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단양]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2리의 죽령 8부능선 옛길 근처에 서있는 보국사지(輔國寺址) 장육불(丈六佛)은 유교사회인 조선시대 '무두불(無頭佛)'이 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높이 4.6m의 보국사지 장육불은 지난 80년대 단양군이 일대 절터 약 660㎡에 대한 시·발굴조사를 하면서 일반에 많이 알려졌다. 발굴조사 결과, 장육불은 충주 미륵리사지 입석불과 비슷한 인공 석실(石室) 안에 봉안돼 있었고, 조각 수법과 양식으로 미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졌다. 미술사학과 문명대 박사는 "수인과 U자형 옷주름 등이 국보 제 82호인 경주 감산사 아미타불과 그 양식이 거의 동일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평가 외에 국내 학계는 보국사지 장육불이 목이 잘린 이른바 '무두불' 모습을 하고 있어, 언제 어떤 이유로 머리가 없어졌을까에도 커다란 궁금증을 표해 왔다. 국내에는 보국사지 장육불 외에도 목이 잘린 불상은 많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지난 1960년대 경주 분황사 우물 속에서 무두불이 무더기로 발견된 바 있다. 현재 학계는 무두불의 생겨난 역사적 배경으로 대략 ①고려시대 몽골군 침입 ②임진왜란 때
조선시대 청주에서 수도 한양을 왕래하는 여로(旅路)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청주-진천-죽산을 경유한 뒤, 이후는 영남대로[동래로]를 이용하는 노선이다. 청주-진천-죽산 노선은 지금의 17번 국도와 거의 유사하고, 죽산 이후의 영남대로 여로는 용인-판교-양재-한강나루 등을 거쳐 도성(都城)에 입성하였다. 이 노선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상경로로 계속 기능하였다. 시장을 분석하는 이론 가운데 이른바 '중심지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고차(高次)일수록 시장이 발달해 도청 소재지인 청주는 4차 중심지, 충주와 제천은 3차 중심지, 군청 소재지는 2차 중심지, 나머지 면단위의 시장은 1차 중심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같은 이론은 좀 지난 논문 내용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보여진다. 70년대는 고도경제 성장기로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직행·고속·시내·새마을버스 등 교통발달이 눈부셨다. 그 결과, 수도 서울과의 연계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도민들은 시장발달과 함께 교통여건이 좋아지자 지역의 범위를 벗어나 서울을 '이웃동네' 가듯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속리산고속'이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 천안-청
[충북일보=청주] 청주시 내수읍 개인주택 신축 예정지에서 청동기 이른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이제까지 도내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는 비파형 동검(일명 요녕식 동검)도 포함돼 있어, 다양한 해석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지난 5월부터 최근까지 청주시 청원군 내수읍 학평리 219-5번지 일대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일대의 면적이 380㎡(115평)으로 작은 편이고, 또 개인주택 신축 예정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적 발굴조사 대상지가 된 것은 주변에 '학평리 고인돌' 등 중요 문화재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평리 고인돌은 성혈(性穴)이 10개나 존재하는 등 청동기 문화양식을 잘 간직, 시민들에 대한 전시 효과와 보관을 위해 지난 1997년 문의문화재단지로 이전한 바 있다. 발굴조사 결과, 일대에서는 115평의 좁은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주거지 1동, 원삼국(초기철기) 목곽묘 1기, 토광묘 2기 등 다양한 유구가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청동기 주거지는 장방형 'ㅁ자' 형태이면서 기둥을 떠받치는 초석[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아, 신석기 움집에서 막 변화된
[충북일보] 보은군이 속리산 말티고개에 대한 다양한 사업을 발주하면서 '백두대간'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특히 군은 이 사업의 명칭을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로 하는 등 학생층을 겨냥하고 있어, 사실 관계를 더욱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25일 보은군 등에 따르면 군은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58억원을 들여 국도 37호선의 통과로 끊어진 말티재 정상부(해발 430m)의 생태축[마루금]을 복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 마루금을 잇는 생태축 복원은 말티재 정상 도로 위에 3층 규모의 구조물을 건립하는 등 종전에 해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군은 내년 6월까지 △1층에는 차량이 통행하고 △2층에는 백두대간 역사·문화 상설전시관 등으로 활용하며 △3층 상단부에는 말티재 지형과 식생을 복원해 야생동물이 넘나들 수 있는 생태통로를 구축할 계획이다. 따라서 이번 공사가 완공될 경우 말티재 일원은 내륙 산림환경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고, 고개의 역사성과 상징성도 접할 수 있는 등 속리산의 관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공개된 조감도에
보은군이 말티고개에 '속리산 수학여행 1번지'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말티고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꼬부랑 길'이다. 말티고개의 노폭을 확장하고 선형 개량을 처음 시도한 관료는 1920년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박중양(朴重陽·1872-1959)이다. 박중량의 일본식 이름은 '호추시게요'(朴忠重陽)로, '신념적 친일파'라고 불릴 정도로 친일의 행각이 뚜렷하다. 1923년 2월 충청북도지사에 부임한 박중양이 말티고개 확장공사를 처음으로 하게 된 데는 유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 작용했다. 1923년 4월 17일자 기사에 의하면 박중량은 도내 순시를 이유로 화양동 등 괴산군내 명승지를 무려 7일 동안 구경하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티고개를 넘으려 한 것은 역시 법주사를 유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는 말티고개 입구에 이르러 소를 끌어오도록 명령했고, 그 이유는 "도지사인 내가 어찌 흙을 밟을 수 있느냐"였다. '당대의 일도 소관으로서 엇지 차에서 내려 흙을 발브랴하는 생각이 드럿는지 박중양 씨는 긔어코 차에서 나리지를 안코 촌가에 가서 소를 꺼러다가 자동차를 꺽러넘기게 한 결과 겨우 도지사의 위엄은 직히게 되얏섯다.'- 박중양은 바로 이
옥화구곡은 여름철 청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남한강 상류인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보은군 내북면 봉황리 수계변에 설정돼 있다. 구곡은 이름 그대로 곡(曲)이 9개가 설정되는 것이 보통으로 각 곡마다 작명한 지명과 함께 시가 뒤따르고 있다. 옥화구곡에도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제 1곡 만경대(萬景臺)→2곡 후운정(後雲亭)→3곡 어암(漁巖)→4곡 호산(壺山)→5곡 옥화대(玉華臺)→6곡 천경대(千景臺)→7곡 오담(鰲潭)→8곡 인풍정(引風亭)→9곡 봉황대(鳳凰臺) 등 구곡이 설정돼 있다. 9곡 가운데 8개는 해당 지점의 자연경관 특징을 반영해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제 2곡 후운정 만큼은 그런 분위기가 풍기지 않는다. '후운'은 조선 선조~숙종 연간의 홍석기(洪錫箕·1606∼1680)라는 인물로, '최치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치원(崔致遠·857∼?)은 통일신라 말기를 살았고, 그가 남긴 문장에는 천재성이 묻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육두품 출신으로 신분 상승의 한계를 절감했고, 따라서 시대를 잘못 만남 불우(不遇)을 탓하며 산천을 주유했다. 홍석기가 옥화구곡 제 2곡에 정자를 세우고 이를 '후운정'으로 명명한 것은 자신도 최치
[충북일보] 지난해 하반기 처음 발견됐다고 보도된 도내 영동의 '孝子朴然'(효자박연) 비가 새롭게 정착할 장소를 찾고 있다. 18일 영동군 등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서울에 본사를 둔 모 일간지는 '孝子朴然'의 명문이 새겨진 높이 117㎝·폭 34㎝·두께 10㎝ 크기의 화강암제 비석을 후손 박모씨가 처음 발견했다고 크게 보도하였다. 박연은 조선 세종대 아악을 정리해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로, 어릴적 이름〔초명〕은 朴然이었다.. 이 신문은 나아가 비 측면에 '建文四年壬午三月日(건문사년임오삼월일)' 명문이 새겨져 있는 점을 들어 비가 조선 태종 2년(1402)에 건립됐다고 주장했다. '建文'은 중국 명나라 혜제(惠帝)의 연호로 조선 태종 1402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영동군의 입장은 이와 다소 다르다. 군 관계자는 "효자 박연비는 본래 박연 재실인 경란재 앞에 위치하면서 이미 공개돼 있던 상태"라며 "해당 언론이 마치 처음 발견된 것처럼 보도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고 밝혔다. 영동에 거주하는 난계후손 박모(56) 씨는 박연효자비의 존재가 전국적으로 크게 알려지자 도난과 파손을 우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왜의 수군이 남해를 새까맣게 뒤덮으며 몰려오자 배를 스스로 침몰시킨 후 육지로 도주하려 했다. 이를 중간에서 "그러면 안 된다"며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협력을 건의한 인물이 그의 참모이자 우리고장 진천 출신인 이영남(李英男, ?~1598)이었다. 원균은 이영남의 의견을 수용, 전열을 정비한 후 이순신의 전라좌수군과 연합해 옥포, 당초 등의 해전에서 잇따라 이겼다. '승리'라는 전리품이 들어오자 두 사람 사이에 '공다툼'이 일어났다. 그 결과, 원균은 1594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병사)로 전출됐다. 당시 절도사가 머무는 병영(兵營)은 우리고장 청주에 있었다. 원균은 왜군이 다시 북상할 것으로 예견하고 청주지역 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흔히 상당산성(사적 제 212호)은 조선 숙종 때 전면적인 보수를 해 석성(石城)으로 수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보다 앞서 상당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인물은 원균이었다. 그는 이때 청주고을 주민뿐만 아니라 충북 전역의 백성을 징발됐다. "병사(兵使) 원균(元均)은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성을 쌓을
[충북일보] 조선시대 최대 정치적 반란 사건인 무신란(戊申亂)이 실패한 데는 대략 5가지 원인이 배경이 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동대학교 고수연(교양학부·충북대 사학과 박사) 교수가 최근 《한국사연구》 제 170집에 논문을 발표했다. 무신란은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소론 일부와 남인들이 충청·경기·영남·호남 등의 지역에서 일으킨 정치적 반란으로, 당시 청주읍성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간 바 있다. 그동안 무신란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분석이 있어왔다. 그러나 고 교수는 이번 논문을 통해 정파적 배경과 반군간의 지역 네트워크를 살펴보는 등 보다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논문은 무신란이 실패한 원인으로 ①정미환국과 소론준소 지도자인 박필현의 지방 발령 ②안동지역 퇴계학파의 반군대열 이탈 ③호남반군과 변산 명화적의 연대실패 ④호서반군의 안성과 죽산전투 패배 ⑤각지역 반란군의 합류 실패 등 대략 다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논문은 ①에 대해 "정미환국으로 소론 완소가 정권을 잡자 서울의 소론 준소계는 반란에 소극적으로 변한다"며 "여기에 소론 지도자인 박필현이 태인현감으로 좌천되면서 반군은 계획 단계부터 세력이 약화됐다"고 밝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전라도 정읍에서 숙종의 사약을 받기 직전 수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서면으로 유지를 내려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崇禎帝)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실 것을 당부했다.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 민정중·정호(鄭澔) 등 노론계 인물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했다. 만동묘의 '만동'은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글자다. 그 뜻은 만 번을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양자강·황하 등 중국의 강은 서쪽이 높기 때문에 동쪽, 즉 우리의 서해로 흘러든다. 선조는 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충(忠)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에서 만절필동의 새겼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20여만명의 대군을 파견, 조선을 왜로부터 구해준 인물로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일어서게 도와준 은혜)'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의 위패가 모셔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반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은 임진왜란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만동묘에 나란히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의
[충북일보] '큰아버지(백부)가 후사 없이 죽은 상황에서 조모가 사망했을 경우 그 집안의 장례는 큰아버지의 아내(맏며느리·총부)가 주관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큰아버지 동생 집안이 주관하는 것이 맞을까, 단 시기는 조선 전기인 명종대이다.' 이 논쟁은 맏며느리권(일명 총부권)과 형이 죽으면 그 권리가 동생으로 이양된다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종법이 충돌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예송(禮訟)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임진왜란 직전의 《명종실록》에 실감나게 기록돼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주인공이 우리고장 영동군 연고의 여문망(呂文望, ?~?)이라는 인물이어서 지역적인 관심을 더 받고 있다. 명종 7년(1552) 영동 함양여씨 집안의 맏며느리권과 형망제급을 문제를 둘러싸고 명종과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시관(試官) 사이에 이례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의 요지는 조모가 막 사망한 상황에서 △누가 집안의 장례를 주관하는 것이 당시 종법에 맞고 △만약 여문망이 장례 주관자로 판정 날 경우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문과 시험을 볼 수 있느냐였다. 당시 시관은 여문망(①)과 맏며느리(②)가 서로 주장하는 입장을 행한 말까지 인용해 상세히
조선 중기 윤임(尹任, 1487~ 545)의 집안에서는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중종의 제1 계비가 됐다. 반면 윤원형(尹元衡) 집안에서는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중종의 제2 계비가 됐다. 당시 세간에서는 외척의 반열에 오른 두 집안을 빗대 윤임은 '대윤', 윤원형은 '소윤'이라고 일컬었다. 1545년(명종 즉위) 소윤이 대윤을 공격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소윤 윤원형은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의기투합, 윤임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윤임은 실각, 귀양을 가던중 살해됐다. 살해된 장소가 공교롭게도 우리고장 충주목 어디쯤이다. "윤임은 자는 임지(任之)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정미년에 출생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찬성에 이르렀다. 을사년에 남해(南海)로 귀양 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사사(賜死)되니 나이는 59세였다."- 조선중기 문신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작문하지 않는다는 기록정신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이 같은 기록정신을 바탕으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그런 《연려실기술》은 을사사화의 발생 배경을 좀 다르게 적어놓고 있다. 대윤
[충북일보] 훈요십조 제8조의 '차현이남 공주강외'(車峴以 南公州江外)는 후백제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특히 이 주장은 새로운 지역으로 청주도 제시, 지역적인 관심을 강하게 끌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은 임종이 다가오자 942년 대신 박술희를 처소로 불러 후대 왕이 국가 경영을 할 때 지켜야할 항목인 '십조'(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바로 '훈요십조'로, △불교 숭상 △왕위계승 원칙 △서경(평양) 중시 △거란 적대시 등을 대략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제 8조 '차현이남공주강외'는 특정 지역에 대한 왕건의 정치·정서적 배타를 강하게 나타낸 것으로 지역감정의 출발점으로 인식돼 왔다. 《고려사》 태조 세가와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는 원문(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차현 남쪽 공주강 바깥은 산과 땅의 형세가 모두 반역의 모양으로 달리므로 인심 또한 그러하다. 그 아래 주군인은 조정에 참여 하거나 왕후국척과 혼인을 하게 되어 국정을 장악하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일으키거나 통합된데 대한 원한으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난을 일으킬 범행을 일으킬 것이다(車峴以南公州江外 山形地勢幷趨背逆人心
[충북일보] 한국전쟁(6.25)이 일어난지 66주년을 맞고 있는 가운데, 시(詩)가 새겨진 한 마을 표지석이 새삼 오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충주 신니면 용원부락에서 노은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들판 끝자락의 신의실(信義室) 입구에 이르러 시가 새겨진 이 마을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마을 표지석 밑에 새겨진 시는 '信義室'로, 작자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이흡(李洽, 1908~?)이다. 그러나 지금의 마을주민 누구도 이흡이 누구이고, 또 그의 시가 왜 마을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지 모르고 있다. 이흡은 청주 남이면 출신의 팔봉 김기진(金基鎭, 1903~1985)이 1934년 펴낸 〈조선문학의 현재의 수준〉이라는 글에서 이효석·이무영·채만식·유진오 등과 함께 사회주의 성향의 '경향파'로 분류했던 시인이다. 본명이 이강흡(李康洽)인 이흡은 1908년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신의실 마을에서 아버지 이기종과 어머니 은인순 사이에서 1남6녀의 외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던 지식인이다. 그리고 인근에는 그와 동갑·동향·동창으로, 후에 농민작가로 명성을 날리는 이무영(李無影, 1908~1960)이 살았다. 훗날 이흡이 《신동아》(1
[충북일보]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지도 가운데 '1892년 군현지도'(혹은 〃 지방지도)가 있다. 흥선대원군으로 상징되는 19세기말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로, 서양 기운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1866년(고종 3) '서세'는 한반도 서해안에도 출현하였다. 미국 제너널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안 도민들의 장마철 화공(火攻)을 받고 침몰했다. 당시 평안관찰사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개화파의 비조가 되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6)였다. '쇄국'(鎖國)은 나라에 빗장을 지른다는 뜻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병인양요(1866) 이후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에 맞서기 위해 포수(砲手)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수부대는 수도 한양과 병인양요가 일어난 강화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됐으나 독일인 오페르트의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군 아버지) 묘 도굴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내륙에도 배치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황간현은 지금의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황간면 일대로, 백두대간 추풍령 이북이 여기에 속한다. 당시 흥선대원군 정부는 추풍령 이북에도 포수부대를 배치하고, 일대를 '포수
[충북일보=충주] 충주시가 남한강 명소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대상을 다각화할 필요가 있고, 이 경우 조선중기 문신인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그의 한시에는 조선 중기의 목계나루 모습이 풍속화를 보듯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어,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부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충주시청 공무원들로 구성된 '수피아들의 행복여행'은 금가면 하담 일대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제2 고향이었던 점을 감안, 일대에 대한 관광 명소화 사업 제안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현재 정약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소가 있던 하담 일대에는 하담진, 두무소, 모현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앞서 본보는 지난 2015년 9월 1일자 '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정약용과 충주 하담' 기사를 통해 관련 내용을 지역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심층 보도한 바 있다. 당시 기사로 인해 열흘 후 다산의 유적이 밀집해 있는 경기도 남양주지역 인사들이 충주 하담을 직접 찾기도 했다. 그러나 충주시가 남한강 관광 명소화 작업을 실감나면서 실증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다산 외에 문신 조석윤이 지은
임진왜란 때 최소 10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전쟁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왜는 이렇게 끌고 간 조선인 포로의 일부를 국제 노예무역에 이용하였다. 당시 왜는 포르투칼로부터는 조총과 담배를 수입하면서 조선인 포로를 결재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왜는 조총 1자루를 구입하는데 조선인 피로 40명을 지불하였고, 당시 노예시장이 개설된 곳은 태평양전쟁 때 원자탄 피폭을 당하는 나가사키(長崎)였다. 조선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1607년(선조 40) 교류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고, 당시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의 조선통신사는 그해 1월 한양도성을 나서 4개월 후에 왜의 수도인 에도(江戶, 현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도쿠가와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던 만큼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사로잡혀 온 귀국의 남녀들이 각 지방에 흩어져 산 지 20년이 됩니다. 나라 안의 선비들이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줌으로써, 혹 시집이나 장가간 자도 있고 어린 아이를 둔 자도 있습니다.
[충북일보] 충북에서 가장 오래 된 문집은 조선초기 정추(鄭樞, 1333~1382)의 문집인 《원재집(圓齋集)》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번에 영동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소장 임동철·전 충북대 총장)의 노력으로 《회와시고(晦窩詩稿)》 등 88개 문집의 존재도 새롭게 확인되었다. 호서문화연구소가 최근 이같은 내용이 담긴 《충청북도 지역의 문집해제》(출판사 조율)를 출간했다. 선조들이 남긴 문집은 도내 유교시설과 각 가정에 산재하고 있으나, 하나의 책으로 정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9백80여쪽의 이번 책은 임소장을 비롯해 이두희(한학자), 신범식(영동대 교수), 고수연(〃), 김용남(충북대 강사), 신호철(충북대 명예교수), 정하영(이화여대 명예교수), 정세근(충북대 교수), 이규일(국민대 교수), 이석주(동국대 교수) 등이 집필진으로 참여하였다. 10명의 집필진이 지난 2012년부터 4년 동안 관련 자료를 수집한 결과, '충북 연고'의 조선시대 문집은 총 2백52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소장은 충북 연고의 기준에 대해 △충북지역에서 출생·성장한 인물 △사승(師承) 관계와 친·외척으로 일정기간 충북에 거주하였던 자 △충북에 묘소가 있거나 문
[충북일보] 충북 음성지역이 동학 북접군의 남진 출발지이자 마지막 종착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거의 제기되지 않았던 주장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음성지역은 동학의 또 다른 사적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가 얼마전 열린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항일의병 학술대회'에서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성격' 논문을 발표하였다. 북접(北接)은 충청도 등 주로 중부지역에서 활동했던 동학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전봉준이 이끈 납접(南接)에 비해 보다 온건한 입장을 내세웠다. 신 교수는 이 자리에서 『갑오군정실기』, 『양호우선봉일기』 , 『갑오동학란』,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등의 사료를 근거로 "동학 북접군의 출발지는 음성 황산지역이고 공주 우금치전투 후 되돌와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은 음성 되자니 지역"이라고 밝혔다. 『갑오군정실기』과 『양호우선봉일기』는 동학군을 진압한 관군 지휘부의 기록물이고, 『갑오동학란』와 『균암장 임동호씨 약력』은 각각 권병덕과 임동호가 남긴 글이다. 황산 북접군은 1894년 9월 18일 교주 최시형의 기포령〔봉기령〕에 의해 충청도 뿐만 아니라 인접 경기, 강원도 등에서도 몰려든 동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15년만에 조선과 왜(일본)는 국교를 재개하였다. 열도의 새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쓰시마를 통해 "국교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국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도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선조 40년(1607) 임진왜란 종전 후 처음으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정사는 여우길(呂祐吉, 1567∼1632), 부사는 청주가 관향으로 《해사록》을 쓴 경섬(慶暹, 1562∼1620)이었다. 경섬은 1607년 1월 12일 궁궐에 들어가 하직인사를 올렸고, 그러자 선조는 간단한 술과 함께 말안장, 정남침(定南針 나침반)을 하사하였다. 한양 도성을 빠져나온 경섬은 한강의 어느 촌락에서 통신사로서의 첫밤을 맞았고, 이때 선조의 국서를 살펴봤다. "임진년의 변란은, 귀국이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극히 참혹한 화란(禍亂)을 만들고 심지어 선왕의 능묘에까지 욕이 미쳤으므로, 우리나라 군신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어, 의리에 귀국과는 한 하늘 밑에 살지 못하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중략) 이제 귀국이 옛일을 혁신하여 위문 편지를 먼저 보내와 '전대의 잘못을 고쳤다' 하여 성의를 보이니, 참으로 이 말과
[충북일보=음성] 음성군 음성읍 사정리 강당말의 5~6기의 집단 무연고 묘는 구전하는 것처럼 '동학난리 의병묘'일까. (사)음성향토사연구회 주관한 '음성지역 동학농민혁명·항일의병 학술대회'가 '한말 음성지역의 사회경제적 동향과 의병 투쟁'을 주제로 지난 27일 오후 음성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충북대 박걸순(사학과) 교수는 음성읍 사정리 강당말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5~6기 집단 무연고 묘에 대해 학계의 입장을 처음으로 거론하였다. 강당말의 이 집단 무연고묘는 마을주민들 사이에 동학군 또는 의병의 묘로 구전돼 왔고, 마을지인 『사정향토지 부용』에는 '무명의 동학난리 의병묘'라고 표현돼 있다. 박교수의 이날 발표에 따르면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1907) △『진중일지』1907년 9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4일자 등에 구한말 사정리 전투를 기록한 자료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측 자료인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는 1907년 9월 19일 벌어진 사정리 전투에 대해 "2시간 동안이나 교전한 끝에 그 대부분을 무극장 방향으로 궤주시킴. 적이 남겨둔 시체는 6구이고 우리 측 사상자는 없음. 노획한 총은 5정임"
《병자일기》는 문신 남이웅(南以雄, 1575∼1648)의 부인 남평조씨가 쓴 일기로, 병자호란 전후의 농촌 현실과 노비들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병자일기》 속의 남평조씨 생활은 대략 난중피란기(1636년 12월 15일~1637년 2월 17일), 서산·당진체류기(1637년 12월 18일~1638년 1월 25일), 충주 이안 체류기(1638년 1월 26일~5월 28일), 서울 귀환기(1638년 5월 29일 이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안은 지금의 충주시 대소원면 본리에 해당한다. 이런 《병자일기》는 국문학적으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병자일기》는 해서체의 난필에 띄어쓰기가 안 돼 있어 단번에 읽히가 쉽지 않다. 그러나 수정체를 서서히 움직이면 중세 우리말의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김영춘의 논문에 따르면 《병자일기》를 통해 17세기 국어의 단모음화·전설모음화·원순모음화·모음이화·자음동화 등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단모음화는 치음(齒音, ㅅ·ㅈ·ㅊ)의 영향을 받아 ㅑ·ㅕ·ㅠ 등 복모음이 ㅏ·ㅓ·ㅜ 의 단모음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남평조씨는 충주 체류기간 쓴 일기에서 지금의 '소'[牛]를 '쇼', '소나기'를 '쇠나기', '
[충북일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자를 크게 뜻글자[표의문자]와 소리글자[표음문자]로 나눠지고 있다. 뜻글자는 그림을 시각화한 것이고, 소리글자는 말 그대로 소리를 문자화한 것이다. 뜻글자는 대표하는 것은 한자(漢字)로, 인류의 지식을 축적·저장·확산하는데 커다란 이바지를 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시대를 맞으면서 한자는 컴퓨터 자판의 첫 번째 문자입력에서 밀려났다. 현존하는 한자는 대략 10만자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10만자를 컴퓨터 자판에 모두 노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려면 한자음을 로마자 발음으로 변환한 '한어병음'(漢語拼音, Chinese Romanization) 버튼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자는 발음이 같은 글자가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로 해당 문자의 성조(聲調)를 확인한 후에야 원하는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 가령 컴퓨터에 한자 '馬'(마)를 입력하려 할 경우 로마자 발음 'ma'를 치면 같은 발음의 麻·罵 문자도 함께 노출된다. 이들 글자군 가운데 '馬'의 성조에 해당는 저요조(低凹調, 제3성)를 선택해야 문자 입력이 끝난다. 나머지
고려 공민왕 10년(1361) 11월 홍건족(紅巾族)이 쳐들어왔다. 홍건족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오랑캐가 아닌 한족이었다. 홍건족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자 공민왕은 겨우 28명의 신하만 데리고 황급히 개경 도성을 빠져나와 몽진에 올랐다. 국왕의 도피는 피난이 아닌 몽진(蒙塵)으로 표현했다.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궁궐의 편안한 생활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음력 11월은 겨울의 초입에 해당하는 시기로, 어가가 경기도 이천에 당도하자 진눈깨비가 내렸다. 공민왕은 젖은 옷을 모닥불에 말려야 할 정도로 몽진은 비참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가가 이천현(利川縣)에 당도했는데 비에 젖은 왕의 옷이 얼어붙자 장작불을 피워 한기를 막았다.'- 우리 민족의 침략사 가운데 가장 잔혹한 장면의 하나가 이때 벌어졌다. 《고려사》의 기술에 의하면 당시 홍건족의 잔혹한 행동은 야만의 극한에 달했다. '이날 적군이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
[충북일보] 내륙인 청주시 오송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유적지에서 이례적으로 제염(製鹽) 토기가 발굴됐다. 특히 이 제염토기는 신석기 이후 바닷가 유적지에서만 간헐적으로 출토됐던 토기여서 학문적인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조상기)은 지난 3월부터 제2 생명과학단지 조성 예정지인 오송읍 봉산리와 정중리 일원에서 발굴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청동기의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기, 원삼국~삼국시대 토광묘, 고려시대 석곽묘, 조선시대 토광묘 등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가운데 정중리 12지점에서 발굴된 U자형의 초기철기시대 토기는 △높이 10㎝ 정도의 크기로 문양이 없고 △포탄을 엎어놓은 U자형이며 △그런 가운데 불이 닿는 밑부분이 유난히 두꺼운 모습을 하고 있는 등 전형적인 제염토기로 파악됐다. 관련 논문에 의하면 소금은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인 가운데 구석기인들은 짐승의 피나 골수, 그리고 파도로 인해 해변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서리소금 등을 통하여 소금을 섭취했다. 신석기 이후에는 정착에 의한 농경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야채 섭취가 급증했다. 그로 인해 소금 섭취량이 더욱 늘어났고 이 과정에서 제염토기가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