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균이나 효모균이 식품을 먹을 수 있도록 부패를 시키면 발효라는 작용이 된다. 작은 생물 분해 활동으로 식품의 성분이 새롭게 합성되는 것으로 식품에는 이 작용으로 독특한 향과 맛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발효된 식품은 일반 식품보다 저장의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발효는 인간에게 유용할 때 발효라는 칭호를 준다. 발효는 알코올, 젖산, 아세트산 등으로 나뉜다. 알코올 발효는 산소가 없을 때 생기며 효모가 포도당을 분해하여 에탄올이 생긴다. 이런 에탄올식의 발효가 아닌 단백질의 분해되어 효소가 나타나는 것을 젓갈이라 한다.
젓갈은 근육이나 내장의 단백질이 분해되어 아미노산까지 분해되고, 독특한 향과 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문왕조에서 젓갈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신라 신문왕이 왕비 김씨를 맞이할 때 폐백 품목에는 다양한 기술이 되는 품목이 있다. 이중 젓갈이 들어있다고 하니 당시에도 중요한 기록적 폐백의 음식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계절이 강조된 환경에서 저장 음식은 주요한 생존의 기본 조건이었을 것이다. 남과 다른 위치와 환경이 되어야 하는 귀족의 생활에서 음식으로 일반인과 차이를 나누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 일이었다. 그만큼 음식은 하나의 집안의 품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교통의 발달이 어려운 환경에서 해안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계절을 거스를 수 있는 음식 섭취는 절대 특권 의식을 보여줄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주요 폐백 품목에 젓갈이 위치한 것은 신라 왕비 김씨의 품격을 기술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기록이 더욱 풍성하였기에 소금에 절인 것뿐만이 아니라 술이나 기름, 누룩, 산초 등에 절인 것까지 다양한 절임법이 등장한다. 여기에 더해 소금과 엿기름, 찹쌀밥 등을 섞어 만든 식혜도 등장한다. 조선보다 이전의 음식 방법을 기록한 것들로 보이는데 이런 기록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옮겼거나 당시 시대 일반적 음식 만드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왕래가 요즘과 같지는 않았더라도 귀한 음식을 만드는 방법은 집안의 품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격식이었다. 특히 보도 못 한 음식을 내놓는 것은 집안이 갖는 사회적 위치를 음식으로 은근슬쩍 나타내는 생색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젓갈은 지역 특산물을 염장하여 유통기간을 길게 하였다. 지역의 특산물 또한 계절별로 채취 시기가 달랐기에 지역과 계절에 따라 다양한 젓갈의 방법이 만들어졌다. 문헌을 보면 젓갈의 종류는 140종이 넘는다고 했다. 그 젓갈은 독자적으로 반찬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양념으로 사용되어 보다 다양한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기초 재료로써 이바지했다. 그래도 밥도둑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는 범법적인 이름으로 밥과 잘 어울리는 반찬이다. 특유의 짠맛은 다른 반찬을 필요로 하지 않아 밥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밥을 많이 먹게 된다. 포만감을 밥으로 채워야 하니 밥도둑이라는 말처럼 게눈 감추듯 밥이 사라진다. 보통 공깃밥 하나를 더 시켜 나누어 먹다 다시 하나를 시키고야 마는 아쉬운 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짠 기로 인해 당겨지는 흰쌀밥의 유혹이라 하겠다.
젓갈은 해안가에서 유명했다. 당연히 소금과 관련 있으며 상하기 쉬운 어류로 인해 자연히 유리한 환경인 해안가에서 발전되었지만, 대도시에서 추억의 음식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유통이 쉽고 보관이 쉬웠던 음식 자체의 완성도 있는 유통기간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젓갈의 사랑이 유독 한국의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까나리젓이나 멸치젓처럼 베트남 생선젓인 넉맘이나 필리핀 새우젓인 바곤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다른 나라도 충분히 젓갈을 음식의 재료로써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더 시대를 거슬러 가면 고대 로마에서도 젓갈을 먹었다. 가룸(Garum)은 향신료를 깐 항아리에 기름 많은 생선과 소금으로 20일 동안 막대로 휘저어가며 숙성시켜, 위에 뜬 액젓을 떠서 만들었다.
젓갈은 생존을 위한 음식보다는 풍미를 위한 음식의 발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처음엔 먹기 어렵지만 여러 이유로 먹기 좋았으니 여러 지역 여러 곳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