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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 - 아라시야마(嵐山) Ⅲ

가장 먼저 한 토목사업 강 상류에 제방쌓기
신라출신 진도창 스님은 도게츠 다리 건설
교토 고분군에서는 신라식 금팔찌 등 출토
신라 하타씨 8세기 이르러 日 전체로 확산

  • 웹출고시간2015.11.11 15:10:19
  • 최종수정2015.11.30 18:50:00
[충북일보] 가야계 신라인 하타씨가 교토의 서북쪽 가쓰라강이 흐르는 사가노(嵯峨野)에 정착하여 당시 황무지였던 이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말이었다.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교류지(廣隆寺)ㆍ누에신사(蠶の社)ㆍ뱀무덤(蛇塚)에서 좀 더 서북쪽으로 가면 아라시야마(嵐山)를 휘감고 흐르는 가쓰라가와를 만나게 된다.

아라시야마 주변의 넓은 들판을 사가노라 하는데, 사가 들판의 북쪽에는 해발 924m에 달하는 아타고산(愛宕山)이 위치하고 있고 아타고산 동쪽으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인화사ㆍ용안사ㆍ금각사 등의 사찰이 있다. 가쓰라강은 아라시야마를 끼고 남쪽으로 흘러서 교토의 남쪽에서 가모가와(鴨川)와 합쳐지고 더욱 교토부(京都府)와 오사카부(大阪府)의 경계인 야와다시(八幡市)에서는 우지가와(宇治川)ㆍ기즈가와(木津川)와 합쳐져 요도가와(淀川)가 된다.

도게츠교(渡月橋). 진도창스님이 개설하였을 당시는 목조다리이었다.

아라시야마역에 도착하면 가까운 거리에 가쓰라강을 건너는 도게츠교(渡月橋)가 나타나고 도게츠교 주변에는 호린지(法輪寺)ㆍ마쓰오신사(松尾神社)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하타씨가 이민을 와서 개척한 땅이었으므로 1,500여년에 걸친 역사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살아남은 하타씨의 유적ㆍ문헌ㆍ구전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호린지(法輪寺)주변에는 일본 진언종 다이카쿠지파의 대본산인 다이카쿠지(大·寺)와 선종사원으로 유명한 덴류지(天龍寺)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내가 교토에 살면서 가장 자주 들린 곳 중의 하나였다. 5세기말 이고 아라시야마 일대는 야마토정권이 위치한 아스카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후된 곳이었다. 더욱 가쓰라가와 주변은 주기적인 범람으로 자연재해의 피해가 큰 곳이었기 때문에 하타씨가 이곳으로 이민을 와서 개발하기 전까지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이었다.

도롯코 관광열차를 타고 본 가쓰라강의 상류

교토의 여름은 습하고 덥다. 또한 갑자기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져 곧 바로 가모강과 가쓰라강의 제방을 무너트릴 기세로 난폭하게 흐르곤 한다. 도롯코 사가(嵯峨)역에서 도롯코 관광열차를 타면 가쓰라가와의 발언지인 아타고산의 계곡을 흐르는 사나운 물살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도롯코 사가(嵯峨)역에서 출발한 도롯코 관광열차는 아타고산의 비경인 협곡을 구불구불 돌아서 가메오카(龜岡)역에 도착하는데, 산악 증기기관차 안에서 보이는 계곡물이 어찌나 세차게 흘러가는지 차안에서 보는 것임에도 때로는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하타씨가 비록 당시의 첨단 토목기술력으로 가쓰라가와에 제방을 쌓고 치수관개사업을 하였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크고 작은 홍수의 피해는 계속되었다.

특히 헤이안은 도성건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서쪽이 자주 홍수로 범람을 하면서 황폐해지고 우경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우경이 전원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가쓰라강을 다스리기가 대단히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토에는 수많은 벚꽃의 명소가 있다. 철학의 길, 가모강변, 국제회관일대, 히데요시가 벚꽃놀이를 즐긴 다이고지(醍·寺), 가모가와에서 한 블록 떨어진 다카세가와(高瀨川) 등등 4월이 되면 교토의 곳곳에 벚꽃이 만개하여 폭발한다.

교토에 살면서 벚꽃의 명소를 부지런히 찾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가운데서도 아라시야마의 벚꽃이 특히 화려하다. 아라시야마의 벚꽃은 일본의 변종 벚꽃인 시다레자꾸라(枝垂·)인데, 시다레자꾸라는 능수버들처럼 가지가 척척 늘어진 것으로 종류도 많고 꽃 색도 다양하다.

2009년 4월 3일 아라시야마의 도게츠교를 지나서 호린지(法輪寺)에 도착하였다. 가쓰라강의 제방과 가쓰라강을 건너는 다리인 도게츠교 건설을 지휘한 사람은 신라인 하타씨 출신의 진도창(秦道昌) 스님(798∼875)으로 도게츠교는 본래 목조였으나 1934년 콘크리트로 재건축한 것이다.

아라시야마(嵐山)의 몽키파크에서 본 가쓰라강과 교토. 갈대밭이었던 이 일대를 하타씨가 5세기말에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그는 홍수로 강물이 넘쳐 오이가와(大堰川) 제방이 무너지자 직접 가래를 들고 제방 축조 공사를 지휘하였다. 도월교 오른쪽에는 '법륜사 도창 유업 대언지(法輪寺 道昌 遺業 大堰址)'라는 긴비석이 세워져 있다. '도창 스님의 업적인 큰 제방터'라는 뜻이다. 호린지(法輪寺)는 진언종 고치(五智)교단의 교토본산으로 713년 겐메이(元明)천황에 의해 교기(行基)스님이 창건하였는데, 그 때의 절이름은 가도노이데라(葛井寺)이었다.

절이름이 갈정사(葛井寺)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라시야마의 가쓰라가와 일대는 갈대가 많은 곳이었다. 신라인들은 현지인들이 살 수 없어 방치한 갈대들판에 둥지를 틀고 서로를 의지해 가며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강 상류에 제방을 쌓고 거센 강물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진도창스님이 제작한 허공장보살상을 안치한 호린지(法輪寺)

공해(空海)의 제자인 진도창스님은 이곳 갈대벌판을 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토 최초의 사찰로 하타씨의 우지데라인 교류지 9대 주지로 부임해 교류지를 크게 중건하였고, 이곳 호린지에 허공장보살상을 제작하여 이를 안치하고 호린지를 영험한 사찰로 만들었다. 진도창스님은 고대교토의 서북쪽 아라시야마에 뚜렷한 '공적(遺業)'을 남긴 참으로 도력이 높은 스님이었던 것이다.

본존 허공장보살은 '사가의 허공장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혜와 복과 덕을 받기 위해 음력 3월 13일에 13살이 되는 중학생이 전국에서 '주산마이리(十三まいり)'로 이곳을 찾는다. 내가 이곳을 찾은 날자가 2009년 4월 3일이었는데, 마침 음력으로는 3월 13일이 되는 날이었다. 대체로 일본에서 13살이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나이이다. 앳된 학생들이 기모노를 입고 본당에 줄을 나란히 서 있었다.

이 절의 전망대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교토 시내의 일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게츠교 동쪽 지역을 사가노라고 하는데, 이 일대에는 6세기말부터 7세기 전반, 즉 고분시대후기에 해당하는 하타씨의 고분군이 널리 퍼져 있다. 예컨대 대각사의 동남쪽의 대각사고분군에는 마루야마고분(圓山古墳)을 비롯하여 4개의 고분이 있는데, 1975년 발굴조사에서 신라식 금팔찌, 환두대도, 신라요의 도질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일대를 지배한 하타씨와 관련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5세기말 아라시야마를 개척한 하타씨는 그 이후 날로 번성하여 교토전역으로 퍼져나가 8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일본 전체 인구의 28분의 1에 해당할 정도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간무가 헤이안을 수도로 정하는데 하타씨가 가진 재력에 크게 의존했다고 하는 학설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종사원인 덴류지(天龍寺)의 정원

오늘날 교토는 일본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곳이다. 고대교토를 건설한 최대의 공로자는 하타씨였다. 아라시야마의 법륜사에서 다시 하타씨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하자면 가까이에 위치한 마쓰오신사(松尾神社)를 가야하는데, 마쓰오신사는 하타씨가 건립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볼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원으로 유명한 덴류지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라시야마의 벚꽃이 교토의 수많은 벚꽃 명소 가운데서도 으뜸이지만, 그 중에서도 4월초에 피는 덴류지의 벚꽃은 더욱 눈부시다. 이곳도 한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닌의 난으로 전소되었을 때 요시마사가 부지런히 조선에 사신을 보내 교토의 사원 중건 수리비용을 지원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그렇게 해서 지원을 받은 절 가운데 하나가 덴류지였기 때문이다.

/ 임병덕(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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