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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길 - 진천 보탑사

여름도 끝물, 가을볕 이글거리고 국화향 가득
풍경소리를 따라 묵언수행을 하다

  • 웹출고시간2013.08.25 15:47:03
  • 최종수정2013.08.25 15:47:19
ⓒ 강호생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벼꽃을 보고 자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벼도 나락을 맺기 위해 꽃을 피우는데 고단하고 바쁜 일상에 쫓기는 운명의 현대인들이 벼꽃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벼꽃은 거짓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오직 대자연의 흙과 노동을 벗 삼아 살고 있는 구릿빛 농부의 맑은 눈에나 보이는 순결한 꽃이다. 파릇파릇하고 통통하게 살이 찐 벼이삭 사이로 우담바라처럼 생긴 하얀 꽃이 보일듯 말듯 고운 자태를 뽐내는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말을 하지 말 것이다. 벼꽃이 피고 지고 난 뒤에야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가고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니 오직 농부만이 그 멋과 맛을 느끼고 즐길 자격이 있는 것이다.

오방색 중 황색을 으뜸이라고 하는 것도 대자연의 모든 시련과 고통을 견뎌낸 산고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빛을 다스리고 최고의 경지에 설 수 있는 것이니 속 좁고 약은 사람들이여, 뒷골목이나 배회하는 구린내 나는 사람들이여, 불경스러우니 황금들녘을 넘보지 말라. 천고마비의 가을이라며 들녘을 향한 눈길도 함부로 주지 말라. 흥분하지도 긴장하지도 말고 욕심도 미련도 갖지 마라. 오직 자신을 성스럽게 가꾸고 정진하며 노력하는 순정의 핏줄만이 즐길 수 있는 특혜이기 때문이다.

ⓒ 홍대기
옛날에는 우담바라의 신비를, 황금들녘의 풍요를 농부만이 아니라 시인과 지조 높은 선비들도 함께 보고 즐기며 가을하늘의 여유로움을 즐겼다. 농부는 농사짓는 일을, 시인은 좋은 글을, 선비는 마음의 양식과 학문의 곳간을 채우느라 봄과 여름을 보냈기 때문이다. 일과 노동의 시간 못지않게 휴식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진정한 휴식은 자연을 벗 삼고 그 속에서 새로운 엔트로핀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대자연이 벗이자 휴식의 원천이고, 소통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소스였으며, 영감을 얻고 창작하며 미래비전을 만드는 보물창고였다.

이와 함께 옛 시인과 지조 높은 선비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향기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고, 달빛마저 바람결에 나부낄 대 선비들은 매화나무가 있는 서재나 정자에 올라 앉아 서책을 들고 자연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고 매화향과 함께 감흥을 즐기곤 했다. 세종의 스승이자 조선의 대학자 변계량은 '춘정집'에서 매화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노래한 바 있다. 그 시대 선비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를 표시해 가면서 책을 읽을 정도로 집념이 대단했다. 또 독서하는 일이란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일이라 했다. 그래서 유성룡은 '서애집'에서 옥의 깨끗함과 연못의 맑음은 모두 사대부가 귀하게 여겨야 할 도리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선비들의 사랑방에는 격자 모양의 전통 책장과 벼루 먹 붓 같은 문방사우, 그리고 책을 읽을 때 필수품이었던 촛대나 필통 연적 도장 등 각종 문방구와 공예품들로 가득했다. 사랑방 풍경만으로도 그 집안의 가풍과 학문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으니 학벌을 중시하고 명문대만을 고집하는 우리네 습성도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 같다.

벼꽃이나 황금들녘도 아름답지만 사랑방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난초의 꽃과 꽃향기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지금이야 취미생활로 난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취미로 난을 키울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근의 야산에서 캐 온 것을 사금파리가 된 사기그릇에 심어 키우곤 했는데 황금색의 꽃, 온 몸을 녹이고 심란하게 하는 꽃향이 사랑방을 휘돌곤 했다.

최근 들어 차실과 서재를 낭만과 멋스러움의 공간으로 꾸미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생각과 음미의 시간, 홀로 외로움의 공간이 아니라 나눔과 정감이 흐르는 아지트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책상과 책꽂이도 개성미 넘치는 가구로 만들고 작품 한두 점은 기본으로 배치해야 한다. 소반을 이용한 찻상과 다기세트는 기본. 여기에다 다관 숙우 찻잔 퇴수기 차탁 다침 잔받침 거름망 차수건 화병 등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삶을 노래하는 곳, 가족이나 벗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미학,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서재요 차실이다.

여름의 끝자락, 진천들녘을 따라 달리다 보니 벼이삭이 제법 영글어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됐는데, 그래도 잘 버텨냈다. 칠월부터 벼꽃을 보고 싶어 몇 번이나 논두렁을 서성거렸는데 게으르고 불순한 방랑자에게는 허락지 않았다. 괜한 욕심을 접으니 옛 생각과 책 이야기에 젖는다. 꿈만 꾸지 말고 멋진 찻집이나 예쁜 서재 하나 만들어야겠다.

ⓒ 홍대기
진천의 보탑사는 천년 사찰이 아니지만 3가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 건축의 아름다움, 불자의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보련사 자락의 소나무 숲과 수백년 된 느티나무, 그리고 사찰로 들어가는 길목의 논과 밭과 호수와 숲은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의 때를 벗겨준다. 무겁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된다. 봄에는 꽃들이 노래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춤을 추며, 가을에는 단풍이 그림을 그리고, 겨울에는 설경으로 합장한다.

ⓒ 홍대기
그리고 황룡사 9층 목탑을 모델로 만든 3층 목탑은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함께 현존하는 3대 목탑이다. 높이가 42.71m로 국내 목탑 중 가장 높으며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전통의 방식만을 고집했다. 내부의 29개의 목탑기둥은 나그네의 시선을 압도한다. 계단을 타고 1층의 금당, 2층의 법보전, 3층의 미륵전을 오르는데, 한 발 한 발 마음의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가슴 떨리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불경스런 생각이 하나 둘 사라지고 맑고 향기로운 기운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 홍대기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내 마음에 와 닿는다. 갈 길 먼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사람의 마음은 이기와 아집과 욕망으로 꽉 찬 것 같지만 바람처럼 흔들리고 연약하기 이를데 없으니 모든 것을 비우라 한다. 머잖아 이곳에도 가을볕이 이글거리고 국화향이 가득할 것이다. 다시 오리라. 스님과 맑은 차 한잔을 앞에 놓고 묵언의 수행을 하리라. 욕망의 옷을 벗고 오달지게 살리라.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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