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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신팔균

김경천·이청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으로 호칭돼
대한제국 군대와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가교 역할
부인 임수명 남편숨진 사실 뒤늦게 알고 음독자결
'건국훈장 독립장'… 부인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

  • 웹출고시간2015.11.12 18:20:25
  • 최종수정2015.11.12 18:20:25

신팔균

[충북일보] 申八均(1882~1924)은 진천의 전통적인 무반 가문의 후예로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김경천·이청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 '군인계의 삼천'이라 칭해질 만큼 남만주 일대의 무장투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사, 특히 만주지역 무장투쟁사에서 상징적인 존재로서, 대한제국 군대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연계하는 가교적 인물이다.

◇ 진천 논실 전통 무반가문의 후예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한성부 판윤을 역임한 신석희(申奭熙)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동천(東川)이다. 그를 '삼천'의 한 사람으로 부른 것은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관원이력서·에는 거주지가 충북 진천군 이곡면(梨谷面) 노곡리(老谷里, 현재의 이월면 노원리)로 되어 있다.

신팔균생가(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그의 선대는 무관 벼슬을 하였던 사람들이 많다. 그의 고조부 홍주(鴻周)는 4형제인데, 무과에 급제하여 순조 대에 훈련대장을 지냈고 형 봉주(鳳周)와 응주(應周)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와 포도대장을 지냈다. 증조부 의직(義直)도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조부는 강화도조약 체결 대표였던 신헌(申櫶)인데, 18세에 무과에 급제한 이후 주요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신헌은 무반이었으나, 개혁적 관료 또는 초기 개화파 인사로서 국방문제의 전문가였다. 그는 문인 못지않은 경세가로서 글씨와 문장에 능통한 '유장(儒將)'으로 유명하였다.

신헌은 4남을 두었는데, 이 중 정희(正熙)·석희(奭熙)·낙희(樂熙)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정희는 형조판서·어영대장·통위관(統衛官) 등을 지냈는데, 그가 금위대장이 되었을 때 신헌과 함께 '부자 장신(將臣)'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석희는 신팔균의 부친으로서 한성부 판윤을 거쳐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을 역임하였다. 그의 동생 가균(可均)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 군인의 길에 나서다

신팔균의 무관학교 졸업증서(1903년)

1900년 10월 14일,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제2기생으로서 1903년 9월 20일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육군무관학교는 졸업 전에 임관부터 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었는데, 그는 재학 중인 1902년 7월 6일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25일 시위대 제1연대 3대대에서 견습을 거쳐 1906년 7월 20일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1907년 3월 12일에는 6품으로 승진하였고, 4월 30일에는 부위로 승진하였으며 이날자로 진위(鎭衛) 보병 제7대대 부관에 보임되었다. 이어 8월 26일 근위(近衛) 보병대대 중대로 배속되었다.

그런데 이해 7월 31일 군대해산 조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장교는 해임되고 병졸들도 귀가조치 되었다. 군대해산 이후 군부 관제도 개편되어 대신과 차관 밑에 2국 8과를 두었으나, 733명의 근위대만 존치시키고 모두 해산시켰다. 해산 직전 병력이 약 9,500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사실상 완전 해산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는 군대해산에도 불구하고 곧 바로 해임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는 군대해산 이후 장충단 치취 ㎾행사에 접대위원에 위임한 훈령이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육군 부위 자격으로 인정전 오찬에 초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09년 7월 30일 보병 정위(正尉)로 승진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그가 군대해산 이후 최소한 2년간 부위로서 현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위로 승진까지 하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인 것이다.

신팔균과 동지들(앞줄 왼쪽에 앉은 사람이 신팔균)

그가 시위대와 근위대 등 요직에 근무하며 군대해산 이후에도 면직되지 않고 계속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의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군인 장교 경험은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할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1909년 8월 이후 진천으로 낙향한 그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에 매진하였다. 그는 동생 필균과 함께 노곡리 강당고개에 세운 보명학교(普明學校)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신민회 청년들이 신민회의 이념에 따라 국권회복을 모색하고자 조직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도 참여하였다.

◇ 망명과 독립운동 주도

그의 망명동기와 시기는 명백하지 않으나, 1914년 이전 망국에 비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서간도 활동으로 거론되는 것은 중광단 참여,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참여,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등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길림에서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망라하여 발표된 것인데, 39명의 명단에 신팔균은 없다. 또한 일부 기록에는 그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고 되어 있다. 당시 교관으로 활동한 이청천, 김경천과 함께 그를 '남만주 삼천'이라 지칭한 것으로 보아 신흥무관학교에 참여 개연성은 높다고 보인다.

그는 망명 이후 베이징과 서간도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베이징 거주시기, 그는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 등 여러 단체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1923년 개최된 국민대표대회 때에는 창조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북경군사통일회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실력양성노선을 비판하면서 무장단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중심기관을 설립하려는 창조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창조파로 구성된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23년 10월경 국민위원회가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에 합병될 때에는 군무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는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한인의 친교와 교육은 물론, 중국과의 협력 등을 모색하며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일제의 비밀보고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는 베이징과 서간도의 한인사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음은 틀림없다.

◇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초빙

신팔균 육군보병 부위 임명장(1907년)

대한통의부는 1920년대 서간도 일대의 통합 무장투쟁 조직으로서 한국독립운동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단체이다. 그런데 대한통의부는 1922년의 이른바 '서간도사변(西間島事變)'을 계기로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이 이탈하며 내분이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의용군이 분립하자 당시 군사부장이던 이천민(李天民, 일명 이세영)은 의용군을 출동시켜 의군부를 토벌하도록 하여 동족상잔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 때 우세한 무력을 지녔던 통의부 군은 의군부를 공파하여 전덕원(全德元) 등 간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지휘부는 내분과 무력 충돌 사태를 반성하고 수습책의 일환으로 전덕원을 방면하고 이천민을 군사부장에서 면직시켰다. 대한통의부 초기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이천민은 1924년 1월 북경으로 돌아갔다.

위기상황을 맞이한 대한통의부 지휘부는 1924년 1월 8일 개최된 중앙의회에서 위원장 제도로 개편하고, 신팔균에게 사람을 보내 위원장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대한통의부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대한통의부가 처한 당면 과제는 재정난을 타개하고 흐트러진 군대 기강을 바로 잡아 무위를 갖춰 항일투쟁의 역량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사위원장과 의용대 사령관으로 부임과 더불어 잔여 병력과 모병 인원으로써 의용대를 5개 중대로 재편하였다. 또한 각 중대별로 인원을 선별하여 사관양성소와 같은 '사관학원'을 개설하고 직접 훈련을 지휘하였다.

◇ '이도구사변'으로 순국하다

신팔균의 장충단 치취 접대위원 위임 훈령(1907년)

1924년 7월 2일, 그는 이른 아침부터 흥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부하들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경, 중국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대한통의부 군대는 이에 맞서 약 3시간 동안 응전하였으나 탄환의 부족으로 신팔균과 유창열이 전사하고 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교전으로 중국군도 8명이 사상하였는데, 이를 '흥경사변(興京事變)'·'이도구사변(二道溝事變)'이라 한다.

당시 중국 관헌은 종종 대한통의부에 금품을 요구하여 불응하면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는 경우가 있었다. 중국군의 독립군 공격은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금품과 무기 탈취가 목적이었다. 또한 마적과의 충돌로 인한 희생도 컸다. 일제의 마적 이용정책은 이미 훈춘사건(琿春事件)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 그를 습격한 중국군 부대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제는 대한통의부를 습격한 주체는 마적이었다가 중국군에 편입된 군대라고 보고하기도 하였다.

신팔균의 전사는 매우 충격적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대한통의부 본부는 이도구 왕청문을 떠나 흥단으로 피난하여 임시 사무소를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존립의 근간을 위협 당하였다. 그의 장례는 대한통의부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계의 큰 손실이기도 하였으나 가족사에서도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부인 임수명(任壽命)은 남편의 전사를 모르는 채 주변의 강권에 의해 귀국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안 그녀는 남편이 죽은 지 꼭 4개월이 지난 11월 2일 유복녀와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신팔균장군사적비(진천군 이월초등학교).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부인 임수명에게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박걸순(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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