간 속의 곽주는 입신양명을 위해 절간으로 들어가 과거를 준비하였다. 나이를 먹도로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지 어린 아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그는 절간을 나올 때 신세를 진 스님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열이렛날로 내려 갈 것이니 내가 탈 말 두필하고 아이가 탈 말을 열이렛날 자우 일찍 올리어 보내소. 종들이 말을 몰아 올 때, 맑은 술 두 병하고 나무 안주 한 당새기를 장만해 보내소. 절의 중들이 나를 후히 대접하였으니 나도 갈 때 저희들에게 술이나 먹이고 가려 하네.'- 그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길에 나섰다. 한글편지 가운데 '경슐
[충북일보] 충주시가 조선 후기의 문신 조정철(趙貞喆,1751~1831)과 제주도 홍윤애(홍랑, 洪娘)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화, 관광 자원화하기로 했다. 조정철의 묘는 충주시 수안보면 박설고개 좌측(수안보 방향)에 위치, 도로변에서도 볼 수 있으나 진입로가 개설돼 있지 않아 접근은 용이하지 않다. 조정철은 정조대의 정치적인 격동 때문에 바다건너 제주도에서 무려 27년간 옥중 유배생활을 한 인물로, 이때 제주도 의녀 홍윤애를 만났다. 이에 관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설적인 과장 아니냐'라고 다소의 의구심을 갖고 있으나 모든 이야기는 그가 말년에 기록한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담겨져 있다. 1824년(순조 24)에 제작된 책명 '정헌영해처감록'의 '정헌'은 조정철의 호이고, '영해처감록'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하던 당시에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형법은 유배생활 중에는 소리내어 독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때문에 조정철은 무료한 나날을 독서 대신 시작(詩作)에 몰두, 수록된 시가 6백35수에 이르고 있다. 그는 자전기록 《정헌영해처감록》에서 자신을 위해 죽어간 홍윤애를 이렇게 적었다. '한 명의 어린 기녀로서 면
지난 1996년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선사유적지에서 당시 충북대 이융조 교수팀에 의해 발굴된 붉은간토기가 20년만에 귀향, 충주박물관에 전시된다고 한다. 일명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로도 불리는 붉은간토기는 여러 기형(器形)이 존재한다. 조동리 붉은간토기는 높은 굽이 달린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생활용기보다는 제사 등 의례용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 토기는 그 희소성으로 인해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에 전시돼 왔다. 붉은간토기는 말 그대로 표면이 붉은 색을 띠고, 그리고 겉면을 갈았기 때문에 광택이 나고 있다. 한반도 선사인들은 마지막(4번째) 빙하기가 물러가면서 기온이 상승하자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신석기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을 인공적으로 이용한, 인류 최초의 작품인 토기가 출현하였다. 축적된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한반도 신석기시대 토기는 덧무늬토기-빗살무늬토기-붉은간토기 순으로 출현하였다.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로도 불리는 덧무늬토기는 명칭 그대로 토기 표면에 지그재그, 또는 W자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요철(凹凸)의 질감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덧무늬토기
[충북일보] 제자들은 인쇄 상태가 안 좋은 오래된 논문을 다시 타이핑했고, 스승은 그렇게 만들어진 고가의 논문책을 제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충북대 차용걸(66·역사교육과·사진) 명예교수가 최근 57편의 논문을 3권의 책으로 엮은 《한국의 축성사 연구 1.2.3》을 출판사 '진인진' 이름으로 출간했다. 특히 이번 논저는 단일 주제이면서 책분량이 1천7백여쪽(총 3권)에 이를 정도로 방대, "한국 성곽 연구의 바이블"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제 1권의 책명은 , 제 2권은 , 제 3권은 등이다. 7백20여쪽의 제 1권은 △신라 석축산성의 성립과 발전 △백제의 도성과 산성 △고구려의 도성과 산성 △고대산성의 지역별 특징과 구조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관련 부록에는 일본어로 쓴 와 가 수록돼 있다. 6백여쪽의 제 2권에는 △고려말·조선전기 대외 관방사 연구 △조선전기 한양 도성의 축조와 개축 △고려말·조선전기 읍성가 진·보의 정비 △고려~조선시대 지역별 구조와 특징 등을 다루고 있다. 제 2권 부록에는 과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4백10쪽 분량의 제 3권에는 △한양도성 방어시설과 화성의 축성 △양란 이후 산성의 수축과 정비
충북의 지도는 마치 누에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모습이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는 경상도와의 도계가 되는 백두대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충북의 도계는 강이 아닌 산줄기가 지나가면서 들락거림이 심한 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모습을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라고 불렀다. 개의 이빨처럼 들락거림이 심하다는 뜻이다. 개가 성질이 올라 '으르렁!' 거릴 때면 W자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문헌으로만 보면 우리 선조들의 백두대간 의식은 최소한 고려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시대 우리나라의 군주들은 하늘 살피기, 즉 천문(天文)을 관찰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하늘의 의지를 파악하여 이를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담당하던 천문관서를 고려시대에는 사천대(司天臺), 조선시대에는 서운관(書雲觀)이라고 불렀다. 고려 공민왕대의 사천대 관원으로 우필흥(于必興)이 있다. 그가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 내용이 와 에 동시에 수록돼 있다. '윤월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옥룡기(玉龍記)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오행으로 보아 수(水)를 뿌리로 하
[충북일보] 이세돌과 알파고의 반상 대결이 연일 현생인류의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용어만 보면 일본이 가장 재미를 보고 있어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동양의 바둑은 4천년쯤 중국에서 발생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종착, 그 문화가 활짝 피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처럼 바둑은 동양 삼국을 거치다보니 그것을 표현하는 한자도 각기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棋', 일본에서는 '碁' 자를 주로 쓰고 있다. 이에 대해 바둑문화 연구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지니고 있는 청주 이승우씨는 그의 저서 (2000, 전원문화사)에서 "바둑돌을 초기에는 단단한 나무(棋)로 만들다가 후대에 돌(碁)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며 "아마도 돌로 된 바둑알이 만들어진 시기에 일본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바둑의 이같은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알파고'(AlphaGo) 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알파'와 일본어 '고'가 조합된 표현이어서 개운찮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바둑을 '치'(Chi·棋), 한국에서는 '바둑'(baduk, 棋), 일본에서는 '고'(Go·碁)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인들이
불국사 경내에는 석가탑과 다보탑 등 2개의 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석가탑의 본래 이름은 '석가여래 상주 설법탑'(釋迦如來 常住 說法塔), 다보탑은 '다보여래 상주 증명탑"(多寶如來 常住 證明塔)이다. 이름과 같이 석가탑은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다보탑은 그 설법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찬탄하는 다보여래를 상징한다. '여래'는 불(佛)과 같은 뜻이다. 우리고장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는 탑은 아니지만 '커플 마애불'인 이병불(二竝佛)이 위치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보물 제 97호)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원풍리 마애 이병불도 불국사 석가·다보탑과 마찬가지로 석가불과 다보불을 상징하고 있다. 다만 외형이 비슷해 두 마애불 가운데 어느 쪽이 석가불이고 다보불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양식으로 미뤄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통시대의 고개는 늘 교통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와 고양시 고양동 사이에 '혜음령(惠蔭嶺)'이 있다. 이 영로는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서울)을 이어주는 교통로로 항상 인마(人馬)로 붐볐다. 그러나 도둑이 많고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면서 혜음령 넘기가 쉽지 않았
[충북일보] 청주시민들의 교통카드 빅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한 결과, 두드러진 이동토픽 노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동토픽은 유사한 승하차 패턴을 지닌 승객들을 그룹화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빅데이터 전문가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지니고 있는 충북대 조완섭(경영정보학과) 교수가 청주지역 교통카드 소지자의 1개월 동안의 교통카드 데이터를 수집, 이른바 LDA(Latent Dirichlet Allocation)기법으로 이동토픽을 분석했다. '잠재적인 디리클레 할당'으로 번역되는 LDA기법은 사용중인 문장 내의 단어에서 사전 할당된 태그와 비중에 따른 주제를 자동적으로 발견해 내는 기술 방식으로, 데이터를 분류하는데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조교수는 청주시내 교통카드 사용자의 승차지점, 이동경로, 하차지점, 해당 노선버스 등을 LDA기법으로 분석, 데이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청주지역은 이동거리와 무관한 동일 요금체계이기 때문에 승객들이 하차할 때 교통카드를 태그하지 않는다. 따라서 승객 특성을 파악하는데 다소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는 '집에서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간다'는 상식적인 관점에서 청주지역 교통카드 이용자의
봉건시대 군주는 백성들에게 군림하는 권력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지만, 그에 비례해 의무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역상수시(歷象授時)라는 것으로, 천문(天文)을 살펴 백성들이 농사지을 때를 제때 알려줘야 했다. 양촌 권근의 (天文圖誌)는 석각 (天象列次分野之圖, 국보 제 228호)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는 '하늘의 형상을 십이차(十二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그려 놓은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자고로 제왕이 하늘을 받드는 정사는 역상(曆象 달력)으로 천시(天時)를 알려 주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않는 이가 없다. 요(堯)는 희화(羲和)를 명하여 사시의 차례를 조절하게 하고, 순(舜)은 기형(璣衡)을 살펴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함을 늦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권근은 그러면서 "위로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 민사(民事)를 부지런히 하시면, 그 신성한 공렬(功烈)이 또한 요순과 같이 높아질 것이다"(〃)라고 '역상수시'의 소중함을 재차 강조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달력은 상국(上國) 청나라와 자주 차이가 났고, 조정은 그때마다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청국에 관상관원을 파견하였다. 영조9년에
[충북일보] 1919년 3.1 만세운동은 해외로도 번지면서 만주 용정지역에서도 일어났고, 이를 막후에서 지원한 인물은 증평출신 연병환(延秉煥, 1876~1926)이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한국독립운동사 등의 자료에 따르면 3.1운동 13일 후인 만주 용정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는 해외 독립운동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3만명의 동포들이 운집, 시위를 벌였다. 이날 용정지역 예수교 목사이자 대회장인 김영학(金永學)은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표달한다' 내용의 공약삼장을 선포하였다. 연설 후 동포들이 일본총영사관으로 행진하려하자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맹부덕(孟富德) 부대가 발포, 현장에서 15명이 즉사하고 치료를 받던 도중 4명이 사망하는 등 모두 19명이 순국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심양 세종조선어학교 김양은 (2000) 논문에서 '간도한족독립운동의사부의 주도로 12일 용정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리면서 시작됐다'라고 서술했으나, 더 이상의 구체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가 최근 발간한 《증평 곡산연씨 일가의 독립운동》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약방서(藥方書)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다. 이 책은 고려시대 1236년(고종 23) 무렵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던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처음으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우리나라 산천에서 자생하는 풀이름을 이두식으로 표기, 국문학적으로도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가령 개나리꽃은 견내리화(犬乃里花), 붓꽃은 필화(筆花), 아주까리는 아차가이(阿次加伊)로 적었다. 책이름에 '향약'이라는 표현이 들어간데는 나름의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이 때의 향약은 우리나라 땅에서 산출되는 약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됐던 당약(唐藥)과 대칭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약이 되는 풀이름을 문헌으로 기록할 정도면, 그것을 약으로 만드는 제조 공간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왕실의 약 조제를 담당하던 곳을 '상약국(尙藥局)'이라고 불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상약국은 성종 9년(990)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고 이후 충선왕대까지 그대로 존속되다가 한때 봉의서(奉醫署)로 개칭되고 다시 상약국·전의시(典醫寺) 등으로도 불렸다. 《고려사》 지는 고려시대 화재 사고만을 별도로 모아 기록
[충북일보] 한국과 일본이 조선통신사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한 것과 관련, 충북도 관련 사료와 문화를 적극 발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백두대간 조령[새재] 구간은 조선통신사 육로 여정 가운데 생생한 사료가 가장 많이 존재, 이를 지역 문화·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산문화재단과 일본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는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 등재 신청키로 합의했다. 등재신청 목록은 외교·일기·문화기록 등으로 한국 63건 124점, 일본 48건 209점 등 전체 1백11점 3백33점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10여 차례 파견됐던 조선통신사는 크게 한양~부산의 조선 육로, 부산~교토의 해로, 교토~도쿄의 일본 육로 등의 여로를 갖고 있었다. 이 가운데 두 나라의 등재사업은 해로와 일본 육로, 그리고 그 역사물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지난 2011년에 개관한 부산시 산하의 조선통신사 역사관도 그 같은 취지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등재 신청을 계기로 양국 조선통신사 문화를 완전하면서 입체적으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조선 육로도 당연히 그 대상이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