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은 총 길이 89km로 대곡천으로 불리기도 한다. 음성군 감우리 보현산에서 발원하여 연기군 남면 월산리, 동면 합강리인근의 금강과 합류된다. 강은 하나의 지류에서 모인 물이 아닌 다양한 지류와 하천의 물이모여 된다. 마이산 인근의 삼성면도 미호천의 지류를 형성하는 곳이고 도청리의 도청천, 소석리의 소석천, 성본리의 부윤천, 봉곡리의 한천 등 수많은 천들과 이름 없는 개울까지 다양한 물줄기가 모여 이루어진다. 수량이 많을수록 다양한 지류와 하천에서 물이 유입된 것이다. 저수지로 모여진 또 다른 물줄기까지 더한다면 미호천은 충청북도 서쪽의 모든 곡창지대를 감싸고 있는 생명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아온 발자취이다. 문화의 어원인 culture는 라틴어 경작하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자연을 채집이 아닌 인위적으로 배양하거나 인위성이 가미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역시 사회의 여러 가지 기술, 물질적 발전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물질적, 문화적 수준이 잘 가미가 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을 문명이라 한다. 문화나 문명은 만들어내는 사람들(인류)의 결과물이고, 생존하는데 적절한 환경이 되지 않으면 발전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좋은 경작이 가능한 땅일수록 수준 높은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다.
농업의 인구가 절대적이었던 과거는, 농업의 필수요소인 토질, 기후, 지형 등이 필요했다. 물은 토질, 지형과 더불어 농작물 생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과거 대다수의 농업은 자급자족의 형태로 발전해왔고 통치력이 강화되어도 농업은 자급자족과 조세의 수단의 기본이 되었다. 주식이 쌀인 한국의 경우 벼농사의 특성에 따라 치수(治水)는 농업의 가장중심이 되는 기술이었다. 그러므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강 주변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역 문화, 문명특성을 만든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미호천 중심으로 충청북도 서쪽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호천은 지역으로는 진천, 음성, 증평, 청주를 거쳐서 오송과 조치원, 세종에서 금강과 만나 합수된다. 미호천이 지나는 도시는 삼성면, 대소면, 이월면, 옥산면, 강내면, 오송읍, 조치원읍, 세종시로, 지류의 영향까지 한다면 충청북도 서쪽 대다수 도시와 연결되어있다. 강과 지류는 사람들의 생태환경의 유사성을 갖게 만들며 문화적 동질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화적 동질성은 미호평야 곡창지대를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쟁과 당시에 농사를 짓던 원주민들간의 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전설과 설화로도 전해지게 된다.
미호천인근의 가장 큰 도시는 청주인데 무심천인근 정북동토성과 연결된 기록이 있다. 정북동토성은 1744년 '상당산성고금사정기'의 기록에 보면 궁예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근거지로 삼다 견훤과의 싸움으로 패하여 상당산성을 빼앗기자 까치내 옆에 창고를 짓고 부세를 쌓아놓았다가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정북동토성이 이 시대 쌓은 토성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기록과 다른 정북동토성의 촌락 생성 설화도 있다. 총각장사가 미인장사 아랑을 짝사랑하였다. 둘 다 힘이 좋은 장사였고 힘내기를 하였다. 해가 지기 전 총각장사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상당산에 올라 연기를 피워 올리며 자신만한 바위 두 개를 옮겨야 하는 것이었고, 아랑은 집둘레에 토성을 쌓아야 했다. 둘 다 시간에 맞추어 일을 마치자 마음에 들은 그들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바위두개를 토성 문 앞에 세우고 그 토성 안에서 살았다. 그들이 잘산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강은 여러 물줄기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정북동토성 마을 설화처럼 화합하고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을 품어주는 여유 있는 문화라는 것이다. 정북동토성에 군량이 모였는지 힘 좋은 두 남녀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고 물줄기가 모이고 흘러가며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혼자 모든 것을 가지려는 욕심으로는 문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