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관은 선행 모두를 만세에 남기는 것" 조박(趙璞, 1356~1408)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양조(兩朝)를 산 인물로 우리고장 청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사관이 되어 임금과 대신의 토론공간인 경연(經筵)에 참여하려 했으나 2대 임금인 정종이 꺼려하였다. 그러자 임금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군(人君)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관은 인군의 착하고 악한 것을 기록하여 만세에 남기니, 두렵지 않습니까."- 실록은 '상(정종)이 그렇게 여겼다'(上然之)라고 적었다. ◇ "사관이 모르게 하라", 그 말까지 기록하다 조선 초기의 사관 민인생(閔麟生)은 생몰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태종대를 산 인물로 나타난다. 조선 사관역사 가운데 가장 에피소드한 장면이 그로부터 작성되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태종(이방원)이 편전(便殿·일종의 휴식공간)에까지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자 이렇게 설전을 벌였다. 태종: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민인생: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
지금의 우리고장 진천은 고구려에 속했을 때는 '금물노군'(今勿奴郡), 신라 관할이었을 때는 '흑양군'(黑壤郡)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권35 잡지4에 이에 관련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흑양군 또는 황양군(黃壤郡)이라고도 하였다. 본래 고구려 금물노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진주(鎭州)이다. 인용문의 '지금'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삼국사기》를 쓰던 고려 인종 23년(1145) 무렵을 의미하고 있고, 그리고 '진주'는 지금 지명인 '진천'의 전단계 지명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당시 진천의 행정 위계가 '현'(縣) 아닌, '군'(郡)으로 표현돼 있다. 이것은 그 아래 '현'을 거느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니나 다를까 《삼국사기》 관련 대목에는 '영현(領縣)이 둘이었다', 즉 2개의 현을 거느리고 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도서현(都西縣)은 본래 고구려 도서현(道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도안현(道安縣)이다. 음성현(陰城縣)은 본래 고구려 잉홀현(仍忽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 지금의 음성, 증평 군민들은 다소 언짢아 할 수 있
[충북일보] 고려~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이유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정보 대중화를 불러왔지만, 한국의 금속활자는 한자가 지닌 속성 때문에 정보 독점주의를 낳았기 때문으로 지적됐다. 한국고전번역원 최채기 수석연구위원은 얼마전 발표한 '고전산책' 제474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최연구원에 의하면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은 이를 부서(符瑞), 즉 제왕의 상징물로 표현하였다. 때문에 정조는 규장각을 설립하고 활자의 주조를 지시하면서 "서적을 인쇄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있어야만 사방의 백성에게 혜택을 줄 수 있고 사람의 지혜를 계발할 수 있다(當有摹印之具, 然後可以嘉惠四方, 啓發人知也)"라고 말하는 등 통치 도구의 일부로 인식했다. 그러나 최 연구원에 의하면 인쇄술 하면 여전히 구텐베르크이고, 또 세계 문명사는 구텐베르크 이전과 이후를 구분되고 있다. 그는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사회를 뒤바꾼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다"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토대가 된 종교개혁 10년 동안 루터의 저술은 600만 부나 인쇄돼 팔려 나갔다"
[충북일보] ◇ 지명 속리산 속리산의 지명 유래는 상세히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한자 '俗離'를 의미적으로 해석해 이해하는 정도이다. 『고려사』(1451) 지리지에는 보령군(報令郡·지금의 보은군)에는 '속리산(俗離山)이 있는데 신라 때에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불렀는바 중사(中祀)가 행해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1614)에 '산이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난 것이다(山非離俗 俗離山).'라는 문장이 있어 주목된다. 그는 이 글을 설명하면서 '임제는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을 팔백 번 읽고 글귀를 얻기를 道가 사람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道를 멀리 하고, 山이 俗을 떠난 게 아리나 俗이 山을 떠났다고 했는데 이는 중용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라고 부연하였다. 따라서서 표현 '속리'의 지적재산권은 조선 선조대의 인물인 임제(林悌, 1549~1587)에게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장대를 향하는 길목에는 세심정이 위치하고 있고, 이 곳에는 '山非離俗 俗離山' 귀절이 적힌 입간판이 사시사철을 등산객을 맞고 있다.(사진) ◇ 인문학적인 공간 속리산의 경승성을 노래한 시는 고려시대부터
패륜(悖倫)의 본래 의미는 윤리에 어긋난다는 뜻이고, 불윤(不倫)은 윤리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지금은 패륜은 부모에게 큰 죄를 지었을 때에 붙이고, 불륜은 보통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말뜻이 다소 변했다. 조선 성종 때 우리고장 청주목에서 희대의 불륜사건이 일어났다. 청주목의 변석령(邊石齡)이라는 사람이 장모 막비(莫非)와 간통한 것으로 신고됐으나 장모는 이를 부인했고, 대신 중 학초(學初)와 간통을 해 임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반면중 학초는 막비와의 간통사실을 부인했다. 조선은 강상윤리[삼강오륜]를 매우 중히 여겨, 이를 어긴 사람은 중범죄자로 다뤘다. 따라서 지방정부가 아닌 국가에서 직접 수사를 맡았다. 따라서 이 사건도 지방 청주목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형조에 배당됐다. 혹독한 국문이 시작되자 변석령은 6차 고신(拷訊)을 받고 "장모 막비와 간통했노라"라는 자백하였다. 고신은 고문(拷問)과 같은 말로 숨기고 있는 사실을 강제로 알아내기 위하여 육체적 고통을 주며 신문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막비는 13차 고신을 당하고서도 "사위(변석령)가 아닌 학초와의 간통으로 임신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고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의 연인으로,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 여성으로 근래들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1910년대 청주군 부용면(현 세종시 부강면) 부강에서의 7년 생활이 그녀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녀의 얼굴 사진은 잘못 알려져 온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인터넷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치면 뉴스는 물론 각종 백과사전에 △눈이 크고 △가운데 가르마를 했으며 △그리고 기모노를 입은 여성 얼굴이 검색되나 이 여성은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동성동명의 다른 일본 여성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 야마나시(山梨)현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장인 사토 노부코(佐藤信子) 씨가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를 통해 부강면 곽창록(82, 부강향토사 연구위원) 씨에게 관련 내용을 우편으로 보내오면서 확인됐다. 앞서 는 지난해 8월 광복절 특집기사(8월 12일자)로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바 있고, 같은 해 10월 19일자에서는 그녀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金子敬·외가쪽 친조카
청주목에서 체포돼 생을 마감한 이금(伊金)에 대한 내용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비교적 간단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고려에서는 매향(埋香)이라는 매우 독특한 풍습이 등장한다. 매향은 글자 그대로 땅속에 향나무를 묻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땅은 민중들은 미륵이 메시아로 강림할 것에 대비해 그에게 향을 바치기 위해 미리 향나무를 준비하였다. 그같은 행위는 집단적으로 이뤄졌고, 그들은 비나리 행사 후 그 사실을 바위에 기록하였다. 현재 전국적으로 △전남 영광군 법성면 입암리 △전남 신안군 암태면 송곡리 △강원도 고성 삼일포 △충남 예산군 봉산면 효교리 △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 △평안북도 정주시 침향리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사진) 등에 매향비가 존재하고 있거나, 탁본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 매향비는 지리적으로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내륙이 아닌 바닷가나 그 인근에 비가 세워졌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이금과 관련된 기록에서 그 단서를 만날 수 있다. '또 이르기를, "내가 산천(山川)의 신(神)을 신칙하여 보내면 왜적(倭賊)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무격(巫覡 무당 )이 더
[충북일보] 세종대왕의 초수리〔초정약수〕 행궁은 《세종실록》 등 사료를 정밀 검토한 결과, 기와집이 아닌 초가(草家)로 지어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세종대왕 행궁을 기와집〔瓦家)로 지으려는 청주시의 계획은 보다 정밀한 검토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는 오는 2018년까지 국비 등 1백20억원을 투입, 행궁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내수읍 초정리 18-3 일대에 세종대왕 행궁을 재현키로 하고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시는 당초 불에 타 사라진 세종대왕 초정약수 행궁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사료가 충분치 않아 온양행궁 등 다른 지역 행궁을 참고해 재현키로 했다. 따라서 완공될 초정약수 행궁은 조감도에서 보듯 기와집으로 재현될 계획이다. 그러나 필자(충북대 초빙객원교수)가 포함된 충북일보가 《세종실록》 등 조선시대 문헌 사료를 정밀 검토한 결과, 1444년 3월 세종대왕 거둥〔행차〕 때 건립된 초수리 행궁은 초가였음이 확실시되고 있다. 《세종실록》 126권의 세종 31년(1449) 12월 3일(기유) 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고, 괄호 안은 원문이다. "온양(溫陽)과 초수 행궁(椒水行宮)에서도 너무 지나쳤으나, 모두 이
[충북일보] 불교의 믿음은 상생(上生) 신앙과 하생(下生) 신앙으로 구분된다. 죽었을 때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상생신앙이다. 반면 메시아가 강림해 내가 살고 있는 땅을 극락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생신앙이다. 지난날 석가모니는 제자 미륵에게 장차 성불을 해, 사바세계(현재의 땅)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것을 수기(授記)하였다. 수기는 부처가 수행자에게 미래의 깨달음에 대하여 미리 지시하는 예언이나 약속을 일컫는다. 불교 경전의 하나인 《미륵삼부경》에 따르면 현재 미륵은 성불을 한 후 도솔천에서 하생 시기를 기다리며 선정에 들어 있다. 이것을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 그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이 땅의 '가짜 지도자들'은 현재의 삶에 지친 백성을 현혹하기 위해 미륵의 강림사상을 자주 교묘히 이용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그러했고, 《정감록》에 등장하는 진인(眞人)도 미륵의 메시아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11년 평안도에서 난을 일으킨 홍경래가 내세운 메시아도 정진인(鄭眞人)이었다. 미륵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시간적으로 공통점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高隱里)의 지명 '고은'은 의외로 '굽은 터'라는 뜻에서 출발하였다." 충북대 김진식(국어교육과) 교수가 얼마전 한국중원언어학회가 발행하는 《언어학연구》 제 33집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김 교수는 지난 2010년부터 청주지역 각 읍·면의 법정리를 대상으로 한역(漢譯) 지명을 고찰해 오고 있고, 따라서 이번 논문에 시리즈를 의미하는 Ⅳ자가 붙었다. 논문에 의하면 고유어로 된 자연 지명이 한역화 할 때는 소리를 빌리는 음독과 뜻을 차용하는 훈독 표기 방법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이번 논문의 고찰 대상이 된 청주시 남일면 문주리(文注里)·두산리(斗山里)·고은리·화당리(花塘里)와 남이면 외천리(外川里)·비룡리(飛龍里)·석실리(石室里)·가좌리(佳佐里)·가마리(駕馬里) 등도 같은 사례에 해당하고 있다. 남일면 '문주리'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에 따라 '문대동'과 '주동'의 일부가 병합돼 생겨난 지명으로, '문대'는 마을 뒤 文筆峰(문필봉·431m)에서 비롯됐다. 주동은 《조선지지자료》(1911)에 '두쥬골'로 기록돼 있고, 이때의 '두쥬'는 곡식을 저장하는 '뒤주'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동'은 뒤주 모양으
[충북일보] 지난 2013년 부모산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발견된 성돌의 명문은 부호가 아닌 문자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리고 그 뜻은 '일은 맡은 사람 간공 빙간이 완성하다'라는 해석도 함께 제시되었다. 충북대 사학과 김영관 교수는 얼마전 《신라사학보》 제 30집에 기고한 〈청주 부모산성 출토 성돌 명문에 대한 시론적 고찰>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부모산성은 청주 흥덕구 비하동 일대에 위치하는 산성으로, 그동안 2004년·2005년·2006년·2012년·2013년 등 5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이번 논문의 대상이 된 명문 성돌은 2013년 부모산성 서문터에서 수습된 것으로, 무게 19.4㎏·가로 32㎝·세로 15㎝·두께 23.5㎝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성돌의 석질은 규암(硅岩) 계열의 자연석으로, 인근 미호천이나 석남천에서 옮겨왔을 것으로 추론됐다. 논문에 의하면 성돌의 표면에는 부호가 아닌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8자의 한문 글자가 존재하고 있고, 김교수는 이를 '手成人'과 '干△□干十' 자로 판독하였다. 표기가 안 돼 기호로 표기한 '△'는 '工'과 '三' 자가 합쳐진 모양으로 《강희자전》에 의하면 工의 고자
선조들은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치로 산세는 물[강]에 이르러 그 흐름을 멈추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은 산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 같은 현상은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연이어 흐르기 때문에 비롯된다. 모든 강은 수계가 같으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같은 수계(水系)라 해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이 같은 '부분칭'은 교통 미발달로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좁았고, 따라서 산 넘어 저 먼 곳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비롯됐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군량미를 운반하는 것과 관련하여 《선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충청도 금강(錦江) 일대의 물이 위로는 형강(荊江)과 연결이 되고 아래로는 바다에 닿아 있어 조운할 수가 있는데, 물이 많을 때면 형강 이상까지 올라갈 수 있고 물이 얕더라도 연기(燕岐)까지는 댈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경상도 초입인 금산 지방까지는 수삼일 일정에 불과하고 길도 그리 험준하지는 않아, 조령에 비하면 자못 편리하고 가깝습니다.'- 인용문의 형강은 많이 듣던 강이름이 아니다. 연기 상류에 위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위치는
조선 영조 9년(1753) 단양 읍내에 우화교(羽化橋)라는 다리를 세운 인물은 당시 군수 이기중(李箕重·1697~1761)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영조 10년 다리 건립을 기념해 우화교 신사비(新事碑)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우화교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그만큼 컸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당시 우화교는 죽령과 한양을 잇는 도로, 즉 봉화대로에 위치하면서 경상도 북부 사람들에게 상경과 귀향에 따른 교통 편의를 제공했다. 현재 우화교 비문의 일부에는 '圻湖之客循竹嶺而左者 必由是達焉 然登橋而望 林峀幽O O沙脩潔 如入天台武陵之路 故好事者名之曰羽化'(기호지객순죽령이좌자 필유시달언 연등교이망 임굴유O O사수계 여입천태모릉지로 고호사자명지왈우화) 명문이 보인다. 대략 '기호의 나그네가 죽령을 넘으려면 이곳(우화교 지칭)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다리에 올라 바라보면 산림은 그윽하고 개울 모래는 깨끗하니 마치 천태 무릉도원에 이르는 길과 같다. 호사가들은 이 다리의 이름을 우화라고 부른다' 정도가 된다. 우화교 신사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는 115㎝ 정도이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옛 군청 자리로 옮겼다가 1990년 하방리에 수몰이주기
[충북일보] 충북도 산하의 매장문화재 전문발굴 법인인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준식·사진)이 올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도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005년 7월 6일 창립총회와 더불어 정관을 확정, 재단법인으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청주시 흥덕구 송정동에 위치한 도문화재연구원은 이 기간 동안 발굴과 개발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는 등 쉽지 않은 사회적 공익 기능을 추구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 원장으로부터 그 동안의 성과와 연구원의 미래 방향 그리고 지역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 등을 들어봤다. - 흔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도문화재연구원은 이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발굴 성과를 거뒀나. "발굴조사는 크게 토목·건축공사 전에 하는 구제발굴과 순수 학문 목적인 학술 발굴조사로 나눠진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10년 동안 1백70여건의 구제발굴, 10여건의 학술발굴 조사 등을 수행하였다. 인력 규모에 비해 매우 많은 조사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 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발굴조사 성과를 꼽으라면. "보은 삼년산성, 옥산 백제토기가마, 청주 테크노폴리스 예정부지 발굴활동이 기억에 남는다. 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청주
[충북일보] 2016년은 병신년(丙申年)으로 십이지의 띠로 치면 원숭이의 해, 그중에도 붉은 원숭이〔赤猿〕의 해이다. 원숭이는 국내 서식하고 있는 동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숭이는 전통시대 일본과 중국 등으로부터 이런저런 역사적인 이유로 국내에 많이 유입, 비교적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새해를 맞아 △병신년이 붉은 원숭이로 호칭되는 이유 △원숭이의 어원 △원숭이 이칭인 잔나비 △역사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원숭이 △조선 역대임금이 원숭이를 싫어한 이유 △원숭이 전통 조각상의 공통점 △원숭이와 관련된 고사성어 등 '원숭이 인문학'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 병신년이 '붉은 원숭이의 해'인 이유 병신년의 병(丙)은 천간(天干), 신(申)은 지지(地支)에 해당한다. 천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고, 지지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이다. 이 가운데 후자 '신'에서 열두띠 동물중 원숭이가 나왔다. 그러면서 붉은 원숭이가 된 것은 천간의 '병'과 관련이 있다. 10개의 천간은 다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등으로 묶음이 되고, 이는 오행(五行) 목·화·토·금·수에 일대일 대응된다. 이때의 오행은 목은 靑,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과 돌계단. 그 계단을 오르면 손오공 이미지를 지닌 돌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계단 면석에 돋을새김(양각)을 한 화문(花紋), 즉 꽃문양을 만날 수 있다. 전통건축에서 시선과 수평되게 볼 수 있는 석부재는 면석(面石), 반면 시선을 아래로 향해야 볼 수 있는 면은 갑석(甲石)이라고 한다. 사람은 직립하는 까닭에 거북의 등을 보려면 시선을 아래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갑석이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따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법주사 대웅보전 계단면석의 문양을 연꽃으로 여기고 있다. 법주사 종무소 관계자도 전화통화에서 "지금까지 연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꽃문양을 연꽃으로 보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다. 연꽃은 꽃잎이 겹을 이루면서 수직으로 핀다. 국보 제 64호인 법주사 석연지의 연화문도 그런 문양으로 돋을새김을 하였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이 꽃문양을 법주사 창건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길상초(吉祥草)로 보고 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길상초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연한 자주색의 꽃을 10cm 정도의 꽃대 위에 피운다. 고대 불교경전
[충북일보] 2016년이 병신년(丙申年)인 가운데 충북도내에는 원숭이와 관련 지명이 보은군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원숭이는 국내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어서 '왜 그럴까'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은 매년 연말을 맞으면 새해 십이지[띠]와 관련된 전국의 지명 통계를 발표해왔다. 그러나 내년의 경우 국내 생존하지 않았던 원숭이의 해가 되면서 이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는 원숭이 관련 지명이 국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도내에서 원숭이의 접두어인 '원'에 해당하는 지명은 △遠형 △院형 △元형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遠형 지명은 단양 대강 당동리의 원평(遠坪·순우리말 지명은 먼들), 괴산 청천면 덕평리의 원운(遠雲·〃멀운이), 단양 영춘면 남천리의 원곡(遠谷·〃멀곡) 등이 있다. 院형의 지명으로는 영동 황간면의 원촌리(院村里), 옥천 이원면의 원동리(院洞里), 보은 마로면의 원터(院터) 지명이 있다. 이 가운데 원터는 조선시대 왕래원(王來院)이라는 원이 있던 곳이다. 元형 지명으로는 청주시 문의면 도원리의 '원장발'과 같은 면 두모리의 '원두모'가 있다. 원장발은 장발 마을
현재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수몰기념관 경내에는 도유형문화재 제 80호인 '우화교 신사비(羽化橋 新事碑)'가 위치한다. 독특한 이름의 이 비는 '우화교를 새롭게 놓고 세운 비'라는 뜻을 지닌다. 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 115m의 크기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이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량이었다. 그런 우화교의 '우화'는 설화에 의하면 다리를 건널 때 날개가 돋아난다, 즉 선인(仙人)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충주댐이 수몰되기 전의 일대는 주변 숲과 단양천이 어울어지면서 마치 선경(仙景)의 모습을 연출했다. 이때 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마치 날개가 달린 선인같다고 해서 우화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우화교는 조선시대 언제인가 대홍수로 인해 파괴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 우화교가 그려져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구한말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화교 곁에 있었던 우화교 신사비는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지난 1985 옛 군청 자리인 단성면 상방리 97번지로 옮겨졌다. 이후 다시 수몰기념관 경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때 우화교를 세운 인물은 당시 단양군
경사면을 활용해 축조한 새로운 유형의 고인돌[지석묘]이 우리나라 고고학상 처음으로 충북 제천에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이 고인돌 땅속에서는 불에 탄 돌도 출토되는 등 호기심을 유발하는 다양한 문화 흔적들이 발굴됐다. 세종대 하문식 교수는 지난해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평동마을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최근 〈고인돌의 성격에 대한 한 예>(고조선단군학 제 32호)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평동마을 민가 마당에 위치하고 있는 이번 고인돌은 △긴 네모꼴 △380x50~140x105㎝ 크기 △흑운모 화강암 성분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고인돌의 방향은 백운산 산줄기와 제천 샛강인 원서천과 같은 서-동 방향으로, 당시 축조인들이 방위를 의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고인들은 그 동안 국내 학계가 분류해오던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축조 방식이어서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한반도 고인돌은 크게 땅 위에 노출된 덮개돌, 지하 부분, 그리고 덮개돌을 괴는 굄돌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탁자식은 굄돌이 높은 양식으로, 전문가들 사이에 속칭 '롱다리 고인돌'로 불
- 1년 동안 계속된 연재가 지난주에 끝났다. 마치 대하소설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이번 시리즈를 기획한 의도는 무엇인가. "올해는 국가적으로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의 뜻 깊은 해이다. 그 역사적 의미를 반추하고 현대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방안으로 충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에서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 건국훈장 독립장 이상 수여자 43분을 조명하기로 한 것이다." - 다른 지역과 비교한 충북 의병활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올해는 제천의병 1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 등에 대항하여 전기의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령부 역할을 제천이 하였던 것이다. 제천을 중심으로 한 충북의 의병은 중기와 후기의병사에서도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며 전국의 의병항쟁을 선도하였다." - 역사적 흐름을 보면 의병활동을 이어받은 것이 독립운동이다. 역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충북 독립운동의 특징은. "사실 충북의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소재나 자산이 다른 지역보다 많거나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전개된 다양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충북 출신 인물이 많다는 것은 자부할 만하다." - 개인
'꽃은 5∼8월에 검은 홍자색으로 피는데, 잎겨드랑이에서 자란 긴 꽃자루 끝에 위를 보고 1개씩 달린다. 열매는 달걀 모양이며 꽃받침과 암술대가 남아 있다. 종자는 물 속에서 익는다. 우무 같은 점질로 싸인 어린 순을 식용한다. 어린 잎은 지혈·건위·이뇨에 약용한다.' 제천 의림지의 명물인 순채(蓴菜)에 대한 식물학적인 설명이다. 제천 순채는 문헌상 조선 전기부터 등장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제천의 토산(土産)으로 신감초(辛甘草)·순채·홍화(紅花) 등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 지리지는 순채와 제천 의림지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의림지와의 관련성은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순채[蓴] 의림지(義林池)에서 난다"라고 표현, 그 출처를 분명히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제천 의림지 순채는 조선 문인들의 단골 시주제가 됐다.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농암집》을 지은 김창협(金昌協·1651∼1708)이 있다. 그는 '자익과 함께 의림지에서 시를 짓다'라는 시에서 제천과 의림지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넓디넓은 푸른 못 그리 아니 맑은데 / 교룡이며 어류들 생명 부쳐 살아가네 /
고려 성종 때의 제천 별호(別號·특별 명칭)인 '의천(義川)'과 전통시대 축조된 의림지(義林池)는 '의' 자를 어두에 공유하고 있다. 이는 두 지명이 상관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은 이와 관련하여 "의림지의 본래 지명은 '임지(林池)'였는데 여기에 '의(義)' 자가 붙어 의림지가 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전은 이때의 '의' 자를 성종 때의 별호인 '의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연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이 설을 따른다면 제천 의림지의 본래 이름은 '임지'였으나, 별호 '의천'이 생겨난 후 지금의 이름인 '의림지'를 갖게 된 것이 된다. 의림지의 작명 시기가 곧 축조 연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의림지의 역사성은 그만큼 짧아지게 된다. 조선 세종~성종 연간의 인물로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 있다. 그는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란 때 한명회의 살생부대로 철퇴를 휘두른 인물로 우리고장 보은 회인 출신이다. 그가 경연(經筵)에 나가 성종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조선시대 경연은 임금과 대신이 국정의 현안과 유교 경전에 대해 이야기는 나누는 정학(政學) 토론의 공간이었다. 성종: "연안(延安)의 남대
[충북일보] 국보 제205호인 충주고구려비는 당시 국원성〔충주〕 주민들의 신라 망명 예방이 주된 목적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기존 학설중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충주고구려비=회맹비(會盟碑)' 설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다. 회맹비는 양국이 상호 합의한 정치·외교적인 내용을 새긴 비를 일컫고 있고, '회맹'은 '만나서 약속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국대 김병곤 교수는 얼마전 논문을 《지역과 역사》 제 36호를 통해 발표하였다. 지금까지 충주고구려비의 건립 성격에 대해서는 △당시 고구려왕의 치적을 적은 공적비 △국토를 개척하고 세운 척경비 혹은 순행비 △신라와 형제 관계를 맺고 세운 회맹비 등의 주장이 존재해 왔고, 이중 세번째 설이 폭넓게 수용돼 왔다. 건립 연대는 대략 5세기 초반~6세기 초반설이 제기돼 있는 가운데 당시 고구려왕은 장수왕 혹은 그의 아들인 문자왕으로 추정돼 왔다. 이중 '충주고구려비=회맹비' 설의 근거가 된 것은 '世世爲願如兄如弟(세세위원여형여형)', 즉 '영원토록 형과 동생같이 지내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교수는 판독 가능한 충주고구려비 문장 가운데 '奴客(노객)', '敎(교)', '東夷寐錦(동이매금)'
[충북일보] 최욱영(崔旭榮, 1854~1919)은 제천 출신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구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였다. 이후 이강년 부대에 들어가 군사장으로 활동하다가, 이강년이 일제에 체포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였다. 1913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김재성과 함께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경북·충북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비밀결사 민단조합에도 참여함으로써, 의병항쟁이 1910년대 비밀결사로 계승되는 추이를 보여준다. ◇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키다 최욱영은 1854년 10월 7일 충북 제천군 제천면 고명리(현재, 충북 제천시 수산면 고명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송산(松山), 호는 청계(淸溪)이다. 그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하나, 자료의 부족으로 그의 가계와 어린 시절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향인 고명리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묘비에 짤막한 생애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성장하면서 일제에 의해 나라가 침략당하고 식민지화되어가는
[충북일보] 돌계단은 전통 건축에서 디딤돌, 계단면석, 소맷돌, 지대석 등으로 구성된다. 디딤돌은 발바닥이 닿는 면으로 한 칸 한 칸 디디고 올라가는 돌, 계단면석은 양측면을 막은 판석을 말한다. 그리고 지대석은 계단 맨아래 위치하는 돌로 땅과 접촉하고 있고, 소맷돌은 계단면석 위에 올려져 있는 양쪽의 돌난간을 말한다. 소맷돌은 40도 내외의 경사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이를 설치하지 않는 계단도 있다. 그러나 경사가 심하고 디딜돌의 수가 많을 경우 보행자 안전을 위하여 소맷돌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소맷돌 아래쪽 끝에는 법수(法首)로 불리는 기둥석이 세워지기도 하고 그 위에 귀면, 동물, 연꽃 등의 조각이 장식되는 사례가 많다. 충북 불교의 종가인 속리산 법주사를 찾으면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고, 여기에도 여느 대형 사찰 건물처럼 돌계단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대웅보전 돌계단을 무심코 오르다 보면 소맷돌 끝에서 원숭이 조각상과 마주친다. 원숭이는 동남아시아와 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포유동물로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따라서 법주사 경내에 불쑥 들어와 있는 원숭이 조각상은 묘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도신화에 '하누만'(Ha
[충북일보] 청주시의회의 후반기 원구성에 후보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결국 상임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의회 운영위원회는 지난 26일 국민의힘 김태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청주시의회 회의규칙 일부 개정안'을 심사한 뒤 부결시켰다. 당초 운영위 10명의 위원 중 5명이 이 개정안에 공동서명해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높았지만 최종적으로 진행한 표결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섰다. 결국 이 개정안은 상임위의 문 턱을 넘지 못했지만 본회의에서 재차 다뤄질 여지도 있다.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지방자치법 81조에 따라 재적 의원 3분의 1인 13명의 서명을 받아 본회의에 직접 안건을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개정안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해도 18명에 달해 가능성도 높다. 당초엔 19명이 공동 발의를 했지만 국민의힘 이상조 의원이 찬성표를 거둬들이면서 18명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다음달 2일 열리는 3차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이 다시 도마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의원이 제안한 후보등록제 방식은 후보등록과 정견발표, 본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의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