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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기
알알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여름,

맑은 침샘이 솟구치는 도마령길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서 뒷산의 도토리나무에 둥지를 툰 후투디 걱정으로 학교를 빠진 적이 있었다. 어미새가 알을 까고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지만 장맛비에 둥지라도 부서지거나 독수리와 구렁이 같은 강적을 만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등굣길의 친구에게는 "전날 학교에서 급식으로 먹은 빵 때문에 식중독 걸렸다고 말씀해 달라"고 거짓말 시킨 뒤 둥지를 지키기 시작했다. 저번 날에도 이름 모를 큰 새들이 침입하면서 어미새가 새끼들을 지켜내기 위해 고투(苦鬪)한 적이 있는데, 저것들이 홀로 날아다닐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도토리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인데 시골마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와 같은 다양한 참나무과의 나무가 많았다. 이쪽에는 참나무가, 저쪽에는 소나무가 무리를 지어 서로의 지존을 경쟁하고 다투듯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참나무의 공통점은 도토리 열매가 열리고 후투디가 둥지를 틀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홍대기
흉년일 때 더 많이 열리는 도토리는 청솔모나 다람쥐들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시골 사람들에게 곡식 대용으로 배를 불렸고 간식거리로도 그만이었다. 가을 한 철에 뒷산에 올라 도토리를 주운 뒤 며칠을 물에 불려 떫은맛을 제거한 뒤 절구에 찧고 끓이는 등 어머니 손길을 통해 미끈하고 고소한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들기름 양파 마늘을 넣고 버무린 양념간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상추나 오리 같은 채소에 무쳐 먹기도 했으며, 묵은 김치 잘게 썰어 묵밥을 해 먹었고 돌담 위에 올려놓고 말린 뒤 반찬거리로 해 먹으면 쫄깃쫄깃 한 맛, 정직한 자연의 그 맛에 숨죽이고 마음까지 녹아들기도 했다.

늦가을과 겨울, 그리고 이듬해 봄날까지 시골에서는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었는데 동네 어머니들의 맛자랑 손자랑 경연대회를 열 정도였으며 쌀 다음으로 중요한 먹거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한 겨울 땔감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 참나무는 '참으로 좋은 나무'였다.

후투디에서 참나무로 화두가 옮겨졌는데, 어미 후투디는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큰 몸집을 갖고 있다. 검정색과 흰색의 넓은 줄무늬가 있는 날개와 꽁지, 검정색의 긴 댕기 끝을 제외하고는 분홍색을 띤 갈색이었는데 머리위에 있는 깃털은 크고 길어서 우관(羽冠)을 이루고 자유롭게 눕혔다 세웠다는 할 수 있어 새 중의 새라 할 수 있다. 긴 부리를 치켜세운 뒤 파도모양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이 어찌나 멋스럽던지 후투디를 따라 동산 너머까지 달려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어떤 날은 길까지 잃고 어둠의 그곳에서 밤새 울기까지 했다.

후투디는 여름철에 번식을 하고 여름철에 왕성한 활동을 하며 사람들의 손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철새였다. 딱정벌레 나비 벌 파리 거미 지렁이 땅강아지 따위를 잡아먹었는데 시골에서는 이러한 곤충과 유충이 널려있었기 때문에 산과 들, 집과 계곡 등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새였다.
ⓒ 강호생
후투디를 쫓다보면 자연스럽게 땅강아지를 만나게 된다. 땅굴 생활을 하면서 식물 뿌리나 지렁이를 먹는 놈인데 "비이비이~"하는 긴 울음소리를 내며 짝짓기를 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위해 땅굴을 파가며 생활하지만 땅바닥이 한 줄로 들떠 헐거워지거나 꿈틀거리는 곳을 파보면 틀림없이 땅강아지가 나타난다. 어둠과 햇살, 흙과 물, 미로와 바람의 그 어디쯤에서 땅강아지는 리듬을 타고 헐겁게 살아간다. 아이들은 새 먹이를 주기 위해 땅강아지를 잡았지만 어른들은 한약재로 쓰기 위해 잡았다. 끓는 물에 담가 죽인 뒤 햇볕이나 화력으로 건조시키고 한약을 다릴 때마다 사용했는데 사마귀, 지렁이, 지네도 어른들에겐 좋은 약재였다.

여름의 끝자락에는 여치와 메뚜기들의 천국이다. 황갈색의 여치는 통통하고 긴 더듬이를 갖고 있는데 머리와 등쪽에 갈색 딱지를 하고 있다. 풀숲에 자라면서 야행성 활동을 하는데 날개를 서로 문질러서 '뚜르르, 뚜르르~' 소리는 낸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는 자연의 소리인 것이다. 아이들은. 수수대공이나 밀짚으로 여치집을 만들고 햇살을 피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뚜르르, 뚜르르~' 여치도 노래하고 '룰루랄라~' 아이들도 노래하는 틈새에 베짱이와 찌르레기까지 가세하면 대자연의 하모니, 노래하는 천사들과 다름없었다.

들녘에는 메뚜기들이 지천이었다. 여치보다 작지만 무리를 이루어 활동하기 때문에 이따금 농작물 피해를 주기도 했다. 뒷다리가 굵고 길어 폴짝 폴짝 뛰는 게 장난 아니었다. 자기 몸의 10배 이상을 뛰며 무리 지어 하늘로 날아오를 때는 거대한 구름떼를 연상시켰다. 아이들에게 메뚜기 사냥은 놀이이자 노동이었으며, 의무이자 혜택이었다. 황금들녘의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는 것은 신명나는 놀이었고 농작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하는 일이었기에 일종의 노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뚜기 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해야하는 의무의 시간이자 메뚜기를 잡은 뒤 후라이팬에 튀겨 먹기도 했으니 이보다 더 큰 혜택이 어디 있겠는가.

ⓒ 홍대기
풍문처럼 와서 풍문처럼 가는 시골 풍경들이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진하고 진한 생명의 힘이 있었다. 온갖 생명을 잉태하는 곳, 그 생명의 근원을 찾아 이산 저산, 들녘과 시냇물을 구름처럼 바람처럼 오르내리고 떠다니던 소년의 미세한 떨림과 숨소리가 있었다. 등교까지 거부한 채 뒷동산에서 산새들과 놀고 자연과 호흡하며, 곤충과 벗하고 그 많은 식물들을 채집하던 어린 소년은 대자연의 살아있는 생명, 스쳐가는 햇살의 한줄기에 불과했다. 그 생명, 그 햇살이 무럭무럭 자라서 지천명을 향해 달리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이여, 흔들리는 마음이여, 눈물 같은 어지러움이여, 시인의 노래여….

영동 민주지산 자락의 도마령길을 오르내리면서 시골 풍경에 한없이 젖고 또 젖었다. 숲길, 물길, 들길, 마을길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알알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포도밭에 서면 맑은 침샘이 솟구친다. 돌담길을 따라 한유롭게 펼쳐진 마을 풍경 앞에서는 옛 생각에 젖어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계곡물에 등목을 하니 온 몸이 짜릿하다. 좁고 험한 산길을 자박자박 걷다보면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의 합궁소리가 흥에 겹다. 이제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밤하늘의 별이 도마령을 습격할 것이다. 가슴 떨리는 신비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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