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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충주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네

  • 웹출고시간2013.09.29 18:42:36
  • 최종수정2013.09.29 18:42:17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 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맺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목계장터>
적요했다. 산과 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있는 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을 따름이다. 산새들의 날렵함도, 억겁의 강물 흐르는 소리도, 솔잎향 가득 머금은 동구 밖 바람도, 친구들의 새살새살 정겨운 이야기도 숨죽이고 있었다. 모든 게 정지된 시간, 적막한 풍경이었다. 오직 하나, 초가집이든 기와집이든 집집마다 굴뚝에서 뭉게구름 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날 뿐이다.

ⓒ 홍대기

이런 것을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표현하던가. 고요함 속의 부산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모두들 하루의 고단했지만 정겹던 일거리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사실, 시골에서 하루일과를 마무리하는 것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온종일 바깥일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못 다한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자 가족과의 연정을 나누는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해질녘 시골풍경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여인네들의 부엌살림이다. 현대인들의 모던키친에서 발견할 수 없는 멋스러움과 생활미학이 담겨있다. 부엌세간 하나에서 열까지 여인들의 애정과 감성, 손때가 묻어 있으니 보면 볼수록, 쓰면 쓸수록 멋스럽고 아름다울 뿐이다.

부엌살림의 왕자는 당연히 가마솥과 찬장이다. 무쇠로 만든 가마솥은 집집마다 여러 개 있었는데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일 때마다 사용하는 용도가 다르지만 솥으로 무엇이든 요리할 수 있다. 고슬고슬한 밥짓기, 구수한 누룽지와 숭늉 끓이기는 기본. 된장찌개, 김치찌개, 갈비찜 하기, 고구마 굽기, 깨 볶기, 튀김하기, 심지어는 솥뚜껑을 뒤집으면 달걀프라이와 파전 같은 별미도 요리할 수 있으니 부엌의 만능박사라 할 만하다. 누룽지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무쇠솥 밑바닥이 닳고 닳아 새끼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리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납으로 때워서 사용해야 했다.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 무쇠에서 나온 철분이 밥에 스며들어 철분함량이 높아지는데, 오래된 가마솥일수록 더 맛있고 고소하다. 그러니 어른들은 구멍 난 가마솥을 버리지 않고 애지중지 고쳐가며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홍대기
찬장은 그 집의 가풍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부엌살림이다. 부유한 집이나 뼈대 있는 집에서는 소목장이 만든 품격 높은 3단짜리 찬장을 즐겨 사용했다. 뼈대와 문틀은 못을 사용해 잇지 않고, 각각 모서리를 45도로 자르고 속을 파서 서로 짜 맞추어 견고함을 자랑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전복이나 조개껍질을 갈아 문양을 오려 붙이고 옻칠해서 완성하는 등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찬장을 열면 여인들이 귀하게 아껴 사용해 온 기물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어른들을 모실 때 사용하는 방짜유기, 제사지낼 때마다 쓰는 제기세트, 은은한 멋스러움을 자랑하는 백자접시 등 먼지 하나 없이 어여쁜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이따금 소년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은밀한 곳에는 어머니만 사용하거나 당신들만 알아야 하는 비밀스러움도 간직하고 있었다.

부엌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이 어디 이뿐인가. 흙을 빚어 재래식 자연유약을 바르고 불의 자궁인 가마에서 구워낸 옹기는 때깔이 곱고 두드리면 쇳소리가 났으며, 스스로 숨을 쉬어 나쁜 성분을 밖으로 밀어내어 맛을 고를 줄 아는 신비를 담고 있다. 곡물가루를 곱게 치거나 밭거나 거르는데 쓰는 체도 인상적이다. 가늘고 내구성이 좋은 말총으로 정밀하게 체불을 짠 뒤 체바퀴에 체불을 메워 만든 것인데 떡에 아름다운 무늬를 찍어 격을 높였던 떡살과 함께 조리대 위쪽에 걸려 있었다.

ⓒ 홍대기
석쇠와 됫박, 절구와 무쇠칼, 화로와 소반도 빼놓을 수 없는 부엌살림이었다. 지금이야 대량생산된 공산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 모든 것이 장인의 숨결로 만든 핸드메이드였다. 고기 생선 떡 등을 구워 먹을때 사용하는 석쇠는 철사나 구리를 그물처럼 얽어서 두 겹으로 만드는데 불에 타지 않고 앞뒤 모든 부위를 고루 익힐 수 있는 지혜의 산물이다. 나무로 만든 됫박은 곡식의 분량을 재는 그릇이다. 1말은 10되이고, 1되는 10홀이었는데 여인네들은 됫박으로 모든 물건을 재고 구분하며 물물교환까지 가능했다.

오래 두고 쓰면 쓸수록 더 아름답고 요긴한 게 있었으니 광주리 채반 소쿠리가 그것이다. 광주리는 깊이가 얕고 바닥이 평평하며 안정감 있어 논밭으로 새참 나를 때 즐겨 사용했다. 채반은 산적이나 전을 보관할 때 사용했는데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 있도록 나무살 사이로 바람이 솔솔 통하게 만들었으니 고슬고슬한 맛을 살리고 오래 보관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소쿠리는 속이 깊숙하고 촘촘하게 만들었기에 우연만한 곡식 낱알도 빠지지 않을뿐더러 결까지 고와 과일이나 채소를 담기에 제격이었다.

절구를 이용해 양념을 찧는 모습은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일종의 퍼포먼스다. 절구와 절구통이 그 무엇을 사이에 두고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게다가 그들의 아찔한 만남을 여인네들은 "어영차, 어영차" 콧노래를 부르며 두 손으로 올렸다 내려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노동이야말로 그 어떤 춤이나 농악놀이보다 흥겨웠다. 이따금 처녀 총각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그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로 충만함을 느끼곤 했다.

화로 주변에는 항상 온기 가득한 사람의 서정이 있다. 가래떡 굽는 손길 바쁘고, 된장 끓는 소리 이글거리고, 군밤 구어 먹는 아이들의 고사리 손과 콧물 질질 흘리는 철없던 아이들의 꿈이 익어가던 열락(悅樂)의 시간이다. 불쏘시개 뒤적이는 부지깽이가 타고 닳아 손에 잡힐 듯 말 듯 해야 입춘 지나고 꽃 피는 춘삼월이 오지 않았던가.

음식 그릇을 받치는 소반은 그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다. 해주반은 다리 부분에 투각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며, 나주반은 다리 중간을 가로질러 대를 끼운 것이 특징이고, 통영반은 운각 장식을 많이 한다. 다리 모양도 대나무 마디 모양(죽절형), 호랑이 다리 모양(호족형), 개 다리 모양(구족형) 등 가지각색이었는데 충청도 사람들은 개다리 밥상을 많이 사용했다.

ⓒ 홍대기
벽에 걸려있는 소반위에 석양의 햇살이 걸터앉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기도 했으니 시골은 어딜 가나 시인의 마을이다. 부엌은 여인들의 심장이며 자궁이다. 여인들의 파릇파릇한 마음이 담겨있고 시집살이의 가슴 아픈 사연이 묻어있으며 한 올 한 올 사랑과 꿈을 키워 나갔다.

충주땅을 휘감아 흐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은 목계강이었다. 그곳에 목계리가 있고 목계나루가 있다. 소태밤으로 유명한 소태면이라는 동네가 등장하는데 신경림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아직 문명의 때가 덜 묻었다. 돌담 사이로 보이는 시골 풍경, 오솔길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는 시골 마을, 남한강 지류마다 물안개를 품고 일어서는 가을낭만은 또 어떠한가.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시인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가을볕에 곡식들이 토닥거리며 알곡진 청춘을 뽐내는 모습을 품고 싶다. 훈훈한 시골 인심을 찾아나서는 여행, 아날로그 추억을 찾아나서는 여행을 하면 좋겠다. 길 위에서는 누구나 시인이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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