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자연에 대한 모방이 주된 주제이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그 작용 속 시간, 꾸준히 반복되는 법칙을 발견하고 정리된 것이 미술품이고 만들어 가는 과정이 예술 행위다. 그렇기에 미술가는 보려는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 느낀 감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미술가는 자유롭지만 개인적이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별거 아닌 일에 집착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 이유가 본질을 보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주위를 돌아본다거나 넓게 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본 것을 더 깊게 보려는 방법에서 오는 불협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미술가는 제도적 틀에 맞지 않을 소지가 다분하므로 사회가 관용을 가지고 살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반듯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품행이 방정하다. 정사각형 틀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방정은 행동이 기본예절에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며 교장 선생님의 착한 어린이에게 칭찬하던 훈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그러나 미술가는 품행이 방자해야 한다. 틀을 벗어나야 틀을 더 크게 만들며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대상을 더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조의 방법이 자신의 관점에 맞추어져 있어서 좁게 보거나 멀찍이 보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자신의 관점이 누구에게 맞춘다거나 협의를 하려는 점은 부족하다. 미술가는 방정(方正)안에 가두기는 어렵다.
그렇게 멀찍이 서서 자연, 사회 등을 바라보는 미술가는 자신만의 예술 질서를 정리한다. 예술 질서는 자연의 이치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는 '계획적 인간의 간섭은 자연을 깨뜨린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가 모든 것을 간섭하고 환경 파괴를 자연 활용이라는 명칭과 부동산 안정을 위한 복지정책이라며 파괴할 때 사회는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으로 생각하도록 했다. 이것이 계획적 인간의 간섭이다.
미술가는 감각적인 자연 간섭을 꿈꾸는 주체이다. 감각적인 간섭으로 미술가는 자연을 관찰하고 구조를 파악한다. 사회에서 미술가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는 것에는 이런 간섭의 적극성이 없는 미술인의 모습 때문이겠지만 예술적 행위의 정당함은 관조적 간섭이 더 올바른 방법과 같다. 자연의 흐름과 움직임, 사람의 구성원리,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런 점을 예술품으로 정리하는 것이 미술가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미술가는 자신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주제라도 많이 다른 결과를 만든다.
자연은 언제나 예술의 영감을 준다. 그렇기에 지역은 지역 미술가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는 공기와도 같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 시켜주는 기초적인 호흡은 주위 공기로 하므로 내가 있는 곳을 반영한다. 충북에서 활동하며 뉴욕의 공기로 호흡하려는 것은 우주 밖에서 지구의 공기로 호흡하려는 것과 같은 이상한 방법이다. 유행이 그렇다고 누구에게 세련되어 보이게 하려고 관련 없는 방법 방식으로 자신을 치장하면 과장된 감각 간섭으로 자연을 깨뜨리는 간섭이 된다. 그렇기에 미술가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감각, 감성을 연구해야 한다.
본능대로 움직이며 자유를 외치던 아이는 성인이 된 후 자신 행동에 철이 없음을 알게 된다.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 나의 욕구 해결이 중요하다 믿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도 이런 상호 배려를 해야 한다. 미술가는 예술품으로 감각적 배려를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