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영조 24) 문의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에는 다양한 인물의 군상이 등장하고 있다. 이영손(李榮孫), 박민추(朴敏樞), 박철택(朴哲澤), 박험백(朴驗白), 김재형(金再炯), 순세재(順世才), 오수만(吳遂萬), 오명후(吳命·), 이항연(李恒延), 박취문(朴就文), 이태위(李泰渭), 우규장(禹圭章). 당시 영조는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이들을 친국(親鞫)했고, 거명된 이름들은 그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이영손은 이지서의 아들이다. 박민추는 문의향교를 출입하던 교생(校生), 즉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박철택·김재형 등은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나 신문 과정의 언어 구사력을 보면 사족(士族)으로 추정된다. 박험백은 박민추의 배다른 동생인 서얼이었고, 순세재는 역노(驛奴)였다. 오수만과 오명후는 부자간으로 사족층이었다. 이항연도 문의의 사족이었고 박취문과 이태위는 박민추의 사촌으로 무신란에 참여했다가 도망한 인물들이다. 이지서는 괘서사건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은 첫째는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나라에 해를 끼치게 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인심을 동요시켜 피란하게 되면 부자들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얻어 먹을 수 있
[충북일보] 청주시 흥덕구 송절동 일원에서 국내 최대 규모의 초기 삼국시대 마을유적이 발굴됐다. 특히 발굴조사가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유적은 집터 흔적이 5백기가 되는 등 당시 이곳에 도시에 버금가는 생활유적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주시가 조성 중인 흥덕구 송절동 299번지 일대의 청주 테크노폴리스 부지조성 공사에는 중원문화재연구원, 충북도문화재연구원, 한국선사문화연구원, 호서문화유산연구원 등 도내 4개 발굴기관이 올 3월부터 약 3만3천㎡(1만평)의 면적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이달 하순 현재 일대에서 초기 삼국시대(일명 원삼국)의 대규모 마을 집터, 대형 분묘, 공방(工房) 등 생활·생산 유적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특히 현재까지 확인된 평지 마을유적의 경우 당시 집터가 5백기 안팎에 이르고 있어, 초기 삼국시대 것으로는 도내는 물론 전국 최대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발굴기관 한 관계자는 "3만3천㎡ 평지내의 5백기 집터는 매우 높은 건축밀도로 당시 이곳에 강력하면서 도시에 버금가는 재지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3~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이번 유적은 청주역사시대의 첫 대규모 촌락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
[충북일보] 1927년 8월 11일 오전 9시 경성지방법원. 오전부터 푹푹 찌는 불볕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법정 안은 새벽부터 몰려든 방청객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법정 구석구석에는 종로서와 경기도경찰부에서 파견된 사법경찰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방청객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재판부의 입정이 끝나자 9명의 피고들이 초췌한 몰골로 법정에 들어섰다. 호기심으로 웅성거리던 법정 안은 순간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을 폭파하고자 시도했던 주인공들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된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납세불납 문서를 인쇄 전좌한(全佐漢, 1899~1986)은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에서 옥천 전씨인 아버지 전보현과 어머니 문화 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하게 옥천에서 세거해온 그의 집안은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제에 의해 몰락했다고 한다. 그는 종조부인 전흥규(全興奎)의 후원으로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와 서울 영화학당(永化學堂)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2월 종조부에게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이라는 비밀결사로부터 납세불납운동 문서가 전달되었다. 이 문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의 서명과 함
영조 24년(1748) 3월에 발생한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은 궁궐투서→와언 유포→청주 소요→문의 괘서 등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3월 17일 한양도성 궁궐에 괘서가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중순에는 충청도 청주에 "왜구가 곧 쳐들어온다"는 와언이 유포되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행렬이 길을 메웠다. 곧이어 청주 인근 문의지역에 "문의 백성들은 어육(魚肉·물고기 밥)이 될 것이다. 倭人 같은데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弓弓이 이롭다"는 비기(秘記)가 유포되면서 고을이 텅 빌 지경이 됐다. 지금까지의 내용 전개는 누군가가 사건을 면밀히 기획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감영이 수사에 나섰고 그 결과, 이지서라는 문의지역 50대 사족(士族)이 범인으로 체포됐다.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호서의 요적 이지서(李之曙)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궐에 투서한 적은 끝내 추포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청주·문의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하여 몇 고을에 계속 소요가 일었으므로 짐을 싸서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려(州閭)가 모두 텅 비었다. 이지서가 감영에 의해 기포되었는데,
[충북일보] 정감록(鄭鑑錄)은 약간 개념이 모호한 예언서이다. 감결(鑑訣),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 역대의 비기를 통칭하여 정감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감결만 가리켜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중 정감록의 원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감결은 이심(李沁)·이연(李淵)이라는 인물이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과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沁이 말하기를 백두산에서 내로운 맥운이 금강으로 옮아가고 태백산맥에 이르게 되니 산천鍾氣가 계룡산으로 흘러들어가서 鄭氏의 팔백년 도읍지가 될 것이고, 그후에 가야산으로 흘러들어가니 趙氏의 천년 땅이 되고, 다음으로 전주 范氏(범씨)의 육백년 땅이 된다. 송악에 이르면 王氏가 도읍을 부흥할 것이다."- 정감록은 단순 예언서를 뛰어넘어 역성혁명의 구체적 대상, 각 왕조의 교체순서, 왕조의 존속시간 등을 풍수지리를 곁들여 자세하게 설정하여 놓았다. 정감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존속기간은 300~500년 사이로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것으로 예언돼 있다.문의현 이지서의
[충북일보] 조헌(趙憲·1544∼1592)의 제자 김성원(金聲遠·?∼1592)을 아십니까. 청주 테크노폴리스 조성 지역의 장묘 이전과 문화재 발굴사업이 막바지에 다다른 가운데 임진왜란 당시의 인물인 김성원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옥천 출신의 의병장인 스승 조헌을 수행, 1592년 충남 금산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지금까지 조헌과 기허당 영규대사 그리고 칠백의총만 많이 알려져 있을 뿐 김성원이라는 인물은 거의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물 평가와 당시 활약상은 ≪선조수정실록≫, ≪국조인물고≫, ≪연려실기술≫, ≪증보문헌비고≫, ≪송자대전≫ 등 조선시대 문헌에 다수 등장하고 있다. 다음은 관찬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이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 사인(士人) 박사진(朴士振)·김선복(金善復)·복응길(卜應吉)·신경일(申慶一)·서응시(徐應時)·윤여익(尹汝翼)·김성원(金聲遠)·박혼(朴渾)·조경남(趙敬男)·고명원(高明遠)·강몽조(姜夢祖)는 모두 문인(門人)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조헌에게 이조 참판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조완도(趙完堵)를 녹용(錄用)하였으며 그 집에 월름을 지급하였다.- ≪
[충북일보] 신현규(申鉉圭, 1888~1928)는 괴산 출신으로 1910년대의 대표적 비밀결사인 광복회에 가입하였고, 이후에는 만주 무장투쟁 단체인 신민부에 참여하여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8년 일경에게 피체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 순국하였다. 신현규는 박상진이나 김좌진처럼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단체인 광복회와 신민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끝내 자결로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이다. 올해는 광복회가 조직된 지 꼭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를 계기로 신현규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되새겨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비밀결사 광복회에 가입하다 신현규(이명: 申陽春)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자료의 부재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유년기에 2년가량 한학을 공부했고, 20대까지는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가 실시되던 때로, 일제는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은 철저히 지하화 하였고, 비밀결사 투쟁이 전개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비밀결사는 광복회였다.
1748년(영조 24) 한양도성의 궁궐투서 사건이 일어난 그 해에 청주와 문의현 지역에서는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하였다. "왜구가 또 처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男負女戴(남부여대대)의 피난민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남부여대는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짐을 머리에 인다는 뜻이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호중(湖中)에 한 괴인이 있어 요망스런 말을 창도하기를, '왜구가 곧 쳐들어 온다.' 하여, 인심이 소동되는 것은 물론 가족을 이끌고 피하여 달아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합니다." 하고….'- 인용문 가운데 湖中은 청주지역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여느 속담의 표현처럼 발(足) 없는 말(言)이 천리를 갔다. 소문은 경기도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산골짝으로 숨는 사람도 생겨났다. "좌윤 홍상한(洪象漢)은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하의 인원들이 모두 짐을 꾸려 메고서 서 있는가 하면, 산골짝으로 숨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호중만 그럴 뿐이 아니라 기내(畿內)가 더욱 극심하다고 하니, 마땅히 기포(譏捕)해야 될 것입니다."- 인용문 가운데 畿內는 경기도를 지칭한다. 그러자 영조가 "이는 익명서와 마찬가지이니, 엄히 방지하는 방도가 없을
[충북일보] 1748년(영조 24)은 무신란(1728)이 일어난지 꼭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3월 임인(18일) 한양도성에서 의문의 투서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보초를 서고 있는 졸(卒)을 부른 후 괘서 하나를 던져 넣고 몇마디 지껄인 후 달아났다. "초혼(初昏)에 어떤 사람이 궐문 밖에서 흥원문(興元門)의 수졸(守卒)을 부르면서 문틈으로 하나의 봉서를 던져 넣고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이선전(李宣傳)에게 전하라." 했는데, 선전관 이택(李澤)이 과연 바야흐로 입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뜯어 보니 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여…."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선전'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씨 성을 가진 선전'이라는 뜻이다. 선전관의 준말인 선전은 왕을 호위하고 전령을 전달하며 나아가 병졸의 진퇴를 명령하는 무직(武職) 관료로,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괘서를 엉겁결에 건네받은 수졸이 이 과정에서 긴급체포되었고, 그 이유는 인용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기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같은 괘서의 경우 그 확산을 우려해 관련 내용을 일체 기술하지 않는 관례를 지니고 있다. 영조는 수졸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범인을 뒤쫓게 하고 당시 좌의정 조현명(趙顯命·1
[충북일보] 2015 동아시아문화도시 조직위원회는 오는 11월 11일을 '젓가락의 날'로 정하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한·중·일 등 동북아시아 3국에서만 젓가락 문화가 유독 발달한 것일까. 미리 말하면 동북아시아에서의 젓가락 등장은 식사가 아닌 제례의식과 관련된 것이고, 그 발생국은 중국이다. 갑골문에 등장한 한자 '鄕' 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그림참조) 이는 갑골문 사용되던 시기, 즉 중국 은나라 시기에는 젓가락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역사에 있어 젓가락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440년)였다. 당시 제관(祭冠)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옮길 때 정결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반드시 젓가락을 사용했다. 이후 중국의 지배층들이 이 같은 모습을 모방해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면 정인(淨人·깨끗한 사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부정인(不淨人)의 개념이 생겨났다. 중국의 젓가락 문화는 전한(前漢)시대에 이르러 일반인에게도 보급되었고, 후한시대에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예기 곡례(曲禮)에는 '국에 채소가 들어 있
[충북일보] 신건식(申健植, 1889~1963)은 청주 가덕출신으로 형인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동제사, 대동보국단 등의 단체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특히 그는 1923년 중국군 중교(中校)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에, 1943년에는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제뿐 아니라, 그의 딸과 사위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가족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하다.고령 신씨 가문에서 태어나다신건식은 1889년 2월 13일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2길 4-24)에서 신용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고려시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신성용을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 초기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에 청주로 낙향하여 문중촌을 형성했는데, 지리적으로는 상당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일명 산동(山東)
[충북일보] 보은 이제동(李濟東) 역모사건에는 느닷없이 신필대(申必大)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동 역모에 가담한 보은 사람 이흥득이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이귀흥이라는 자에게서 들은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귀흥이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들이 황간(黃澗)·영동(永同)·청주(淸州)·문의(文義) 등지에 있는데, 청주(淸州)의 신필대(申必大) 같은 이도 여기에 들었다. 네가 우리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업신여기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신필대는 보은이 아닌 청주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1728년 무신란 끝난지 5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영조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은 역시 가슴에 맺힌 한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란 청주지역 2인자였던 신천영(申天永)의 가까운 혈족이었다. 당색이 남인이었던 신천영은 신숙주의 후손으로 무신란 당시 이인좌로부터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다. 이는 오늘로 치면 광역단체의 군사업무르르 총괄하는 직책으로, 지역사령관에 해당한다. 신필대는 1728년 무신란 당시 신천영을 따라 난에 가담하였다. 신천영을 그를 직접 영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뒤에 신필대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1728년 무신난은 보은현감 조문보를 처형하고 공신을 선정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난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반란 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충북, 경북, 전북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충북의 경우도 편차가 있어 청주, 충주, 괴산,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희생자들의 가족 한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신란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7333년(영조 9) 보은에서 장곡서원(獐谷書院) 사건이 발생했다. 장곡이 어디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내북면에는 노루실이 있다. 보은사람 이공형, 이인관, 이귀흥, 이제동, 김두병, 구준좌, 구이후 등 10명은 흉년이 들자 장곡서원에 모여 강도질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형이 정보가 새 나갈을 것을 우려하여 아우 귀흥을 살해하였다. 이때 마침 김두병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음을 드러났다. 다음은 김두병의 원사(爰辭), 즉 심문 과정의 진술 내용이다. "이귀흥과 이인관의 무리가 장곡서원에 모여 모의했는데, 도목 가운데에다 성
[충북일보] 15개 지자체로 구성된 전국동주도시교류협의회는 올 하반기 지역행복생활권 사업 공모를 위한 과제를 공동 발굴하기로 하면서 '州자 도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동주도시협의회에는 광주·양주·파주·여주(경기), 원주(강원), 청주·충주(충북), 공주(충남), 전주(전북), 나주(전남), 경주·상주·영주(경북), 진주(경남), 제주시 등 15개 시가 가입해 있다. 州자 도시의 연원은 고려 성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나 조선이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한 왕에게는 성종이라는 시호를 붙였다. 고려 성종 때는 중앙과 지방조직이 완비되었고, 조선 성종 때는 경국대전이 편찬되었다. 고려 성종은 재위 2년(983)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州자 행정명을 붙였다. 이때의 12목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 등으로 이들 지역이 이른바 '오리지널 州자 도시'다. 그러나 고려 후기들어 州자 도시 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지명 인플레에션'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유는 왕사나 국사가 태어난 고장, 심지어 내시가 중국 왕래 후 이를 기념하여 자기가 태어난 고을을 州자로 개명하였다. 우리지역 제천, 진천, 괴산, 옥천도 이때 州자 고을로
[충북일보] 박여성(朴汝成, 1860~1908)은 제천 사람으로 해산 군인 출신이었다. 평양진위대 소속이었던 그는 평양진위대가 해산 당한 후 청풍으로 내려와 의병장으로 추대되며 후기의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1907년 8월 15일 의병으로 참전하여 1908년 10월 13일 충주 달천에서 일군과 교전하다 전사할 때까지 1년 3개월 여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스에야스(末安)중위가 이끄는 일군과 제천에서 약 4시간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는 등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대한제국의 군인에서 의병장으로박여성은 제천 출신으로 평양진위대에 소속되었던 구한국 군인이었다. 자료의 결핍으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강원도 평강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가 군인으로 있던 한말의 상황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이 극심해지던 시기였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운명을 해결하고자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열강국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국간의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헤이그특사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는 헤이그특사 파견의 책임을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참가 지역과 참여 인원이 방대하였던 만큼 그 희생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프닝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인좌가 안성·죽산 전투에서 오명항(吳命恒·1673-1728)이 이끄는 정부군에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의 반군세력은 계속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군보다 먼저 이인좌의 패배 사실을 경상도 지역에 알린 알린 인물이 당시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이같은 정보는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명항이 영조에게 그를 특별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은 안성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한달 후 졸지에 옥천군수에서 청주목사로 벼락 출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인좌 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기집으로 도망갔다고 체포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당시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이었다. 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율봉역에 있었던 말과 역노들이 고스란히 이인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율봉찰방 이제겸(李
1728년(영조 4) 무신란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조문보(趙文普)가 있다. 그는 노비, 상인 등 하층민이 아닌 보은현감이라는 고위 관료이면서도 무신란에 참여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적인 사표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직손이었다. 그는 무신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른바 홍성룡 옥사에 연루되어 옥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칼을 풀어주도록 하는 등 특별히 배려했다. '임금이 묻기를, "조문보는 누구의 집 자손인가"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신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칼[枷]을 풀어 주도록 하여, 내가 현자(賢者)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칼은 전통시대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의 일종으로. 두껍고 긴 널빤지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렀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옥중에서 쓰고 있던 형틀도 칼이었다. 이처럼 영조가 죄인을 각별하게 대우한 것은 그가 조광조의 직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통을 지닌 조문보가 무신년 역모에 가담한 것은 민원보와 관련이 있다. 민원보(閔元普)는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조총, 환도, 철편 등
[충북일보] 청주 테크노폴리스 건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예상했던 대로 백제 초기 유적들이 다량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이 청주를 둘러싸고 어떤 쟁패를 벌였는가가 새삼 관심사가 되고 있다. 좀 늦었지만 논문 한 편을 소개한다. 고구려는 지금의 세종시 일대인 금강유역까지 남하하였다. 이 경우 상식적으로 청주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봐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김영관 교수의 '고대 청주지역의 역사적 동향'(백산학보 제 82호) 논문에 의하면 세종시 부강면 남성골산성과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발군된 바 있는 등 고구려는 분명히 백제군을 뒤쫓아 금강유역까지 남하하였다. 실제 충북대 차용걸 교수팀에 의해 지난 2001~2002년에 발굴된 부강 남성골산성에서는 불탄 목책 흔적 외에 시루, 장동호(長胴壺), 금귀거리 등 고구려계 유물이 다수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김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고구려는 금강유역과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청주지역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는 그 근거로 △삼국사지 지리지에 고구려가 청주에 행정구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 △미호천이 자연방어 역할을 한 점
[충북일보]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진천 출신으로서 한국근대사에서 뚜렷하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한 이래, 남·북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유럽과 미주 일대까지 미치는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헤이그 사행과 구미 순방 외교를 펼쳤으며, 이후 연해주에서 13도의군·성명회·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주도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덕산 산직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로 출계 이상설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가난한 시골 선비 이행우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호는 보재(溥齋)이다. 그의 선대가 진천에 세거한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활약한 이시발(이상설의 11대조)이 조상의 제향을 위해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어린 그에게 인생의 중대 전기가 찾아왔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출계하여 상경하게 된 것이었다.어려서 신동으로 불린 그는 청년기에도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곤 하였다. 신·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인물로는 김덕삼(金德三)이 있다. 무신란은 정치적으로는 소론+남인이 주도하고, 사회적으로는 노비+상인 등 당시 소외 계층이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괴산에 살던 김덕삼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부호(富戶)였다.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 수사관이 낙형(烙刑)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 형신하고 낙형(烙刑)으로 위협을 베푸니, 김덕삼이 공초하기를,(…) '여기에서 마흔 냥이나 쉰 냥쯤의 돈을 장만하여 주면 일이 이루어진 뒤에 보답을 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후 내용을 보면 인용문은 반란에 가담한 어떤 인물이 김덕삼에게 "40~50냥을 꿔주면 사건이 끝난 후 갚겠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50냥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백50만원 정도가 된다. TV 역사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 신병주(건국대)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조선시대 양(兩)-전(錢)-푼(分)의 현재 환율은 각각 7만-7천-7백원 정도가 된다. 따라서 이 공식대로 하면 50냥x7만원=35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덕삼이 실제 돈을 꿔줬는지는 《영조실록》 등 문헌으로는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장지(
무신란이 발생한지 25일 가량이 지난 1728년 4월 10일. 지금의 괴산송면 집에서 청주로 끌려온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尹紫貞)이 교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4명의 어린 아들을 둔 채 반군 지도자의 아내라는 죄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인자와 이웅좌가 모두 적괴이니 그 아우 이기좌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인좌의 아내는 박필현의 아내의 예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아이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종이 되게 하라."- 같은 날 당시 진짜 진천현감이었던 임상극(林象極·?-?)은 효시되었다. 처형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황상 한양으로 끌려간 후 군기시 앞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어떤 죄 때문에 효시됐는지 사료에는 죄명이 기록돼 있지 않으나 영조실록에 그 죄목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임상극(林象極)의 경우 연호(감號)에 쓴 대원수(大元帥) 관문이라고 한 것은 역률을 쓰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간 죄는 청안·진천·회인 세 고을이 처음에 다름이 없습니다."- 두 인용문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는
[충북일보] 풍수상 충북도청의 현재 건물배치 방향은 썩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됐다. 동방대학원대학교 유춘승 씨의 '풍수적 관점에서 본 국내도청의 입지해석'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미시풍수론은 실재론과 지세론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현재의 건물 배치와 위치를 바탕으로, 후자는 주변 지세를 고려해 풍수적인 해석을 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실재론으로 본 충북도청의 현재 풍수는 이상적인 풍수상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도청건물 방향과 정문 등이 지세에 관계없이 모두 남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남주작은 청주교대 뒷산으로 봐야 하고, 우백호는 무심천 건너편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백호가 좌우가 아닌 물을 건저 존재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게다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즉 '남북수'(南北水) 모습의 무심천 물은 충북도청의 정면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하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이런 모습에서는 당연히 '계수즉지'(界水則止)의 풍수상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계수즉지는 '생기는 물을 만나면 진행을 멈춘다'는 뜻으로, 이같은 지형이어야 배산임수 지형이 형성된다. 반면 지세론으로 본 충북도청 풍수는 점수가 후하게 나오고 있다. 단, 이 이론은
[충북일보] 조동호(趙東祜, 1892~1954)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항일 언론과 사회주의운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붓을 꺾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며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다. 그는 언론인으로 『독립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를 이끌어갔으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건국동맹 등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여운형의 평생지기 동반자로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다.격랑의 시기 옥천 청산에서 태어나다 조동호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조명하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이고, 호는 유정(榴亭)이다. 그가 태어난 1890년대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격랑의 시기였다. 소년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05년 사립신명학교(현 청산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 후 1908년 상경하여 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하였다. 측량학교는 우편학교와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우편학교에는 여운형이 공부하고 있었다. 둘은 이때부터 서로 알게 되었고, 의기투합하여 평생 동지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한동안 측량기사로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과 관련된 것으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라는 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문헌은 이진동(李鎭東)이라는 경상도 안동 유생이 무신란이 일어난지 60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했고, 그 목적은 무신년에 창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에서 누락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정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음은 이진동이 상언하는 내용이다. 상언과 상소는 형식이 비슷하나 전자는 평민, 후자는 관료가 한다는 점이 다르다.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이 날짜 정조실록에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당시에 김중헌(金重憲)이라는 영남인이 우연히 우리고장 청주 객점(주막)에 묵었다가 반란군 지도자를 살해하려다 되레 죽음을 당하였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적이 중헌에게 오형(五刑)을 다 시행하였
[충북일보] 1728년 3월 24일. 청안지역 의병들은 이날 먼동이 터올 무렵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이끌던 무신년 반란군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그리고 청안현청에서 정중익의 목을 지체없이 베었다. '내가 두 조카와 서종(庶從) 인심에게 말하기를 "종익을 비록 베었더라도 남은 역적이 아직도 많다. 너희들과 더불어 찾아내어 형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라고 했다.'- 잔당에 대한 의병진의 소탕작전도 그 즉시 진행되어 일부는 즉결처분하고 더러는 옥에 가두었다. 여기에는 힘이 좋고 활을 잘 쏘았던 임필현(林必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수색하니 즉 필현이 간청의 장을 보관하는 창고 가운데 숨어 있는데 먼저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범하지 못하자, 내가 몸소 앞으로 나가 필현을 끌어내어 머리를 검으로 쳤다.'- 임필현은 "그대들이 시국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계책이 망령되어 내놓은 것은 오래지 않아 그 머리와 목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의병들의 설득을 거부하고 말머리를 돌려 정중익에게 돌아갔던 인물이다. 충청도의 작은 고을 청안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청안현감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