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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신현규

괴산 문광출신… 유창순 권유로 광복회 가입
군자금 모집과정 강도죄로 피체 또 7년 옥살이
시신 가족품으로 못 돌아온 채 화장 돼
후손도 불명확해 훈장 국가보훈처서 보관 중

  • 웹출고시간2015.07.12 17:31:11
  • 최종수정2015.07.12 18:32:12

신현규 출생지인 충북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 전경

[충북일보] 신현규(申鉉圭, 1888~1928)는 괴산 출신으로 1910년대의 대표적 비밀결사인 광복회에 가입하였고, 이후에는 만주 무장투쟁 단체인 신민부에 참여하여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8년 일경에게 피체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 순국하였다. 신현규는 박상진이나 김좌진처럼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단체인 광복회와 신민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끝내 자결로 일제에 항거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이다. 올해는 광복회가 조직된 지 꼭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를 계기로 신현규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되새겨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 비밀결사 광복회에 가입하다

신현규(이명: 申陽春)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자료의 부재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유년기에 2년가량 한학을 공부했고, 20대까지는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910년대는 무단통치가 실시되던 때로, 일제는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은 철저히 지하화 하였고, 비밀결사 투쟁이 전개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비밀결사는 광복회였다. 광복회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설립된 풍기광복단과 1915년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한 국내 비밀조직이었다. 신현규는 광복회 충청도 지부원인 유창순의 권유로 광복회에 가입을 하였다. 광복회는 투쟁강령을 '무력준비, 무관양성, 군인양성, 무기구입, 기관설치, 무력전'으로 정하고, 일제와의 전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삼았다.

◇ 의협투쟁과 군자금 모금으로 일제에 붙잡히다

광복회는 결성 이후 전국에 지부를 두어 조직을 확대하였다. 설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회원 확보와 활동 거점 설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충청도, 경상도, 황해도, 전라도 등지에 지부가 결성되었고, 경북 영주의 대동상점을 비롯하여 곡물상으로 위장한 연락기관들이 세워졌다. 곡물상은 비교적 일제의 감시를 덜 받고 사람들의 출입과 자금 출납이 가능했기 때문에 회원들의 집회와 군자금 모집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신현규는 충청도지부에 참여하였다. 충청도지부는 대부분 충남 출신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충북 출신으로는 신현규를 비롯, 이희구(李喜求, 청주군 청주면 오근장), 신옥현(申玉鉉, 괴산군 칠성면), 정운기(鄭雲淇, 괴산군 문광면) 등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신현규의 동지인 정운기 공적비

ⓒ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갈읍리 224-1
이들 가운데에 신현규와 같은 마을 사람인 정운기의 활동은 특기할 만하다. 정운기는 1913년 채기중(蔡基中), 강순필(姜順弼) 등과 함께 풍기광복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14년 보은면장 박창빈(朴昌彬)에게 권총을 받아서 친일파를 처단하려던 김재성(金在性)에게 주었다. 그러나 거사 전에 김재성이 일경에 붙잡힘으로써 정운기도 공범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광복회에 가입하였으며, 1917년 군자금을 내지 않는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한 채기중, 강순필이 피신할 때 신현규와 함께 도왔다.

장승원 처단 활동에서도 보듯이 광복회의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일제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금은 주로 회원들의 기탁이나, 일본인 소유의 광산이나 현금을 실은 우편마차를 공격하는 등의 방법으로 마련하였다. 또한 전국의 부호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해 의연금을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이들이 군자금 모집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를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친일부호 처단을 전개하였다. 친일부호 처단은 원활한 군자금 모금뿐만 아니라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가하여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광복회는 처단 대상 제1호로 장승원을 지목하였다. 장승원은 영남의 부호이면서 친일행각을 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작인들에 대한 착취가 일본인 지주들 보다 심한 악질 지주였다. 1917년 9월 28일, 채기중과 강순필은 장승원의 집에 잠입하여 그의 머리와 목, 무릎을 명중시켜 처단하였다. 그리고 광복회에서 실행한 것을 알리는 글을 남기고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광복회는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채기중, 유창순 등 광복회 인사들은 일경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녔다. 1917년 11월 말, 유창순은 문경에 머무르고 있는 신현규에게 광복회의 목적과 장승원을 처단한 이유를 말하며, 광복회 가입을 권유하였다. 그는 흔쾌히 승낙하고 채기중과 강순필이 도피하는 것을 도왔으며, 채기중과 함께 경북 일대와 광주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그러다 채기중을 비롯한 광복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그도 피체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출소 후 다시 신민부에 참여 군자금 모금

신현규의 신민부 활동 보도기사

ⓒ 동아일보 1928년 8월 15일
1920년대에도 국내외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은 군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정은 인구세, 내외공채, 애국금으로 재정확보를 하려 했지만 징수 권한이 크지 않았고, 납부 방법도 자발적이었기 때문에 군자금 확보는 예상보다 어려웠다.

1920년 5월, 김중량(金仲亮) 등이 평북 의주의 바위굴을 근거지로 세운 보합단도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그들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정에 보내고 이를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이들은 폭탄을 제조하여 철산경찰서를 공격하거나 부호의 집에 가서 의연금을 요구하는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6년, 신현규는 출옥 후 밀양에 있는 윤창선의 집으로 갔다. 그는 윤창선으로부터 윤홍선, 손양윤 등과 함께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징수한 다음 만주에 있는 신민부의 김좌진에게 송금하여 독립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구체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들었다. 신현규는 곧 손양윤과 함께 신민부 국내 공작원으로 가입하였고, 군자금을 모집한 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신현규 유족사진

ⓒ 동아일보 1928년 8월 17일
이들이 가입한 신민부는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효과적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한 조직이었다. 1925년 3월 10일 길림성 영안현(寧安縣)에서 조직되었으며, 대한독립군단의 김좌진, 최호(崔灝), 박두희(朴斗熙) 등과 대한독립군정서의 김혁(金爀), 조성환(曺成煥) 등이 속해 있었다.

신민부는 창립 이후 지방 조직을 확장하는 한편, 약 500여 명의 부대를 편성해 김좌진의 통솔 하에 활동하였다. 그들은 항일전을 대비하여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또한 친일 단체를 습격하거나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보호하였고, 농촌계몽과 교육에도 적극적이어서 각 마을에 소학교와 강습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한편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하여 문맹퇴치와 항일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다. 또한 산업의 발전을 위해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을 설치하고 부업 장려를 권장하였다.

신현규는 효율적인 군자금 모금 활동을 위해 무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손양윤과 함께 1926년 6월 13일, 경북 칠곡의 일본인 부호 이쿠타 세이이치[幾田精一] 집에서 무기를 획득한 후, 군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현규는 1927년 4월, 신민부 중앙위원장 김좌진의 지령을 받은 이병묵(李丙默)이 국내에 잠입하자 손양윤, 손호, 손봉현, 윤창선과 더불어 대구 일원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들과 1927년 5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 이이창(李以昌)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이 밖에도 신현규는 1927년부터 1928년 7월 말 일경에 체포되기 전까지 약 2년 동안 7회에 걸쳐 활발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 자결로 일제에 항거하고 장엄한 최후를 맞다

신현규 자결 보도 기사

ⓒ 매일신보 1928년 8월 15일
신현규는 서모(徐某)의 밀고로 1928년 7월 말, 동지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방에 수감 중인 사람이 아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결을 결심하였다. 1928년 8월 10일 저녁, 신현규는 그 사람이 옷소매 안에 감춰둔 아편을 꺼내 먹고 이틀 뒤인 12일 새벽,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신현규의 자결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와 ≪중외일보≫는 물론 일제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도 연일 보도될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사건이었다. 유족들은 종로서에 가서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가진 돈이 없어서 시신을 인도받을 수조차 없었다. 그의 부인은 "누구든 우리 남편의 시신을 화장만이라도 해주오"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시신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화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신현규는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러나 후손을 찾을 수 없어 훈장이 전수되지 못한 채 국가보훈처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 김보미(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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