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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 - 후시미이나리진자와 도후쿠지

일본 교토의 동복사, 한반도로 택배를 부치다
신안 해저유물 발굴할 때 '동복사' 목간 대거 출토돼
신라 도래인 하타씨, 벼 재배로 부자가 됐다는 전설
교토 '고려사' 절터에서는 最古 기와 토담장도 발견

  • 웹출고시간2015.11.19 18:22:55
  • 최종수정2015.11.19 18:22:55
[충북일보] 교토의 교외 남쪽을 낙남이라고 하는데, 낙남에는 도후쿠지(東福寺)ㆍ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神社)ㆍ우지가미신사(宇治上神社)ㆍ뵤도인(平等院)ㆍ다이고지(醍·寺)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신사가 있다. 후시미의 남쪽에서는 가쓰라강과 가모강이 합쳐지는데, 교토의 서북쪽에서 발원된 가쓰라강이 가모강보다 훨씬 수량이 많은 강이기 때문에 합쳐진 후에도 강의 명칭은 가쓰라강이 된다. 이 강은 다시 교토부와 오사카부의 경계에서 우지천(宇治川)과 기쓰강(木津川)이 합류하여 더욱 큰 강인 요도가와(淀川)가 된다. 이 일대는 도래인과 깊은 관련을 가진 곳이 많다. 예를 들어 기쓰강이 휘감고 흐르는 교토부 기쓰가와시(木津川市)의 고마데라(高麗寺)터에서는 2007년에 일본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기와 토담장이 발견되었다. 이 사찰은 610년께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이 창건한 것인데, 고마(高麗)씨의 가족 사찰로 알려진 고려사는 나라(奈良)현의 아스카(飛鳥)사와 함께 일본 최고의 절로 알려져 있다.
2008년 교토부 재류외국인 통계에 따르면, 교토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41,119명인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27,060명으로 70%정도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교토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상당수는 남구(南區)와 후시미구(伏見區)에 집중되어 있다. 교토부의 경우에는 낙남의 우지시(宇治市)와 조요시(城陽市)에 각각 1,843명, 460명이 거주하고 있고, 낙서의 가메오카(龜岡市)에 554명이 거주하고 있다. 도시의 규모가 달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교토부에 위치한 10 여개의 도시 가운데 우지시ㆍ가메오카시ㆍ조요시에 재류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교토시의 남구와 후시미구는 하타씨가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또한 교토부의 우지시ㆍ조요시ㆍ가메오카시도 하타씨가 이민을 와서 개척하였던 교토 교외의 남쪽과 서쪽에 해당한다. 고대 도래인이 집단적으로 정착하여 이민생활을 시작하였던 교토의 서북쪽과 남쪽에 지금도 재일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 지역은 한국의 이주민들을 이끄는 무언가의 매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토의 남쪽 후시미와 우지일대는 교토상류에서 시작하는 가쓰라강과 가모강이 합쳐지는 곳으로 산색이 아름답고 수량이 풍부하다. 물이 좋은 곳에서 좋은 차와 술이 생산이 된다는 점에서 교토의 남쪽 후시미와 우지는 중국의 사천과 닮았다. 사천은 중국 최고의 명주(名酒)와 명차(名茶)가 생산되는 곳이다. 일본의 교토와 중국의 사천은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고 특히 여름철엔 무덥고 습기가 많고 비가 많이 온다. 교토의 남쪽 후시미ㆍ우지와 중국의 사천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명주와 명차가 생산될 수 있는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춘 셈이다.

이곳 후시미이나리신사의 입구를 여우가 지키고 있다. 여우는 풍요를 상징한다.

5세기말에 교토의 서북쪽에 이민을 와서 가쓰라강일대의 갈대숲을 개척하였던 하타씨는 그 이후 날로 번성하여 교토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교토 남쪽의 10조 바로 아래에 위치한 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神社)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이나리신사의 총본산이다. 후시미이나리신사는 교토역에서 전철을 타고 10조의 이나리역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나리역에 도착하여 조금만 걸으면 주칠로 된 화려한 입구가 나타난다. 후시미이나리신사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의 무대로 유명하다. 2006년 방영된 이 영화로 인하여 후시미이나리신사는 교토를 방문하는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모모야마양식의 화려한 2층 누문이 보인다.

후시미이나리신사는 상업의 신을 모시는 이나리 신사의 총 본산이기 때문에 이곳 신사는 교토의 그 어떤 신사보다도 활기가 넘친다. 넓고 긴 참도를 지나 안쪽 도리이 앞에 서면 이번에는 히데요시의 기부로 지어진 화려한 2층짜리 붉은 누문이 나온다. 신사 내의 붉은 도리이 터널이 신사의 주 건물 뒤에 있는 숲이 우거진 이나리산의 하이킹 길 위를 덮고 있는데, 이 도리이 터널을 다 걷는 데는 2시간 정도 걸린다. 후시미이나리신자는 하타씨가 세운 신사이다. 나라시대에 기록된 『풍토기(風土記)』에는 야마시로구니(山城國: 교토의 옛 지명)의 후시미이나리신사에 대한 전승이 남아 있다.

"옛날에 하타씨(秦氏)에 '이려구(伊呂具; イロコ)'라 불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벼를 재배해서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떡을 만들어서 활의 표적으로 해서 놀고 있었다. 화살이 그 표적을 맞추는 순간 떡은 백조가 되어서 도화산(稻荷山)의 봉우리 쪽으로 날아갔다. 이려구는 백조를 열심히 쫓아가서 백조가 멈춘 곳으로 가자 거기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진자(社)'를 세웠다."

하타이려구(秦伊呂具)에 대한 이 전승은 5세기말에 가쓰라강일대의 처음으로 정착하였던 하타씨가 교토 남쪽의 10조 외곽에 위치한 이곳까지 그 세력을 넓혀서 후시미이나라신사를 세우고 수전을 개발하고 토착민보다 앞서 선진영농기술로 부를 축적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신안 해저유물에서 나온 목간. 동복사·동복사공물 등의 물품꼬리표가 보인다.

후시미이나리신사에서 전차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는 도후쿠지(東福寺)가 위치하고 있다. 이 도후쿠지는 가마쿠라시대에 창건된 선종사찰로 신안해저유물의 '동복사공물(東福寺公物)'이라는 목간이 나와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선조40년(1607) 일본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고 조선도 일본에 전후 최초로 사신을 파견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경섬(慶暹)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인 『해사록』에 의하면 통신사일행은 교토의 이총을 조문한 후 도후쿠지와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교토의 선종사찰의 삼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복사의 장대한 삼문의 모습. 1607년의 통신사 사절이 이 삼문에 올라가 동복사일대의 전망에 대한 글을 남겼다.

사신으로 간 경섬은 『해사록』에서 도후쿠지의 거대한 가람배치에 대한 감탄과 도후쿠지의 위치, 그리고 도후쿠지의 삼문에 올라가 본 풍광 등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다.

1607년의 통신사 사절을 비롯하여 막부는 무언가의 이유를 붙여서 통신사 일행을 빠짐없이 이총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막부가 일본의 무용(武勇)과 전공(戰功)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교토의 유명한 사찰은 전란을 겪거나 큰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복원과정을 거쳤다. 도후쿠지도 화재와 전란의 피해를 비켜가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도후쿠지의 삼문을 비롯한 건물은 가마쿠라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교토의 선종 삼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1607년 당시에 막부가 교토시내의 가까운 사찰을 두고 도후쿠지로 안내했던 것은 적어도 그 시기 만큼은 도후쿠지가 교토를 대표할만한 사찰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병덕(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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