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일어난 벌레는 일찍 먹이가 된다."
일상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어떠한 노력을 해도 본인 자체가 벌레라면 상위 포식자의 먹이가 될 뿐이다. 처한 현실극복을 위한 노력도 보다 큰 사회 구조 안에서는 극복이 불가능한 문제이다. 화려하게 치장된 자본 구조에 자본 약자는 나약 할 수밖에 없는 먹이 감이 된다. 그럼에도 사회는 언제나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 노력이 혹시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 통제적으로 우리에게 세뇌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스스로 느끼고 분별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의지 없이 표류하는 해파리와 같이 사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 것이었다. 국가라는 것 또한 선택이 아닌 의무를 수반한 무조건적 충성이 있어야 했다. 국가라는 단일 생명체를 위해 많은 부속 중 하나가 되어버린 자아는, 하나하나 아름다운 개체의 모습을 잊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는 일반인을 세뇌 시키는가?
사회에서는 개인의 존재가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믿게 만들고 이로 인하여 서로 간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견고하게 밀착시켜 새로운 사고를 갖거나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나와 다른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비판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그간 다른 것은 = 틀린 것이라는 공식으로 사회를 세뇌시켜왔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통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통치를 움직이게 하는 자본과 관계가 있다. 그로인해 보통사람은 보통생각과 보통의 삶을 살며 이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언론과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세뇌시킨다. 결국 지배층은 피지배층간에 서로를 견제 시키며 도덕이라는 족쇄를 서로에게 채워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피지배층간 세뇌를 통해 "우린서로 행복해요!"를 외치게 만들었다. '우리가 과연 행복할까?' 종교, 교육, 언론을 통해 누누이 우린 행복에 대해 세뇌되어 왔다. 사회적 평등은 내가 수행 가능한 위치에 머무는 것이 평등한 것이라고 세뇌되어 왔다. 이러한 사회적 평등의 원리를 위해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행복이라고 정의된다면 분명 안정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그 안정은 지배층을 위한 안정이고 피 지배층은 행복하다는 세뇌를 당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행복 개념은 나에서 찾는 것이 아닌 내가 바라보는 것에서 찾는다. 참 세련된 행복 법이다. '행복은 혼자 느끼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누려야 행복하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국가는 이러한 행복을 많은 사람에게 주기위해서 통제한다(?). 다수의 행복을 실현시킨다는 명분으로 국민에게 의무를 강요하며 보이지 않는 소수 지배층의 완벽한 행복을 실현 시킨다. 더 많은 행복추구를 위해 국가 간 약소국을 식민 국가로 만들어 냈으며 이것을 통한 행복은 지배 국가가 가져갔다. 이것을 우리 삶과 연결시키면 우리가 지금 어떠한 식민적인 지배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누가 행복할까를 생각하면 쉽게 자신의 위치를 생각할 것이다. 식민 지배를 받는 국민들도 스스로가 행복하다 느낀다. 그들에게 종교, 교육, 언론을 통하여 더 처절한, 더 힘든 약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이로 인하여 '난 행복하구나!'를 세뇌시킨다. 더 비참한 현실을 보고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느껴야 하는 행복한 국민이다.
초식 동물들처럼 우르르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 나름 생존의 원리라면 그 생존을 거부하고 무리에서 어떻게 벗어 날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무리에서 이탈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올바르게 볼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무엇인지 극복하는 것에 있다. 극복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