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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송병순

家學으로 성리학 공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됐으나 불출사
을사조약 체결되자 '토역문' 작성해 '을사오적' 처단 주장
일제 거액 은사금으로 포섭시도, 일언지하에 단호히 거부
1912년 음독, 그의 충절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 웹출고시간2015.11.15 17:20:38
  • 최종수정2015.11.15 17:26:59

송병순

[충북일보]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은 영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다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1912년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이다. 그는 대전에서 태어났으나, 1883년 영동으로 이사한 뒤 후학 양성에 전념했으며, 1888년과 1903년에 각각 의금부도사, 홍문관의 서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하자 「토역문(討逆文)」을 작성하여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했으며,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다.

◇ 충북 영동에서 제자 양성에 주력하다

송병순의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心石),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1839년 4월 10일 충남 회덕(懷德) 석남(石南)(현,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으로 아버지는 면수(勉洙), 어머니는 이씨이고,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병선(秉璿)의 아우이다.

송병순은 7세 때부터 참의를 역임한 백숙 달수(達洙)와 좌의정을 역임한 당숙 근수(近洙)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을 공부했다. 송병순에게 있어 성리학은 단순한 차원의 학문이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로서 마땅히 연구해야할 정학(正學)인 동시에, 선조 송시열이 주자성리학을 절대적으로 추종했다는 점에서 선조의 가르침이 담긴 가학(家學)이기도 했다. 송병순이 50세 되던 1888년에 이조(吏曹)의 천거로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음에도 나아가지 않은 정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의 문충사 전경

송병순은 평생을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주력했는데, 이중 제자 양성과 관련해서는 충북 영동과 인연이 깊다. 일찍이 고향인 회덕과 충북 옥천을 왕래하던 그는 1883년 영동군 학산면 활산( 永同郡 鶴山面 活山)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제자를 교육시켰다. 그가 영동에서 제자를 양성한 이유는 영동이 고향인 회덕과 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지역이 일찍부터 노론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산면과 인접한 지역에 설립되었던 서원들, 즉 심천면의 초강서원(1611), 매곡면의 송계서원(1664), 황간면의 한천서원(1717)은 모두 노론계 서원으로 송시열을 제향 했던 곳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영동에 자리 잡은 송병순은 제자를 양성하며 주자성리학을 설파했다. 이때 사용된 교재는 백가(百家)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중심이었으며, 강학의 방법으로는 강학과 토론을 중시했다.

◇ 급박한 정세 속에서 성리학적 가치관을 고수하다

송병순 동상(충북 영동읍 영동역 입구)

송병순이 성리학 연구와 제자양성에 몰두하던 1894년, 국내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19세기 이래 심화되던 봉건제적 모순과 일본을 축으로 한 열강의 침탈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으로 촉발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은 한국을 놓고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벌이면서 주도권 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비록 동학이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들고 있긴 했지만, 송병순의 입장에서는 국왕의 통치를 부정하는 반란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의 세력이 급격히 전파되는 상황은 그에게 있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영동은 동학의 대도소가 있었던 보은과 인접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에 송병순은 주자성리학의 질서체제를 정착시키고자 향약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이는 동학의 영향력으로부터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시국을 바라보는 그의 보수적인 색채가 나타나는 사례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95년 10월 8일 국모가 일본에 의해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고, 이와 함께 제3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1월 15일에 단발령이 선포되었다. 두 사건은 송병순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자의 경우, 국모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국가적 중대 사건이었고, 후자 역시 자신들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신체를 훼손하는 반인륜적 처사였기 때문이다. 이에 송병순은 자정(自靜)의 방식을 통해 격변기의 혼란상에 대처했다. 칩거하면서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고 성리학적 이치 연구에 몰두한 것이다.

◇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다
일제의 국권침탈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제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하여 대한제국에서의 군사활동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그해 8월 22일에는 한일협정서(韓日協定書) 또는 제일차한일협약(第一次韓日協約)를 강제하여 메가타 다네타로를 재정고문, 미국인 스티븐슨을 외교고문으로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일제의 내정간섭은 1905년 11월 17일, 조선통감부의 설치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제이차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의 늑결로 이어졌다. 을사조약의 내용은 한 나라의 자주권이 상실됨을 의미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필사적으로 항거했다. 전국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난 가운데, 금산 군수 홍범식(洪範植), 시종무장관 민영환(閔泳煥), 전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등이 을사조약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자결순국의 길을 택했다. 송병순의 형 송병선도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을 들은 직후 상경하여 조약 반대 상소투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와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에 극력 항쟁하였다.

을사조약의 늑결 소식은 송병순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송병순은 망연자실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내 조약의 늑결을 주도한 오적(五賊 : 朴齊純·李址鎔·李根澤·李完用·權重顯)의 처단을 주장하는 「토역문」을 지어 각 도에 보냈다. 임금과 신하의 자리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므로 임금을 능멸한 난신적자를 처단해야 국가의 기강이 설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자결순국의 길을 택하다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점점 더 급박한 상황으로 몰렸다. 1907년 7월 20일, 헤이그특사 파견을 계기로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했고, 곧 이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당한 가운데 관리임명권과 사법재판권 역시 모두 일본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의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계기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송병순이 자결을 시도한 장군바위(충북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

국가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에 따른 슬픔은 송병순에게 크나큰 고통으로 작용했다. 송병순은 국가 없는 하늘 아래서 하루도 더 삶을 연장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가족과 제자들도 송병순의 비통한 심정을 염려하여 무슨 일이 있을까 하루 종일 그의 기색을 살폈다.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송병순은 경술국치가 있은 직후인 9월 7일, 서암(西巖)에서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했다. 다행히 송병순을 따르던 문용호(金容鎬)가 뒤에서 송병순을 껴안아 가까스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지만, 이후 송병순은 두문불출하며 탄식의 나날을 보냈다.

한편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 지배하기 위해서 대한제국 인사들을 포섭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소위 은사금(恩賜金) 명목의 돈을 살포했다. 마수는 곧 송병순에게도 뻗쳤다. 돈으로 송병순의 마음을 매수코자 한 것이다. 일제는 그해 12월 송병순의 집에 사람을 보내 은사금을 수령하라고 강요했지만, 침략자가 주는 돈에 절개를 버릴 송병순이 아니었다. 송병순은 의롭지 않은 재물은 결코 받을 수 없다며 끝끝내 거부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이듬해인 1911년 3월까지 지속적으로 헌병을 보내 은사금을 수령할 것을 종용하던 일제는 다른 수단을 강구했다. 은사금으로는 송병순을 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경학원 강사직으로 송병순을 포섭하려 한 것이다. 그해 7월 성균관 교수인 권영우가 찾아와서 현재의 성균관 직제를 장차 경학원으로 바꿀 것인데 그때 송병순을 천거하겠다고 말했다. 송병순은 이번에도 완강히 거절하였다.

1912년 3월 14일, 송병순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대제학 박제순 명의로 경학원 강사의 직첩을 기어코 보내왔다. 송병순은 일제의 처사에 분개했으며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송병순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었던 성리학적 이상 국가와 군주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한층 더 송병순의 마음을 짓눌렀다. 송병순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1912년 3월 22일, 송병순은 스스로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이용철(독립기념관 연구원, 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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