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7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세금을 많이 걷어 국가의 재정을 좋게 하려는 꼼수를 부리다가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이 반란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그림으로 잘 표현 한 명화가 있다. 'La liberte guidant le peuple'이라는 작품인데 외질 들라크루아가 1830년에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어릴 적 인문학적 학습을 많이 하였던 화가 들라크루아는 연극, 문학, 역사 등을 서술하는 작품을 많이 하였다. 그의 화풍을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로 분류하는데 낭만주의는 고대의 것을 답습하는 형태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 하였다. 주제에서도 과거의 격식을 파괴하였고 표현에서도 새로움을 주장했다. 이러한 미술의 양식 변화는 새로운 해석적 시각을 제시하였고 문학과, 음악에서도 당시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어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근간을 제시하였다. 루소는 낭만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고 감정은 이성보다 앞서서 존재한다.' 이 말과 같이 새로운 것을 해석하는 권리가 창작자에게 부여하는 시대가 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찬사처럼 프랑스 혁명과 들라크루아의 표현에는 공통점이 있다.
들라크루아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당시 사교계를 통해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했다. 그의 작품을 본 시인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를 그렇게 옹호하게 만든 것은 인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와 영국 여행을 통해 세익스피어 및 괴테의 연극 및 다양한 문화를 보았으며 이 영향이 평생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그림을 멋지게 그려 놓는 것을 넘어서는 인문학적 스토리를 그림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노력 끝에 나온 작품이 1830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집권과 몰락, 왕정이 다시 복고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1830년 파리에서 혁명당원들이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를 폐위시키고, 오를레앙 공작이 루이 필리프로 즉위한 해였다. 이 작품은 루이 필리프가 즉위한 계기가 된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여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혁명 정신의 상징으로 불리며 1831년 살롱 전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라는 편지를 형 앙리에게 보냈다. (외젠 들라크루아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이 그림은 전사자들을 밟고 서 있는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보인다.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일종의 현실적인 모습이기 보다는 상징적 모습이다. 한손엔 깃발을 들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엔 총을 든 모습을 보아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상징의 모습이다. 이 깃발은 프랑스 국기이며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 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유의 상징인 이 여성의 이름을 '마리안느'라고 부른다. 이 여성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전쟁 통에 동생을 잃은 여성이 전쟁에 참가하여 민중과 함께 전투했는데 그녀의 이름을 몰라 당시 흔한 이름인 마리안느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녀는 용감했고 용감히 싸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많은 전투원들이 힘을 얻고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처럼 대중을 이끌기 위해서는 선동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 내용을 여성과 깃발로 나타나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회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한다. 변화가 필요 없는 세상을 원한다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다 하면 되겠지만, 내일이 어제와 오늘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어린아이에게 너의 미래를 개척하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충북의 문화예술계도 그들의 힘으로 긍정적인 제시와 추진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끌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