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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신건식

형 신규식 따라 상하이 망명 의약 전문학교 졸업
망명후 정보·군자금 모집위해 국내 역으로 밀파
미행하던 日경찰에 신의주서 체포 '청주'로 압송
고향 가덕서 영면하다 2004년 현충원으로 이장

  • 웹출고시간2015.07.05 15:17:06
  • 최종수정2015.07.05 21:25:30

신건식

[충북일보] 신건식(申健植, 1889~1963)은 청주 가덕출신으로 형인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동제사, 대동보국단 등의 단체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특히 그는 1923년 중국군 중교(中校)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된 이후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에, 1943년에는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제뿐 아니라, 그의 딸과 사위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가족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하다.

고령 신씨 가문에서 태어나다

신건식은 1889년 2월 13일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2길 4-24)에서 신용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고려시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신성용을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 초기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에 청주로 낙향하여 문중촌을 형성했는데, 지리적으로는 상당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일명 산동(山東)신씨라고도 일컬었다. 그들은 남인 계열로 영조 대 무신란 이후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고종이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에 의한 과감한 인재등용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신규식·신건식 생가

이러한 상황을 적극 활용해 중앙에 출사한 문중인사들은 개화에 빨리 눈을 뜨게 되면서 문중으로 신문화를 확산시켰다. 이들의 변화에 따라 산동 문중의 유능한 청년들이 신학문 수학과 중앙정계에 대한 진출을 꿈꾸며 속속 상경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규식, 신채호, 신흥우 등이었는데, 특히 그의 둘째 형 신규식이 중심이 되어 고향에 문동학원, 덕남사숙, 산동학당 등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1908년에는 문중 내 근대교육을 지향하는 영천학계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건식도 YMCA에서 운영하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근대적인 사고를 갖춘 개화인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형 신규식은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 임시정부가 둥지를 틀 수 있도록 만들고 초기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며, 동생 신동식도 향리에 남아 임시정부 충청북도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산동신씨 문중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만 해도 12명에 달하니, 가히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시작하다

그는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1912년 4월 저장성 항저우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형이 주도하던 동제사와 대동보국단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신규식을 비롯해 일찍이 상하이로 진출하여 근거지를 확보한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홍명희, 조소앙, 문일평, 조성환 등이 민족운동을 위해 1912년 결성한 단체이다. 동제사는 최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회원을 보유했을 정도로 상하이지역 독립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는 '동주공제(同丹共濟)' 즉, 한마음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뜻으로 표면적으로는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이 그 진정한 목표였다.

동제사는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중국내 각 지역과 구미, 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포 청년들의 교육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로부터 망명해 오는 청년들에게 강습소를 마련하여 중국어를 가르쳤으며, 중국이나 구미지역 학교에 유학을 주선하였다. 하지만 언어 문제로 인해 이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게 되자, 1913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였다.

신건식은 박달학원에 참여하여 청년 교육에 앞장섰다. 박달학원은 독립운동의 중추가 될 젊은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졸업생들은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915년 신규식과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동보국단에서도 활동하였다.

대동보국단은 완전평등의 이상 세계를 이룩하려는 동양의 전통적 사상인 대동사상과 박은식이 창건한 대동교가 기본이념이 되어 결성된 단체로 알려져 있다. 신건식이 대동보국단에서 활동한 것은 대종교를 신봉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대종교 총본사가 국내에서 만주와 간도로 이전하게 되자 상하이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규식, 조완구, 박찬익 등과 대종교 교회를 세우고, 단군이 지상에 내려온 지 216년 만에 하늘로 올라간 일을 기념하는 날인 어천절(御天節, 3월 15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당시 대종교와 관련된 행사는 민족정신 보존, 항일운동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하이에서 형 신규식과 같이 한 그의 활동은 향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기라 할 수 있다.

중국군 장교에서 임시정부 요인으로

신건식 체포기사(동아일보 1921.12.31)

신건식은 1921년 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국내로 밀파되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그 뒤 상하이로 돌아가다가 신의주에서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낸 병보석이 허가되자, 경성에 머물며 동지들과 상하이로 탈출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망명 도중 다시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청주로 압송되었다. 1년 후 석방된 그는 3개월간 치료 후 마침내 1922년 다시 망명하는 데 성공하여 그 해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23년, 중국군 중교(중령)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자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더욱 전력을 다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중국 대륙이 전화에 휩싸이자, 임시정부는 안정적인 근거지가 필요하였다. 신건식은 딸 신순호와 함께 배를 타고 우창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후난성 창사로 이동하였다. 1940년 충칭에 도착한 그는, 시내에서 30km 떨어진 투차오(土橋) 한인촌에서 부인과 딸 신순호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는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된 이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부족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고, 1943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특히 그해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에서 상임위원회 분과위원 제3과(재정예산결산)위원으로 활동했고, 1945년 열린 제38회 임시의정원에서도 상임위원회 제3과(예산결산)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에서 1944년 3월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과 항일 독립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딸과 사위가 독립운동의 맥을 잇다

박영준과 신순호 결혼증서(1943)

신건식의 독립운동 정신은 딸 신순호에게로 이어졌다. 신순호는 신건식의 외동딸로서 후일 독립운동가 박영석의 아내가 되었다. 박영석은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박찬익의 아들이다. 신순호는 박영준과 함께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이 두 사람은 1943년에 결혼하였다. 이들의 인연은 박영준이 17세 때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온 후 신순호의 집에 한동안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박찬익이 가족과 떨어져 투병 중일 때 신순호와 그녀의 어머니가 보살펴 줄 정도로 집안끼리도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여러 지역을 거쳐 1940년 충칭에 도착하였다. 8년여에 걸친 오랜 피난생활에서 벗어난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하면서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무장 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해 당시 임시정부의 만주 독립군 출신 군사간부들과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 청년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총사령부에는 여성대원들도 있었는데 신순호를 포함하여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민영주 등 6명이 광복군의 창설요원으로서 이 전례식에 참여하였다.

여성광복군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녀는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작전연구실에 배속되어 방송 원고를 작성하거나 충칭의 국제방송국에서 방송을 하는 선전 활동을 담당하였다.

신건식의 사위인 박영준 역시 부친 박찬익과 함께 부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박영준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 수하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5년에는 제3지대의 제1구대장 겸 훈련총대장을 역임하는 등 그는 항일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신건식 묘(서울국립현충원)

신건식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당초 고향인 가덕 인차리에 마련되었으나,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장용민(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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