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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호수와 숲과 햇살을 품고 떠나는 아날로그의 여행

  • 웹출고시간2013.08.11 15:35:17
  • 최종수정2013.08.11 15:35:17
ⓒ 홍대기
어린 시절에는 오줌을 많이 쌌다. 몸이 약했던 것인지 알 수 없고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번번이 오줌을 쌌던 것만은 분명하다. 불장난을 하거나 불난 집에서 물동이를 들어 나르는 꿈을 꾸면 어김없이 이불에 지도를 그렸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 큰 녀석이 망측하게 오줌이나 싸느냐"며 심하게 꾸지람 하셨고, 아버지는 부엌에 걸려있던 키를 씌어주고 앞집에 가서 소금 얻어 오라며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처음 몇 번은 키 쓰고 놀러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줌싸개라는 동네사람들의 핀잔을 듣고 나서는 쪽 팔려 그 짓도 할 수 없었다. 다른 것은 다 참겠는데 나랑 동갑네기가 사는 옥선, 상순, 경화네로 소금 얻으려 갈 때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불알 값도 못한다는 어른들의 핀잔에 여자 친구들이 학교 가서 놀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는 키를 푹 뒤집어쓰고 얼굴을 최대한 가려야 했다. 오줌싸개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서 은폐와 엄폐를 완벽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키를 쓰고 나다니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둥글고 긴 키는 마른 죽향이 은은한데다 곡물냄새까지 곁들여 고소하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하며, 어떤 날은 향기롭기도 하고 싱그러운 느낌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키에서 나는 냄새만으로도 전날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키는 콩이나 깨, 벼나 보리 같은 곡물을 바람에 날려 옥석을 가리는 일을 하는 농기구이자 생활도구였다. 겨울 한 철만 부엌의 부뚜막 위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키는 부산하게 제 몫을 했다. 키의 원리는 바람에서 찾아야 한다. 둥글고 넓적한 키 속에 곡물을 넣고 위로 높이 올렸다 내리고 흔들기를 반복하면 바람에 날려 가벼운 쭉정이는 밖으로 날아가고 알맹이만 키 안에 남게 된다. 힘이 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키 밖으로, 생명이 있고 힘이 넘치는 것들은 키 안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키 양면에 날개를 갖고 있었다. 새의 깃털 같은 섬세하고 정교한 날개가 곡선의 모양을 하고 밖에서 안쪽으로 기울어 있었는데 곡물이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 같다.

ⓒ 홍대기
키와 곡물이 서로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 역시 바람을 닮았다. 사각사각, 서걱서걱, 아슥아슥…. 곡물에 따라 그 소리가 달랐다. 마치 소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과 냇가나 아랫마을을 거쳐 온 바람 소리가 다르듯이 키에서 나는 곡물 소리도 각기 다르고 생명이 있었다. 어머니의 곱고 아름다운 손놀림에 키와 곡물이 춤을 추고 당신의 치맛자락까지 덩달아 신이 나 춤을 추며 노래했던 그 시절이 생생하다.

부엌 한 쪽에 키와 함께 걸려 있는 것이 체라는 놈이다. 키가 굵고 거친 곡식을 선별할 때 쓰는 것이라면 체는 작고 정교한 곡식이나 액체를 거르는데 쓰는 기구다. 유연하고 질긴 육송을 떠서 둥글게 말아 이음매를 솔뿌리로 꿰매 체바퀴를 만들고, 가늘고 내구성이 좋은 말총으로 정밀하게 체불을 짠 뒤 체바퀴에 체불을 메워 만들었다.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며 만들어 낸 체는 곡물가루를 곱게 차거나 막걸리 찌꺼기를 거를 때도 쓰였다.

ⓒ 홍대기
곡물을 선별하는데 쓰는 농기구 중 풍구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다. 풍구는 근대화와 함께 공작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땅바닥에 세워놓고 사용했는데 양쪽에 큰 바람구멍이 있고, 큰 북 모양의 통 내부에 넓은 깃이 여러 개 달린 바퀴가 있었다. 곡물을 풍로 위의 투입구로 넣고 바퀴와 연결돼 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바람이 나오는데, 이 때 낱알은 풍로 밑으로 떨어지고 쭉정이나 왕겨 같은 잡것들은 바람에 쓸려 나갔다.

풍구는 가을 한 철에 천세나게 쓰였다. 벼나 콩 같은 우연만한 곡물은 풍구의 아늑한 자궁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야만 했다. 그래야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이 구분됐고 생명이 있는 것은 광이나 대청마루에 모셔졌으며 그렇지 않는 것은 두엄자리로 옮겨지는 운명의 순간이 있었다.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의 질서가 있는 것처럼 곡식들도 윤회 같은 운명이 있는데 키나 풍구는 곡식들에겐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버려져야 할 팔자인지, 새로운 씨종자로 알차게 일어서야 할 운명인지, 아니며 저잣거리로 팔려나가고 인간들의 요깃거리로 생애를 마감해야 할 것인지 결정되는 순결하고 숨 막히는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 홍대기
우리 집 대문에는 아버지가 읍내의 대장간에서 얻어 온 풍경이 걸려 있었다. 물고기 한 마리가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쇠를 두드리게 되는데 그 때마다 땡글땡글한 싱그러운 소리가 났다. 바다 속에서 하늘을 향해 지느러미와 꼬리를 치며 솟아오르는 것 같은 힘찬 소리, 숲속의 풀잎 향을 머금은 것 같은 청아한 소리, 순백의 소녀가 콧소리를 내며 노래하는 것 같은 달콤한 소리 등 계절마다, 시간마다, 바람이 올 때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단 한 번도 똑같은 소리, 똑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키질을 할 때나 아버지가 풍로를 돌릴 때는 풍경이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바람과 인간과 농기계가 트라이앵글을 이룰 때만큼은 풍경도 관객이었다. 생활의 발견, 바람의 화원이 우리 집 마당에 가득한 순간인 것이다.

ⓒ 홍대기
청풍문화재단지를 한 바퀴 휘돌아 나오니 고향생각에 젖는다. 시리고 아픈 추억이 새록새록 움트고, 아름다웠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재잘재잘 거린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랜 세월동안 풍화를 견뎌낸 선조들의 삶과 숨결이 오롯이 남아 있다. 아니, 댐을 개발하면서 수몰지역의 유물 등을 한 곳으로 모은 것이지만 역사의 숨결, 자연의 미학, 문화의 가치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청풍향교, 청풍팔영루, 청풍금병헌, 금남루, 초가집을 비롯한 전통 가옥 등 2천여 점에 달하는 유물과 수많은 야생화가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이곳에 서면 말 그대로 푸른 바람에 포위된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푸른 바람, 드넓게 펼쳐진 호수에서 훼를 치고 달려 온 푸른 바람, 하늘 높은 곳에서 햇살을 품으며 쏟아지는 푸른 바람, 그리고 이곳을 한유롭게 거닐며 아날로그 추억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입가에 쏟아지는 푸른 바람…. 청풍(淸風)은 말이 없는데 나그네의 마음만 부산할 뿐이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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